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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지현우가 튀어나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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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발견, 아니 반전이다. 지현우(31)는 더 이상 사람 좋은 웃음으로 연상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어린 남자가 아니다. 얼마 전 종영한 tv 드라마 ‘송곳’(JTBC)에서 그는 지난 10년간의 연기 생활을 뒤집겠다는 듯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가 맡은 역할은 붉은 조끼를 입고 노동 운동의 선봉에 선, 푸르미 마트의 이수인 과장. 끊임없이 이상과 현실, 원칙과 타협 사이에서 고민하는 문제적 인간이었다. 노동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이 드라마가 이룬 성취는 다양하겠지만, 그중에서도 지현우의 발견을 빼놓을 수 없다.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을까. 종영 직후 만난 지현우는 “천천히 수인과 헤어지는 중”이라고 했다.

드라마 '송곳' 지현우

분명히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기어이 한 발을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
- 1부 구고신(안내상)의 내레이션

지현우가 ‘송곳’을 한다고 했을 때 ‘미스 캐스팅’이란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최규석 작가의 원작 웹툰을 지지하는 네티즌들은 “로맨스와 코미디를 주로 하던 배우가 이수인 역을 맡는다고?”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육사 출신의 푸르미 마트 과장인 수인은 마트 사원을 해고하라는 부당한 지시에 반발해 노동 조합을 만드는 인물이다. 고지식한 성격 때문에 수인을 싫어하던 마트 사원들은 그의 정의로운 행동에 마음을 내어준다. 2000년대 연하남 열풍의 일선에 있던 지현우에게 이런 인물을 대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작 지현우는 태풍의 눈처럼 고요했다. 오히려 수인과 자신이 접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고지식해서 사람을 사귀는 데 서툰 천성 말이다. 그는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2004~2005, KBS2)에서 자신을 발탁했던 김석윤 감독의 제안에 고민 없이 응했다. 인생의 멘토로 생각하는 김 감독과의 재회도 그가 고대하던 바였다.

“전에 감독님께 제가 싹싹하지 못해서 사람을 두루두루 챙기지 못하는 것 같다고 고민을 털어놓은 적 있어요. 감독님은 ‘그건 나쁜 게 아니다’라고 말씀해주셨죠. 아마 그때 제게서 수인을 발견하신 것 같아요.” 지현우는 촬영 전 몸과 마음을 완전히 비웠다. 그가 분석한 수인은 서툰 인간이다. 그래서 왕따가 체질인 인간. 하지만 불의를 보면 타협하지 못하고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인간.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다른 이의 불행이 될까 두려워하는 인간. 지현우가 웹툰 속 수인처럼 옆가르마를 타고 맞춤양복을 입은 채 마트에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놀랐다. 그곳에 지현우는 없었다. 수인이 있었다.

“기분이 더럽다. 하지만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다. 난 이미 죽었고, 내 발로 알아서 치워져 줄 마음은 없다. 날 치워 봐라.”
- 2부 지점장의 부당한 대우에 화가 난 수인의 독백

‘송곳’은 배우들에게 퇴로가 없는 현장이었다. 첫 촬영 전에 이미 8부까지 대본이 나온 상태였고, 영화 현장처럼 카메라 세 대가 동시에 돌고 있었다. 지현우는 “완벽하게 세팅된 현장이었기 때문에 배우가 대본을 못 외우거나 버벅거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며 “스태프들이 어떻게든 좋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데, 내가 못하면 이 사람들의 꿈까지 무너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신인 시절에 만난 김 감독과의 재회도 지현우를 초심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는 “감독님께 독설을 많이 들었다”며 “제대로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쉬는 시간에도 마음껏 웃고 떠들지 못했다”고 했다.

지현우는 철저히 수인이 됐고, 그래서 내내 외로웠다. 기존에 주로 연기한 캐릭터가 좋은 에너지로 시련을 이겨내고 해피엔딩을 맞이했다면, ‘송곳’은 달랐다. 마트사원들의 노조 운동은 좌절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대본을 보면 ‘슬프다’라는 지문이 유독 많았어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요. 수인은 노동 상담소 소장이자 그의 조력자인 고신(안내상)의 말처럼 ‘겁도 많고 싸움도 싫어하는데 싸움을 피할 줄 모르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니 화낼 만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신을 컨트롤하죠. 외로운 인물이에요.” 지현우는 수인이 힘들 때 인정 넘치는 아줌마 노조원들로부터 힘을 얻었던 것처럼, 동료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송곳’엔 안내상, 김희원을 비롯해 연극판에서 공력을 쌓은 ‘연기 도사’들이 수두룩했다. “선배들이 진지하고 창의적으로 연기에 임하는 자세에 자극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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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아직 노조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저보다 여러분(노조원)들에게, 여러분들보다는 한 달치 월급 때문에 (노조를) 탈퇴한 사람들에게, 탈퇴자보다는 가입할 용기조차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입 자격도 불확실한 계약직들에게, 노조는 더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더 절실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지 않는 노조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 8부 수인의 연설

‘송곳’은 노동 운동을 정면으로 다룬, 전무후무한 드라마다. 여기에 지현우는 회사 생활을 해 본 적 없기 때문에 더 낯선 소재였다. 그는 촬영을 준비하며 실제 파업투쟁 현장을 찾아가 노동자들을 관찰했다. “정말 아무도 웃지 않더라고요. 이어폰으로 ‘송곳’의 내레이션을 계속 듣고 있었는데 여러 번 울컥 울컥했어요. 모두 싸우자고 덤비는 게 아니잖아요. 그저 기본적인 것을 요구하는 건데, 왜 이런 죄인의 시선을 받아야 하는지 안타깝고 슬펐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드라마를 통해 (기본권을 위해 싸우는 분들께) 위안을 드리는 것이었어요.” 드라마는 결국 노조원을 위해 수인이 희생을 택하며 막을 내린다.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다. 이 결말을 지현우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수인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어요. 그는 좌천됐지만 노조원들의 진심을 얻었고 그것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수인은 그곳에서 또 자신의 돌파구를 찾을 거예요. 언제든 송곳처럼 튀어나올 수 있도록.”

“저는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습니다.”
- 8부 수인의 대사

지현우는 지난해 군 제대 후 복귀 과정에서 슬럼프에 시달렸다. “배우는 정규직이 아니잖아요. 누군가에게 선택받아야 하는 직업이고, 그렇다면 상품으로서 매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게 불안했던 것 같아요.” 그는 ‘송곳’을 지나오며 한 뼘 더 자랐다고 했다. 결국 돌파구는 연기였다. 대중에 얼굴을 알리기 위해 잠을 줄이고 드라마와 뮤지컬 배우, MC, 가수까지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했던 20대를 지나, 그는 좀 더 연기에 집중하고 싶은 30대를 맞이했다. “연기의 기초부터 다시 배우고 싶어요. 연극 연기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야 텔레비전에서 더 강한 에너지를 뿜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양성도 생각하게 되는데, ‘송곳’ 이후 멜로가 아닌 다른 장르의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와서 기뻐요.” 최근 그는 20대엔 절대 하지 않았던, “정말 연기를 잘해서 인생의 작품을 남겨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는” 수인처럼 지금 지현우는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다.

김효은 기자 hyoeun@joongang.co.kr 사진=정경애(STUDIO706)

스타일리스트 송희경, 임지민 메이크업 고미영(에바이봄) 헤어 박정아(에바이봄) 의상 닐바렛 바이 쿤, 권오수 클래식, 톰포드, 아르키메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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