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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2015’ 국회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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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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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환
JTBC 정치부 차장

요즘 1988년을 회고하는 예능드라마가 세대를 넘어 폭넓게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드라마는 3저 호황 시대의 절정이었던 88년 서울 강북의 어느 골목을 배경으로 이웃 공동체의 유대감, 가족애, 우정이라는 가치를 비비고 버무려 큰 호응을 얻었다. 20년차 중견 예능 피디는 “갈수록 팍팍해지는 세상에서 따뜻하게 위로받으려는 시청자들의 감성 코드를 이 프로그램이 파고들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덧붙인 말이 짙은 여운을 남긴다. “2015년 겨울이 그만큼 춥고 힘들다는 얘기인 거죠.”

 나중에 2015년을 회고하는 예능오락물이 나온다면 국회편은 어떤 모습일까. TV에 민감한 정치인들이니 시청자들 사이에서 오가는 생각의 일단이라고 하면 관심 깊게 듣지 않을까.

 오늘을 넘기면 사상 초유 기록이 되는 ‘선거구 없당(부존재·不存在)’ 사태는 빠질 수 없을 것 같다. 선거구 획정 문제는 유권자인 일반 국민의 인생은 물론 소소한 일상생활에도 거의 영향이 없다. ‘의원들 밥그릇 문제’라고 청와대로부터 면박을 당하면서도 돌파구를 못 찾고 있을 정도로 우리 정치 현주소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여야는 쟁점법안 처리까지 더해 면피성으로 여덟 차례씩 만나면서 “죽어봐야 지옥맛을 알겠느냐” “국민이 바보냐” 같은 날 선 말들을 수없이 주고받아 프로그램 분량 걱정은 안 해도 될 정도다.

 국회와 정부를 견제와 균형 관계로 짠 우리 헌정 시스템. 국회선진화법이 본격 가동하면서 다수 여당이 법안 통과를 힘으로 밀어붙이지 못하자 새로운 풍경들이 등장했다. 대통령이 여론을 자극하는 날 선 언어와 수식 없이도 스스로 단단한 단어를 골라 정치 뉴스를 휘어잡았다. 대통령은 “배신의 정치는 국민들이 심판해 주시라” “국민을 위해 진실한 사람들만이 선택받을 수 있게 부탁드린다”며 직접 정치 전면에 나섰다. 대통령은 선진화법에 따른 구조적 열세를 일거에 뒤집었다. ‘여당에 대한 대통령의 지배’를 실감 나게 보여줬다.

 당 주도권을 놓고 하반기 내내 어수선했던 제1야당의 혼돈은 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전 대표가 갈라서면서 절정에 달했다. 문 대표 측에선 “너무 많은 혼수를 가져오라 한다”며 안 전 대표를 압박하다 2002년·2012년 대선 때처럼 문전박대 그림이 재연됐다. 안갯속을 헤매던 야당은 존재감을 거의 드러내지 못하고 거대 여당에 끌려만 다녔다는 악몽의 기억을 예비 시청자들에게 심어줬다.

 정치인들은 내년 4월 총선 생각뿐이겠지만 이 겨울의 끝에 봄이 기다리고 있을지 보릿고개가 도사리고 있을지 몰라 알게 모르게 움츠러든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지금까지 이 드라마의 장르는 엽기·코믹·스릴러였다. ‘응답하라 2015 국회편’인데 유쾌한 반전이 없으란 법도 없지 않은가. 현실 정치가 마지막 하루만이라도 국민에게 위로를 줄 수 없을까. 2015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정용환 JTBC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