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50년간 매일 모았더니 사과박스 140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기사 이미지

창간호부터 중앙일보를 구독해 온 이경출 할아버지(왼쪽)가 최근까지 모은 중앙일보는 1만5000부가 넘는다. 22일 기증식에서 이씨가 박물관의 주익종 학예연구실장과 함께 창간호를 살펴보고 있다. [신인섭 기자]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집이 경매에 넘어간 적이 있는데, 그때도 다른 건 몰라도 중앙일보만은 다 챙겨 이사갔다.”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중앙일보 50년치를 모두 보관해 온 이경출(96)씨의 말이다. 이씨는 창간호부터 지난달 16일 발행된 15794호까지의 중앙일보 중 날씨 문제로 배달 받지 못한 170여 부를 제외한 총 1만5634부를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창간독자 96세 이경출 할아버지
1만5634부 역사박물관에 기증
“집 경매 넘어갔을 때도 다 챙겨”
박물관 측 “중요한 역사연구 자료”

 이씨는 50년 전인 1965년부터 중앙일보를 구독했다. 이씨의 나이 46세 때였다. 이씨가 기증한 창간호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지만 50년 전 발행된 신문이라고 믿기 힘들정도로 상태가 좋았다. 이씨가 중앙일보를 애지중지 간직해 온 것은 신문이 세상과 만나는 통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신문이 없을 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수 없었는데 신문 덕에 지식과 분별력을 가질 수 있었다”며 “그래서 이사를 8번이나 다니는 동안에도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모아 왔다”고 말했다.

 이씨가 모은 신문은 부피가 20㎏짜리 사과상자 140개에 달하는 양이다. 그는 집에 두기가 어려워진 신문들을 보관하기 위해 7년 전 직접 컨테이너를 구입했다. 신문을 한부도 버리지 않고 보관할 수 있도록 도운 일등공신은 중앙일보 창간 당시 중학생이었던 이씨의 아들 낙천(63)씨다. 이씨는 그에게 매달 한달치 신문을 순서대로 정리하고 상자에 보관하는 일을 맡겼다. 낙천씨는 “다 읽고 난 신문이 섞여 있으면 한 장 한 장 지면 순서대로 정리해 상자에 담는 게 어린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고깃집에서 고기를 팔 때 신문지에 싸서 팔았는데 다른 신문은 다 고깃집에 갖다주고 용돈을 챙겼지만 중앙일보만은 한 부도 빼놓지 않고 모았다”고 덧붙였다.

 이경출씨는 지금도 매일 아침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며 세상과 만나고 있다. 정성스레 모아 온 신문을 기증하게 된 것은 창간 50주년인 지난 9월 22일자 신문에 실린 다른 애독자의 인터뷰 기사 때문이었다. 이씨는 본지로 전화를 걸어 기증 의사를 밝혔고, 기증 장소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으로 정해졌다. 역사박물관 측은 지난달 16일 경북 포항시에 있는 이씨 집으로 5t 트럭을 보내 신문을 기증 받아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외부 수장고로 보냈다.

 22일에는 박물관 7층 관장실에서 기증식이 열렸다. 이씨와 낙천씨 등이 참석했다. 역사박물관 측은 이씨에게 기증 증서와 기념품을 증정하고 창간호와 1000호, 2000호, 1만호 등 주요 신문들을 공개했다. 중앙일보도 감사패를 전달했다. 이씨는 “중앙일보와 나는 끊을 수 없는 인연으로 묶여 있다. 신문 안에는 버릴 내용이 하나도 없으니 사람들이 신문을 읽고 많은 것을 배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낙천씨는 “아버지 덕분에 자손들 모두 신문 읽기가 습관이 됐다.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보는 게 아닌, 다양한 지식과 교양을 골고루 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문”이라고 말했다.

 역사박물관 측은 기증 받은 신문으로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고 연구자료로도 활용할 예정이다. 이용석 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모든 상자마다 연도와 날짜가 정확하게 기록돼 있다. 보관상태만 봐도 기증자의 정성이 느껴졌다”며 “중요한 역사연구 자료로 이용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글=윤정민 기자 yunjm@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