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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학생'이 유럽 체임버 클라리넷 수석이 되기까지…

중앙일보

입력

“어릴 적엔 클라리넷이 싫었어요. 대신 굴드와 칼라스의 음반을 반복해 들었죠. 그러다 클라리넷으로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의 소리를 모방하기 시작했습니다. 표현의 폭이 넓고 목소리를 닮은 클라리넷의 매력에 눈떴죠.”

로망 귀요(46)는 프랑스 출신의 클라리네티스트다. 16세에 아바도 지휘 유럽연합유스오케스트라, 22세에 정명훈 지휘 바스티유 오케스트라, 34세에 말러 체임버의 수석 주자를 역임했다. 현재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클라리넷 수석이다.

엘리트 코스를 밟았을 법한 그는 학창시절 완고한 교수들에게 찍힌 ‘나쁜 학생(bad student)‘이었다고 말했다. 늘 “왜?”냐고 묻고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 협주곡을 연주할 때도 동료 연주가들의 연주가 납득이 안 갔어요. 답을 구하려 18세기 음악 해석에 관한 책들을 구해 읽었죠. 레오폴트 모차르트 ‘바이올린 연주법’, 요아힘 크반츠 ‘플루트 연주의 예술’, 아르농쿠르의 저서 등을 읽으며 당대 악기들의 연주법을 독학했습니다.”
그는 어떤 연주든 확신이 필요했다. 오케스트라 단원 생활에도 실망감을 느꼈다. 주어진 일과 속에서 평면적인 활동을 이어갔고, 실험이란 존재하지 않는 나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숨통이 트인 건 말러 체임버 및 유럽 체임버에서 연주하면서부터다. 전통적인 대편성 오케스트라나 실내악 단체와 다른 해석에 매료됐다. 특히 아르농쿠르의 베토벤, 슈만, 스메타나, 드보르자크 등 레코딩에 참가하면서 느끼는 바가 컸다.

“아르농쿠르는 다른 지휘자들처럼 음악의 아름다움에 집중하지 않았어요. 대신 세부를 살렸죠. 작년 그의 집에서 베토벤 7중주를 연주했어요. 그가 앉아서 연주를 듣고 있을 뿐이었는데 음악이 고요히 번져가는 걸 느꼈습니다. 연주 뒤 그는 자신이 소장한 고악기들을 소개했어요.”

귀요의 한국과 인연은 2005년 시작됐다.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과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연주하다 플루티스트 윤혜리의 초청으로 올해 서울대에 왔다. 제네바 음악원 교수와 서울대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한국에 온 그는 여유가 없는 사회 분위기를 실감했다고 한다. 빨리 성공해야 하고 성과를 거둬야 하는 이 같은 분위기에 그는 또 “왜?”냐고 물었다.

“빨리 최고가 돼야 하는 한국 사회의 압박감이 심합니다. 한국의 14~16세 학생들의 뛰어난 재능을 보고 놀랄 때가 많아요. 하지만 그들이 20세가 되어도 별다른 진보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저는 ‘좀더 천천히’를 주문하고 싶어요. 예술과 인성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나라 음악계는 전통적으로 현악기가 강세, 관악기는 열세다. 로망 귀요는 관악계 발전의 해법으로 음대에서 악기별 정교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서울대의 경우 현악 분야는 각 악기별로 정교수가 있지만, 목관과 금관 중엔 플루트와 호른, 타악기만 있습니다. 트롬본, 트럽펫, 바순, 오보에, 클라리넷은 정교수 없이 강사들이 있을 뿐이죠. 교수들이 있으면 체계가 잡히고 달라질 겁니다.”

이번에 귀요가 자신의 앙상블인 ‘로망 앙상블’을 결성했다. 김지영, 김지윤(바이올린), 이한나(비올라), 장유진(첼로), 지효원(플루트), 이승경(오보에), 김혜민(바순), 박진우(피아노), 이석준(호른), 채재일(객원 클라리넷) 등과 함께 29일 밤 세종체임버홀에서 창단공연을 갖는다.

앙상블은 이미 많지만 리더는 대부분 지휘자나 바이올리니스트, 피아니스트다. 로망 앙상블은 발터 보이켄스 앙상블처럼 목관악기에 방점이 찍힌 실내악을 들려줄 예정이다. 레퍼토리에는 바로크, 고전, 낭만, 현대가 골고루 들어갔다. 텔레만의 두 대의 클라리넷을 위한 협주곡,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 브람스 세레나데 1번 4악장과 6악장, 코네송 6중주, 골리호프 ‘맹인 이삭의 꿈과 기도’가 프로그램이다. 이번 연주는 녹음해 음반으로 발매한다. 귀요는 로망 앙상블의 다음 계획 중 하나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한 음악회를 준비중이라고 밝혔다.

류태형 음악칼럼니스트ㆍ객원기자 mozar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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