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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교수 기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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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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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초점  검찰이 지난달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명예훼손으로 기소한 후 국내 지식인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 지식인들까지 나서 역사적 사실관계를 둘러싼 논쟁부터 학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뜨거운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찬반 양론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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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을 빙자한 폭력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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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운용
안중근연구소 책임연구원

검찰은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의 내용이 ‘허위 사실 적시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며 박 교수를 불구속 기소했다. 이에 일본과 미국의 지식인 54명은 “학문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제국의 위안부』는 허위 사실을 적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위안부 할머니들의 슬픔의 깊이를 한국 국민과 일본의 독자들에게 잘 전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뒤이어 191명의 국내 인사도 일본인들과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특히 이들은 이미 역사 용어로 오래전에 폐기된 ‘종군위안부’란 용어를 재등장시켰 다. 이들의 인식은 위안부의 자발성을 뜻하는 ‘종군위안부’라는 용어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 점에서 이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자발적 매춘부’ ‘일본군의 동지’라고 표현한 사실을 옹호한 이유가 이해된다.

 이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연구자와 활동가 일동’이라고 자처하는 380명은 기자회견을 열어 박유하 교수의 주장을 궤변이라고 하면서도 “원칙적으로 연구자의 저작에 대해 법정에서 형사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단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할머니들의 고소·검찰의 기소를 옳지 않다는 양비론으로 몰고 갔다. 결국 이들 주장의 핵심은 박 교수 지지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할머니들의 고소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발의 본질이 ‘학문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력의 침해’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데서 할머니들을 소거시킨 이 사건의 의미를 가늠해볼 수 있다. 이른바 지식인 학자들이 식민사학을 비판한 이덕일 소장을 기소한 검찰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함구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를 이룬다.

 무라야마 총리 등 일본인들의 항의 기자회견은 박유하 교수 지지파와 양비론자들 모두에게 충격을 준 듯하다. 성명을 주도한 일본인들은 일제의 죄악에 대한 법적 책임을 부정하고 이른바 ‘도덕적 책임’이라는 시각에서 무라야마 총리가 주도해 1995년 출발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과 직접 관련된 인물들이다. 박 교수가 이들과 ‘국민기금’에 대한 인식을 공유한 데서 그의 맨얼굴이 드러난다.

 여기에서 이번 사건의 본질인 ‘자발적 매춘부’ ‘일본군의 동지’라는 표현의 타당성을 살펴보자. 박 교수와 그 지지 세력은 한결같이 “공론장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거나 “자발적 매춘부라는 말은 저자 자신의 것이 아니라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본 우익 인사들을 비판하기 위해 저자가 그들의 발언 중에서 인용한 것이며, 동지적 관계라는 말은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된 식민지 조선인의 사정을 그 전쟁의 객관적 상황에 의거해 기술하려는 의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유의 업무에 종사하던 여성이 스스로 희망해 전쟁터로 위문하러 갔다”든가 “여성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위안부를 하게 되는 경우는 없었다”는 일본 극우파 기무라 사이조의 발언을 “사실로 옳을 수도 있다”고 하면서 경제적 어려움과 가부장 사회에 대한 혐오에서 “자발적으로 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기술했다.

 일본군 위안부 연구자 대부분은 이게 일본 우익을 비판했다거나 객관적 상황을 기술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 왜곡을 넘어 일본 극우 세력의 논리를 퍼트리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할머니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 박 교수와 그 지지자들 그리고 양비론자들은 자신들이 누구보다 할머니들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고 계속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기묘한 현상을 지켜봐야 하는 할머니들은 일제 군위안소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학문이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작업이다. 위안부 문제의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은 바로 할머니들의 경험과 기억이다. 이를 부정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학문은 학문을 빙자한 ‘폭력’이라는 점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신운용 안중근연구소 책임연구원

역사에서 명예훼손 따지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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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소설가

“따따따 딴”으로 시작하는 베토벤의 ‘운명’ 첫 소절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그것을 흉내 내고 싶다. 솔직해도 되나? 솔직해도 되나? 솔직해도 되나? 솔직해도 되나? 먼저 『제국의 위안부』의 비판자들은 ‘박유하가 허위 사실과 부정확한 연구를 해놓고, 표현의 자유 뒤에 숨으려고 한다’는 듣기 지겨운 비방을 그쳐야 한다.

 ‘진실 대 허위’ ‘엄정한 학문 대 학문의 자유’ ‘위안부 할머니의 고통 대 개인의 명예’라는 구도는 대중을 비판자들의 편으로 만들면서 저자를 악마화한다. 하지만 박유하는 표현이나 학문의 자유를 쟁점 삼아 자신을 지키려고 한 적이 없다. 대부분이 역사가들인 비판자들에게는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명예훼손죄가 쟁점이어야 한다. 역사 분야는 피연구자의 이익이나 명예와 상충하는 사례가 많아서 ‘솔직히 말할 수 없는 과제’가 산재해 있다.

 박유하를 비판하기 위해 모였던 네 명의 젊은 역사가가 집담회를 벌였던 『역사문제연구』(역사문제연구소,2015) 33호에서 비판자들은 ‘박유하의 책에 새로운 게 어디 있어? 우리는 다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미군 기지촌 여성들과 자신들을 “끊임없이 구별짓기” 하고 있다면서 두 경우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식의 서술을 할머니들이 원치 않는 한 “언제나 명예훼손의 여지는 열려 있는 것이거든요”라고 말한다. 박유하보다 무려 11년이나 앞서 박유하와 유사한 주장을 했던 윤명숙의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제도』를 평하면서 이정선은 이렇게 썼다.

 “얼마 전 여성가족부와 교육부는 전국 초·중·고교에 배포하기 위해 제작 중이던 ‘일본군 위안부 바로 알기’ 교재에 ‘명자가 3년 동안 일본군들에게 몸을 팔다 왔대요’라고 수군대는 고향 주민들의 모습을 넣었지만, 반대에 부딪히자 이를 삭제했다. 이때 반대의 이유는 학생들에게 위안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성판매 여성에 대한 편견이 존재함을 전제하고 그 편견이 일본군 위안부와 연결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역사비평』, 2015, 여름호)

 ‘역사’는 ‘역사학’이 만들며, 역사학은 ‘민족·국가·남성’으로 구성된다. 역사학자들은 위안부 징모가 일본제국의 ‘매춘 구조’의 일부였다는 것을 폭넓게 인정한다. 그러면서 『제국의 위안부』가 일제가 구조적으로 구축해 놓은 징모에 ‘업자(포주)’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일제의 책임을 희석시켰다고 한다. 정당한 비판이지만 지은이 역시 위안부 문제의 ‘구조적 강제성’이 일제에 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역사학자들이 피하고 싶은 것은 업자(포주) 가운데 많은 조선인이 있었고, 행정 조직의 조선인 말단 직원이 가담했다는 것이다.

 김유정의 소설에는 가난한 집안의 남편이 포주가 돼 아내를 팔아먹는 이야기가 많다. 그 이유를 일제의 가혹한 침탈로 설명하면 아주 쉽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계급과 젠더(Gender)는 사라진다. 김유정 문학의 진실은 ‘가난한 집안의 남편이 아내의 몸을 팔았다’이지 결코 ‘부잣집 아내가 남편의 몸을 팔았다’가 아니다. 이상의 ‘날개’도 식민지 남성의 팔루스(Palus:남성의 상징적 권력)가 거세된 것으로만 읽지 골방 속의 남편이 힘없는 ‘환관 시늉’을 하는 포주였을 가능성은 보지 않는다.

 ‘대중독재’라는 모순된 개념이 독재를 겪은 독재국가에서의 시민의 체험과 의식을 드러내 주는 용어이듯 ‘동지적 관계’라는 용어 역시 식민 경험을 겪은 모든 나라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개념일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지도 않았던 ‘자발적 매춘부’라는 말과 함께 얼마든지 학술용어가 될 수 있는 저 개념이 저자를 기소하는 올가미가 됐다. 법학자 박경신은 진실과 허위 모두를 처벌할 수 있는 명예훼손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일본과 한국밖에 없다고 한다. 이 또한 동지적 관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장정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