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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에 빠질 뻔한 필리핀 50대 한인 살인사건…한국 경찰이 풀어

중앙일보

입력

지난 20일 필리핀 바탕가스 주 말바르 시. 십 여년 전 필리핀에 정착했던 교민 조모(57)씨는 이날 자신이 건설하는 기숙사 신축공사 현장에 마련된 임시숙소에서 잠을 자다 변을 당했다. 새벽 1시30분께 복면을 쓴 4명의 괴한이 숙소에 침입한 것이다. 소음기가 달린 권총 2정과 소총 1정을 소지한 이들은 침대에서 자고 있던 조씨 등을 제압한 뒤 돈을 요구했다. 1만페소(한화 25만여원)와 전기밥솥 등을 챙긴 이들은 집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잠시 뒤 한명이 다시 들어와 권총 6발을 조씨에게 발사했다.

장기 미제사건이 될 뻔했던 이 살인사건 수사가 한국에서 파견된 경찰관들의 공조로 속도를 내고 있다. 경찰청은 지난 21일 필리핀 현지로 파견했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김동환 총기분석실장 등 수사팀 4명이 공조수사를 마무리하고 25일 새벽 귀국했다고 밝혔다. 수사팀은 CCTV분석을 통해 용의차량을 특정하고 청부살해 가능성을 찾아내 필리핀 경찰에 관련 내용을 공유했다.

가장 큰 성과는 실제 범행을 저지른 용의자들의 도주차량을 특정한 것이다. CC(폐쇄회로)TV 전문가인 김희정 행정관은 저화질로 찍힌 CCTV 화상을 보정해 흰색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용의차량 사진을 확보했다. 수사팀은 이를 근거로 인근 고속도로 CCTV를 분석해 용의차량이 인근 고속도로 요금소를 통과하는 장면을 찾았다. 경찰은 이 영상을 확대 보정해 차량번호를 확인한 다음 필리핀 경찰에 제공할 방침이다.

경찰은 또 용의자들의 행동분석을 통해 이 사건이 단순강도가 아니라 청부살인일 가능성도 제시했다. 범행장소가 자택이 아닌 임시숙소인 점,비교적 소액인 1만페소와 전기밥솥 등의 가전제품만 챙겨간 점,범행 전후 용의자들의 행동과 도주 패턴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했을 때 단순 강도로만 보기에는 미심쩍은 점들이 보인다는 이유에서다. 경찰청 관계자는 “일단 실제 범행을 저지른 용의자들을 체포하는 게 우선”이라며 “다만 단순 강도살인 가능성뿐만 아니라 계획적인 청부살인일 가능성도 있는 만큼 이를 필리핀 경찰에 자문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김 총기분석실장은 현장구조와 목격자 진술 등을 분석해 필리핀 경찰이 놓친 탄피와 실탄을 추가로 발견했다. 아울러 범행에 사용된 총기가 45구경 권총과 22구경 소총인 점과 이들 총기가 사제품인 점 등을 확인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필리핀 경찰이 요청하면 추가 파견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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