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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숙한 말·표정으로 현대인 외로움 달래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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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호 2 면

15일 서울 장충동 타작마당에서 열린 ‘로봇파티’에서 해커톤 참가자(왼쪽부터 중국 쑨콴, 한국 오진환, 일본 아쓰히코 도미타)가 각자 만든 로봇을 소개하고 있다. 프리랜서 박건상

지난 15일 서울 장충동 통섭인재양성소 타작마당에서 파티가 시작됐다. 전자기타와 드럼 합주가 실내에 울려퍼지고 바텐더는 제조(?)한 ‘폭탄주’를 손님에게 제공하느라 바빴다. 반가운 인사와 건배 제의가 이어지며 파티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한쪽에서는 어지럽혀진 테이블을 치우는 손길이 분주했다.


이날 파티의 주최자는 사람이 아닌 로봇. ‘감성 소통’을 주제로 한 ‘로봇 파티’다. 현장에 있는 바텐더·연주자·청소부 모두 로봇이다. 걸쭉한 입담을 자랑하는 ‘욕쟁이 할매봇’, 건배하면 단숨에 술잔을 비우는 ‘드링키’, 답답한 감정을 대변하듯 쓰레기를 토해내는 ‘쓰레기통 로봇’ 등 로봇과 인간의 접점을 자극하는 50여 개의 ‘감성 로봇’이 내년 1월 16일까지 이곳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자폐증·우울증 치료에 효과실제 로봇은 현대인의 소통 부족을 해소할 현실적인 대안으로 평가받는다. 미국 텍사스주립대와 로보카인드사가 함께 만든 60㎝ 높이의 소형 로봇 ‘마일로’는 3%에 불과한 자폐아 치료 집중도(치료에 집중하는 정도)를 87%까지 높였다. 같은 말을 일정한 속도와 톤으로 반복해 주는 데다 화도 내지 않아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일본 요양원에 보급된 물개 모양의 로봇 ‘파로’는 고령자의 말벗이 되며 우울증과 불안감을 없애는 ‘치료사’ 역할을 담당한다.


이번 행사를 기획·개최한 아트센터 나비 노소영 관장은 “로봇은 단순한 노동 대체재를 넘어 외로움·허전함 등 감정을 채우는 소통의 매개로 발전하고 있다”며 “로봇의 새로운 역할과 이에 대한 고민을 함께해 보자는 의미에서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고 말했다. 

로봇과 인간이 함께 만드는 융·복합페스티벌 ‘로봇파티’에는 폭탄주 제조 로봇 마젠타(오른쪽) 등 50여 개 ‘감성 로봇’이 전시된다. [사진 박건상·아트센터 나비]

인문학, 예술적 감성 입혀파티가 벌어지는 동안 지하 1층 ‘나비E·I랩’에서는 한·중·일을 대표하는 로봇 창작자 6개 팀의 ‘감성 로봇’ 제작이 한창이었다. 로봇 파티 프로그램 중 하나인 ‘해커톤’은 2박3일 동안 감성 소통에 맞춰 창작활동을 벌이고, 이를 대중에게 공개하는 로봇 창작 경연대회다. 한국의 ‘감성 로봇’ 개념은 일본에서는 ‘파트너 로봇’, 중국에서는 ‘정감 로봇’과 통한다. 최근 각국에서 이런 감성 로봇의 수요와 관심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는 게 참가자들의 공통된 얘기다.


미국 아마존사의 인공지능 플랫폼 ‘알렉사’를 이용해 붉은 여우 모양의 감성 로봇 ‘루미나’를 선보인 ‘after 6 pm’팀 오진환(26)씨는 “한 달간 ‘알렉사’ 알고리즘을 분석하고 대화나 행동에 필요한 소스를 공부해 해커톤에 참가했다”며 “일반인도 관심이 있다면 로봇 운영체제(ROS) 등 오픈 소스와 을 통해 과거보다 쉽게 로봇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루미나’는 영화 ‘그녀(HER)’에 나오는 ‘대화 로봇’에서 영감을 받았다. 인사하면 중년 여성이 응답하고, 요청하면 사진도 찍어 준다. 오씨는 “로봇 기술은 충분히 발달했어도 이런 기술이 사람에게 어떤 가치를 줄 수 있느냐는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라며 “그렇기에 로봇에 인문학과 예술적 감성을 접목한 ‘감성 로봇’이 주목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개성 다른 한·중·일 감성 로봇 이어 “일본의 ‘페퍼’ 같은 가정용 로봇도 기술·비용적 문제로 아직 인간이 원하는 모든 역할을 맡지 못한다. 하지만 로봇이 사용자의 체감도가 높은 감성을 자극하고 교감할 수 있다면 시장을 이끄는 롤 모델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소니가 1999년 선보인 로봇 강아지 ‘아이보’는 ‘감성 로봇’의 가능성을 활짝 열었다. 최근 일본에서는 65가지 표정을 짓는 실제 로봇(제미노이드F)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사요나라’가 개봉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10년 전 세계에서 가장 작은 휴머노이드 로봇 ‘플렌(PLEN)’을 선보인 오사카 스타트업 ‘플렌’의 가즈유키 다카시(24)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는 “일본은 애니메이션과 피규어 등이 널리 확산돼 로봇과 친숙하고 하나의 문화라고도 볼 수 있다”며 “최근 고령자가 늘면서 정부도 요양 분야에 ‘파트너 로봇’ 개발을 독려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들 또한 소통을 중시한 ‘파트너 로봇’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아쓰히코 도미타(48) COO(최고운영책임자)는 “한 해 평균 20대에 불과했던 플렌 판매량이 지난해 1000대로 크게 늘었다”며 “딱딱한 로봇에서 부드러운 로봇으로 대중의 관심과 수요가 이동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중국은 광활한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부품 공급처’에서 ‘로봇 제작소’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해커톤에 참가한 중국 ‘DF로봇’ 역시 센서와 모터 등 부속품 제작에서 출발해 최근 ‘보텍스’라는 로봇으로 미국에 진출했다. 보텍스는 호빵처럼 둥근 모양에 스마트폰으로 조종하며 놀 수 있다. DF로봇 송위화(27) 영업과장은 “엔지니어들이 아이와 놀아줄 수 있는 로봇이 없을까 고민하다 만든 것 ”이라며 “미국에 판매된 지 한 달 반 만에 600~700대 판매돼 5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고 소개했다.


중국에서 ‘정감 로봇’은 아직 생소한 개념이다. 그러나 정부의 창업 육성책에 맞춰 로봇 교육이 확대되고, 로봇 관련 창업 기업도 빠르게 늘고 있는 상황이다. DF로봇 쑨콴(25) 엔지니어는 ?초등학교에 ‘로봇 흥미반’이 생길 정도로 로봇 교육에 대한 저변이 확대되고 있다. 시진핑 정부가 ‘촹커(젊은 창업자)’를 적극 육성하면서는 지난해 200개 로봇 관련 회사가 창업했을 정도”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송 과장은 “지금은 음성인식, 사물인터넷 등 기존 기술이 가정에서 사용하는 정감 로봇에 접목되는 과정”이라며 “이 분야는 시장 가능성이 커 회사에서도 내년까지 3~4개의 정감 로봇을 더 출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해커톤을 기획한 아트센터 나비 김시우 연구원은 “우리나라에서 로봇 창업자들은 로맨티스트로 불린다. 높은 기술력에 비해 아직은 보상이 적기 때문”이라며 “로봇 해커톤으로 지속 가능한 커뮤니티를 조직하고, 기술을 언어로 해 소통하면 세계에서 통하는 감성 로봇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정렬 기자 park.jungry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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