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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과 의병의 활약으로 임진왜란을 극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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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호 1 면

동래부순절도 : 동래부사 송상현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일본군의 요청을 거부하고 결사 항전을 하다 성민(城民)들과 함께 전사했다. <육군박물관 소장> [사진 권태균]


【총평】


고려 말부터 시작된 왜구의 침략은 조선 초기에도 계속되어 해안 지방의 백성을 괴롭혔다. 이에 정부는 수군을 강화하고, 화약 무기를 장착한 성능이 뛰어난 전함을 개발하는 한편, 왜구의 활동을 통제할 수 있는 일본의 막부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럼에도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세종 때 이종무가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했다. 그 후 대마도의 도주가 왜구를 통제하겠다며 조선과의 무역을 요청해 오자, 정부는 남해안의 부산포, 제포(진해), 염포(울산) 등 3포를 개항하여 무역을 허용했다. 16세기에 이르러 왜인의 무역 요구는 늘어났지만, 조선 정부의 통제는 강해졌다. 3포에 출입하던 일본인들은 조선 정부의 통제에 불만을 품고 3포 왜란과 을묘왜변을 일으켰다. 이에 조선은 3포를 폐쇄하고 일본과의 국교를 단절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을묘왜변을 계기로 비변사를 상설화하여 대책을 세웠다. 그러나 군역제가 해이해지면서 국방력이 크게 약해졌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을 이루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불만이 많은 지방 영주(다이묘)들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고 지방 영주들의 힘을 약화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세력을 확장하고자 조선 침략을 추진했다. 전란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조선은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으나, 일본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적절한 대비책을 세우지 못했다. 일본은 조선의 산천과 지리 정보를 수집하고 조통을 개량하는 등 준비를 마친 후에 명을 공격하기 위한 길을 빌린다는 구실로 약 16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했다(임진왜란, 1592). 처음 왜군을 맞은 부산성과 동래성이 함락되었고, 신립이 충주의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항전했지만 적을 막아 내지 못했다. 병력 동원 체제나 무기 성능 면에서 일본군에 뒤져 있던 조선군은 20일 만에 한양을 빼앗겼다. 선조는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신하고 명에 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강원도와 함경도, 전라도 지역에 왕자들을 보내 군사를 모집하게 했다.


수군과 의병의 활약으로 임진왜란을 극복했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일본군 선단을 여러 차례 격파하고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수군을 훈련시키기고 거북선을 개량하는 등 왜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일본의 수군은 남해와 황해 연안에서 물자 약탈하면서 북상하던 일본의 육군과 합세하고자 했다. 왜군은 수군이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여 북상하는 전략을 구상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당포, 한산도 등지에서도 승리를 거두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했고, 그 결과 전라도의 곡창 지대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특히 한산도에서는 학이 날개를 펼친 모습으로 왜군을 포위하는 학익진 전법을 크게 떨쳐 승리를 거둔다. 이에 바닷길을 이용하여 물자를 수송하려던 일본군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수군의 승리는 남해의 해상권 장악하여 일본의 작전을 저지 하는데 기여했고,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 지켜낼 수 있었다.


일본군의 침공에 맞서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향토를 지키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공격하는 등 배후에서 적을 공격했다. 전쟁 초반 조선에 불리하던 전세는 수군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활약으로 점차 바뀌어 갔다. 곽재우, 조헌, 고경명, 정문부 등의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들은 일본군에 큰 타격 입혔다. 또한 휴정과 유정 등이 이끄는 승병의 활약도 컸다.


수군과 의병의 활약은 전쟁 초기 조선에 불리했던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관군은 조선의 요청으로 파견된 명군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했고, 행주산성에서는 백성들과 합심하여 적을 물리쳤다. 왜군은 경상도 해안 일대로 물러나 휴전을 제의했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 조선은 왜군을 완전히 축출하기 위해 전열을 정비했다. 먼저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중앙군의 편제와 훈련 방법 바꾸었다. 또 속오법을 시행하여 지방군 편제를 개편했으며,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을 제작했다.


5위를 중심으로 운영되던 조선 초기의 중앙군은 16세기 이후 대신 군역을 지는 대립제가 일반화되면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임진왜란 초기에 패전을 거듭하게 되자, 조선 정부는 기존의 활과 창으로 무장한 부대 외에 조총으로 무장한 부대를 추가하여 훈련도감을 설치했다. 포수(砲手), 살수(殺手), 사수(射手)의 삼수병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의 군병은 장기간 근무하고 일정한 급료를 받는 직업 군인이었다. 그 후 대외 관계와 국내 정세의 변화에 따라 군영이 더 설치되었다.


지방군의 방어 체제에도 변화가 있었다. 조선 초기에 시행된 진관 체제는 많은 외적이 침입해 오면 방어에 어려움이 있어 16세기 후반에는 유사시 각 지역의 병력을 한 곳에 모을 수 있도록 제승방략 체제가 수립되었다. 이 체제는 전방 방어선이 무너지면 후방 방어선을 구축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임진왜란 중에 드러났다. 그러자 다시 진관을 복구하고 속오군 체제로 지방군을 정비했다. 속오군은 위로는 양반부터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편성되었는데, 겨울철 농한기에 훈련을 시행하여 전쟁에 대비했다. 속오군 편제에서 양반들은 점차 제외되어 나중에는 상민과 노비만 남게 되었다.


일본군이 남쪽 해안 지방으로 밀려난 가운데 명과 일본 사이에 휴전 협상이 진행되었다. 3년에 걸친 명과 일본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어 왜군이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정유재란, 1597). 이미 침략에 대비하고 있던 조?명 연합군이 일본군을 직산에서 격퇴하고,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명량 해전에서 큰 승리 거두었다.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자 본국으로 철수 했다. 이순신은 본국으로 철수하는 일본군을 노량에서 크게 물리쳤다. 이로써 전쟁은 7년 만에 막을 내렸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조선, 명, 일본이 모두 참전하여 국제전의 성격을 띤 전쟁이었다. 이로 인해 전쟁은 각국의 내정뿐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명은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전쟁에 참여하여 국력이 더욱 약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만주에서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명과 여진족 사이의 긴장이 높아졌다. 명과 조선, 일본이 전쟁을 벌이는 동안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했다(1616). 쇄약해진 명은 결국 여진족에 의해 멸망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명이 멸망한 후에도 은혜를 입었다는 이유로 명을 숭상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전쟁터였던 조선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 중 일본군에 의해 살상된 경우뿐 아니라 굶주림과 질병으로 인해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 전국의 농경지도 대부분 황폐해져 전쟁 이후 한동안 심각한 식량난과 재정 부족 문제가 나타났다. 7년간의 전쟁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조선은 이를 복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민생 안정과 국가 재정 확충을 위해 농경지를 개간하였으며, 토지와 인구를 다시 조사하고 정리하였다. 또한 전쟁 중 질병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자 “동의보감”을 편찬하도록 하는 한편, 무너진 성을 다시 쌓고 무기를 수리하는 등 국방력 정비에도 힘을 기울였다.

깊은 시름 하던 차에(95Χ140㎝) 이순신 장군은 한산대첩에서 일본 수군의 주력 115척을 궤멸시켜 ‘조선 회생’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 덕택에 곡창 지대인 호남을 확보하게 돼 일본군은 멀리 본토에서 군량을 조달해야 하는 고달픈 상황에 빠졌다. [우승우(한국화가)]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그러나 일본의 에도 막부는 전쟁 후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대마도 도주를 통해 국교를 재개하자고 요청했다. 조선은 사명 대사를 일본에 파견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강화 의사를 확인하고 조선인 포로 1,400여 명을 데려왔다. 1607년 회답사를 파견하여 국교를 재개하고, 1609년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무역을 허용했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 비해 무역량은 대폭 제한되었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정권이 교체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았다. 그는 에도(도쿄)에 새로운 막부를 열고 전쟁 참여로 약화된 다이묘 세력을 누르고 중앙 집권을 꾀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이 조선 침략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내세워 조선에게 국교 재개를 요청했다. 또한, 조선으로부터 통신사를 초청하여 내외로 정치적 위상을 과시했다. 일본은 조선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고, 막부의 실권자인 쇼군이 바뀔 때마다 그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조선에 사절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19세기 초까지 12회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했다. 통신사 일행은 보통 300~500명 정도였다. 일본에서는 이들을 국빈으로 대우했다. 일본은 통신사를 통해 조선의 선진 학문과 기술 수용했다. 통신사는 단순한 외교 사절의 의미를 넘어 일본에 문화를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사림은 네 차례에 걸친 사화, 즉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사림은 지방의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계속 성장해 나갔다. 16세기 후반 선조 때에 이르러서는 사림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사림은 유명한 학자를 중심으로 학문과 정치 성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붕당을 이루었는데, 이후 붕당은 중앙 정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서로 경쟁하였다.


선조는 훈구 세력을 멀리하고 사림 세력을 대거 기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붕당 정치는 사림이 집권하면서 등장했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국왕이 주재했지만, 사림이 공론을 내세워 국정을 주도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학연에 따라 모인 사림은 내부 토론을 거쳐 형성된 여론인 공론을 바탕으로 국정을 이끌어 갔는데, 이를 붕당 정치라고 한다. 이러한 붕당정치는 재야 사림의 의견까지 폭넓게 수렴할 수 있고, 붕당 상호 간에 비판과 견제가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붕당 정치는 늘어난 사족이 제한된 관직과 경제적 이권을 놓고 벌이는 권력 다툼의 성격도 있었다.


사림 세력은 척신 정치의 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를 놓고 갈등을 겪었다. 척신 정치에 온건한 입장인 사람들이 서인을, 척신 정치에 강경하게 반대한 사람들이 동인을 형성했다. 사림은 선조 때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진 이후 붕당을 이루어 정치를 운영했다.


동인은 이황, 조식, 서경덕의 학문을 계승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신진 세력이 참여하여 먼저 붕당의 모습을 갖추었다. 반면에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 가담하면서 붕당을 형성했다. 이후 붕당은 정파적 성격과 학파적 성격을 함께 지니게 되었다. 서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정치적 실권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정철이 선조에게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라는 건의를 올렸다가 선조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서인이 정계에서 쫓겨났다. 정권을 되찾은 동인은 서인에 대한 처리를 놓고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남인이 정국을 주도했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집권하여 광해군 때 정국을 주도했다. 북인은 서인과 남인을 배제한 채 정권을 독점하려 했다. 그러나 광해군과 북인은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몰락했다. 동인의 전통은 인조반정 때 서인을 지지하여 살아남은 남인이 잇게 되었고, 서인은 남인 일부와 연합하여 정국을 이끌어 갔다. 이후 서인과 남인은 명에 대한 의리 명분론을 더욱 강화하고 반청 정책을 추진하다가 병자호란을 불러오고 말았다.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주화파와 척화파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고, 인조 때에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 산림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붕당 정치가 전개되면서 비변사의 정치적 역할이 강화되었다. 비변사는 원래 여진족과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임시회의 기구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비변사는 전?현직 정승을 비롯하여 주요 관원이 대부분 참여했다. 비변사에서는 군사 문제뿐 아니라 외교, 재정, 사회, 인사 문제 등 거의 모든 정무가 다루어졌다.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 체계는 유명무실해졌다.


양 난을 거치면서 농촌 사회는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임진왜란 직전 전국의 토지 결수는 150만 결이었는데, 종전 직후에는 30여만 결로 줄어들었다. 인구는 줄고 농경지는 황폐해졌으며, 굶주림과 질병까지 널리 퍼져 농민의 삶은 매우 어려워졌다. 하지만 지배층은 이러한 농촌 현실에 적극 대처하지 못하였으므로 농민들의 불만은 커졌고, 유망한 농민들은 도적이 되어 사회를 불안하게 했다. 이에 정부는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고 재정 기반을 확보해야 했다. 먼저 정부는 황폐해진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해 개간을 권장하면서 전국적인 양전 사업을 전개했다. 그러면서 양안에 빠진 토지를 찾아내어 경작지에는 빠짐없이 전세를 부과하도록 했다. 그리고 영정법을 시행하여 풍년과 흉년에 관계없이 토지 1결당 쌀 4~6두 씩 내게 하여 전세를 줄여 주었다(1635). 영정법의 시행으로 전세의 비율은 다소 낮아졌지만, 농민의 부담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 전세를 낼 때 여러 명목의 수수료, 운송비 등이 함께 부과되었는데, 지주들이 농민들에게 부담을 떠넘겼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정치?경제적인 변화는 신분 질서를 변화시켰다. 중간 계층과 상민들이 양반으로 신분이 상승되고 노비가 상민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결과 양반의 수는 더욱 늘어나고, 상민과 노비의 수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16세기 이후 소작 경영을 하는 지주들이 양반에 합류하더니,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도 상민들도 양반이 되었다. 전쟁에서 군사적 공로를 세운 사람이 신분 상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재정적 타격을 받은 정부가 공명첩을 발급하고 납속책을 시행하자, 서얼과 상민들이 이를 이용하여 신분 상승하는 경우도 많았다. 양반 사이에서는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 권력을 잡은 일부 양반을 제외하고 다수 양반은 몰락하게 되었다. 정권에서 밀려난 양반은 관직에 등용될 기회를 잡지 못한 채 향촌 사회에서 겨우 위세를 유지하는 향반이 되거나 더욱 몰락하여 집안 세력이나 살림이 아주 보잘 것 없어진 잔반이 되기도 했다.


【핵심 키워드】


☞ 일본은 약 16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했다([임진왜란, 1592]). [이순신]은 [거북선]을 개량하는 등 왜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이순신이 이끈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당포, [한산도] 등지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수군의 승리는 남해의 해상권 장악하여 일본의 작전을 저지 하는데 기여했고,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 지켜낼 수 있었다. 수군과 [의병의 활약]은 전쟁 초기 조선에 불리했던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조선은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중앙군의 편제와 훈련 방법을 바꾸었다. 포수(砲手), 살수(殺手), 사수(射手)의 [삼수병]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의 군병은 장기간 근무하고 일정한 급료를 받는 직업 군인이었다. 또 [속오법]을 시행하여 지방군 편제를 개편했으며,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을 제작했다. 16세기 후반에는 [제승방략 체제]가 수립되었다. 이 체제의 약점이 임진왜란 중에 드러나자, 다시 진관을 복구하고 [속오군 체제]로 지방군을 정비했다.


3년에 걸친 명과 일본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어 왜군이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정유재란, 1597]). 조?명 연합군이 일본군을 직산에서 격퇴하고,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명량 해전]에서 큰 승리 거두었다. 이순신은 본국으로 철수하는 일본군을 노량에서 크게 물리쳤다.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했다(1616)].


일본의 에도 막부는 대마도 도주를 통해 국교 재개를 요청했다. 1607년 [회답사]를 파견하여 국교를 재개하고, 1609년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무역을 허용했다. 일본은 조선에 사절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통신사]를 파견했다.


학연에 따라 모인 사림은 내부 토론을 거쳐 형성된 여론인 공론을 바탕으로 국정을 이끌어 갔다([붕당 정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 체계는 유명무실해졌다. 양 난 이후, 정부는 전국적인 [양전 사업]을 전개했다. 그리고 [영정법]을 시행하여 풍년과 흉년에 관계없이 토지 1결당 쌀 4~6두 씩 내게 했다(1635).


임진왜란 이후 정치?경제적인 변화는 신분 질서를 변화시켰다. 전쟁에서 군사적 공로를 세운 사람이 신분 상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재정적 타격을 받은 정부가 [공명첩]을 발급하고 [납속책]을 시행하자, 서얼과 상민들이 이를 이용하여 신분 상승하는 경우도 많았다. ☜


【예상 문제】


1. 다음 자료와 관련된 전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중국의 대병력과 도원수 휘하의 아군 병력이 가세하여 평양성을 포위하고 칠성?보통?함구 등 세 성문 밖에 진을 쳤다. 잠시 후에 대포를 쏘면서 공격을 시작하여 칠성문을 깨뜨리고 들어갔다. 이 기세를 몰아 보통문과 함구문고 부수고 들어가 적을 완전히 제압하였다.


① 국왕이 의주로 피신하였다.


② 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되었다.


③ 매소성과 기벌포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④ 정봉수, 이립 등의 의병장이 활동하였다.


⑤ 군신 관계를 맺는 조건으로 강화가 이루어졌다.

* 2015학년도 수능 3번


2. 가상의 전란 일지에서 손상된 부분에 들어갈 내용으로 볼 수 없는 것은?


① 임금의 행차가 의주에 도착하였다.


②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③ 이순신이 적의 수군을 명량에서 대파하였다.


④ 권율이 행주산서에서 적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⑤ 정부가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를 개편하였다.

*2010학년도 6월 모의평가 15번


3. ?지도는 왜란 때의 주요 격전지를 나타낸 것이다. A~D에 대한 옳은 설명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보기]


ㄱ. ? A ? 조?명 연합군이 탈환하여 전쟁 상황을 반전시킨 곳이다.


ㄴ. ? B ? 의병이 주축이 되어 적의 대규모 공격을 물리친 곳이다.


ㄷ. ? C ? 정유재란 때 조선 수군이 대승을 거둔 곳이다.


ㄹ. ? D ? 전쟁의 마지막 격전지로 이순신이 전사한 곳이다.


① ㄱ, ㄴ ? ??② ㄱ, ㄷ ??③ ㄴ, ㄷ ? ? ?④ ㄴ, ㄹ ? ?⑤ ㄷ, ㄹ

* 2009학년도 9월 모의평가 7번


4. ??다음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만든 가상의 공고문이다. 이와 관련된 군사 조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왜군의 조총 부대에 맞설 군인을 모집함 ?(급료를 지급함)

모집 : ○○명

자격 : 신분에 상관없이 무예가 뛰어난 성인 남자

시험 : 높이 뛰기, 돌 들어올리기 등의 체력 검사

-모집처 : ○○기구 ? ?159△년 △월 △일-


① 삼수병을 편성하여 군사 훈련을 하였다.


② 제승방략 체제에 입각하여 부대를 조직하였다.


③ 의정부 및 6조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④ 진관 체제를 토대로 국경 요충지에 군사를 배치하였다.


⑤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유사시에 전투에 동원되었다.

* 2008학년도 6월 모의평가 10번


5 ?(가) 인물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적절한 근거를 [보기]에서 고른 것은?

[보기]

ㄱ. 노비종모법이 시행되었다.

ㄴ. 부농층이 족보를 매입하였다.

ㄷ. 정부가 공명첩을 발급하였다.

ㄹ. 천주교와 동학이 확산되었다.


① ㄱ, ㄴ ? ? ??② ㄱ, ㄷ ? ? ??③ ㄴ, ㄷ ? ? ??④ ㄴ, ㄹ ? ? ? ?⑤ ㄷ, ㄹ

* 2014년 10월 학력평가 9번


6.?(가), (나) 사건 사이에 일어난 사실로 옳은 것은?


가) 부산 첨사 정발이 절영도에 사냥 갔다가 급히 돌아와 병사와 배경을 모두 입성시켜 성을 지켰다. 정발이 성문을 지키며 항전하니 왜적의 무리도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많았다. 정발은 화살이 다하여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고, 끝내 성은 함락되었다.


(나) 명 제독 이여송이 평양성의 칠성문을 공격, 대포로 문을 부수고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갔다. 그리하여 1천 2백 80여 명을 참획(斬獲)하고 … (중략) … 노획한 말과 기계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① 명과 일본 간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었다.


②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③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통일하였다.


④ 조선은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전열을 정비하였다.


⑤ 조선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 2013년 7월 학력평가 13번


7.?(가)~(마) 시기의 정치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가) -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과 연합하여 공존하는 구도가 유지되었다.


② (나) - 북인이 서인과 남인을 배제한 채 정권을 독점하였다.


③ (다) - 남인이 중용되고 척신과 환관 세력이 제거되었다.


④ (라) - 서인에게 나누어진 노론과 소론이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⑤ (마) - 국왕이 정치의 중심에 서서 붕당 간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이 제기되었다.

* 2012학년도 9월 모의평가 19번


8.?밑줄 친 ‘외적’에 대한 임진왜란 이전의 정책을 옳게 설명한 것만을 [보기]에서 있는 대로 고른 것은?


북병사가 보고하기를, “경원 밖의 외적이 녹둔도의 목책을 포위했을 때 경흥 부사 이경록과 조산 만호 이순신이 판단을 잘못하여 군사 10여 명이 전사하고 106명의 사람과 15필의 말이 끌려갔습니다. 국가에 누를 끼쳤으므로 이 경록 등을 가두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보기]

ㄱ. 매년 정기적으로 사절을 교환하였다.

ㄴ. 귀순과 정착을 유도하여 동화시키려 하였다.

ㄷ.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진, 보를 설치하였다.

ㄹ. 염포 등 삼포를 개방하여 무역과 거주를 허락하였다.


① ㄱ, ㄹ ? ??② ㄴ, ㄷ ? ??③ ㄷ, ㄹ


④ ㄱ, ㄴ, ㄷ ? ??⑤ ㄱ, ㄴ, ㄹ

* 2010학년도 9월 모의평가 5번


【정답 및 해설】

해설 : 정답 ①
① 지문의 내용을 통해 임진왜란 당시 조명연합군에 의한 평양성 수복임을 알 수 있다. 전쟁 초기 선조는 왜군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의주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이후 이순신이 남해 제해권을 장악하고 의병과 명군의 활약 등에 힘입어 전세를 뒤바꿨다.

해설 : 정답 ③
③ 이순신의 명량 대첩은 휴전 회담이 결렬되고 정유재란 때 일본군을 물리친 사건이다.

해설 : 정답 ②
제시된 지도에서 A는 평양, B는 행주, C는 울돌목, D는 한산도이다.


② ㄱ. 명의 원군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임진왜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어 갔다. ㄷ. 3년여에 걸친 명과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침입해 왔다. 이를 정유재란이라 한다. 이 때 이순신이 적선을 명량에서 대파하자, 왜군은 남해안 일대로 후퇴하였다.

해설 : 정답 ①
제시된 자료를 보면 왜군의 조총 부대에 대항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는 것을 통해 임진왜란 시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급료를 지급한다고 했으므로 직업 군인임을 알 수 있다.


① 이 군인은 임진왜란 중에 훈련도감에 배치되었던 삼수병이다. 삼수병은 포수, 사수, 살수를 말하는데, 급료를 받는 직업 군인으로 구성되었다.

해설 : 정답 ③
③ 양반의 수가 늘어난 이유는 공명첩과 납속책의 남발 때문이다. 향촌 사회에서 부를 축적한 부농이 족보를 매입하는 것 역시 이런 현상으로 이해하면 된다. 노비종모법이나 천죽와 동학의 확산이 시기적으로 같은 때이나 양반의 수가 늘어나는 현상과는 상관이 없다.

해설 : 정답 ⑤
⑤ 이순신은 옥포 해전에서 첫 승전을 거두었으며 한산도 대첩을 통해 남해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명량해전이나 노량해전은 정유재란 때의 일이다.

해설 : 정답 ⑤
⑤ 숙종은 붕당 정치의 전개와 변질을 없애기 위해 왕이 직접 정치의 중심에 서서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을 제기하였으나, 편당적 인사관리라는 비판을 받았다.

해설 : 정답 ②
경원은 두만강 하류의 국경 지대로 이 지역 밖에서는 여진족이 생활하였다. 세종 때 여진을 정벌하고 4군과 6진을 설치한 이후 조선은 회유와 토벌의 양면 정책을 취하였다.


② ㄴ. 조선 정부의 대 여진 회유책으로는 여진족의 귀순을 장려하기 위해 관직을 주거나 정착을 위한 토지와 주택을 주는 것, 무역소를 설치해 주는 것이었다. ㄷ. 조선 정부의 대 여진 강경책으로는 이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진, 보를 설치하여 군사를 주둔시키고,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정벌하는 것이었다.

<오답 풀이>


ㄱ. 명에 대한 사대 정책에 해당한다.


ㄹ.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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