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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 저 선수 지쳤어요, 위성이 알려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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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축구대표팀 공격수 손흥민(23·토트넘). 공식 경기에서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Global Positioning System)을 몸에 달고 그라운드를 누빈다. 벤치에서는 스마트 안경을 착용한 울리 슈틸리케(61) 감독이 태블릿 PC를 손에 들고 있다. 슈틸리케 감독은 태블릿 PC를 통해 손흥민의 활동량과 순간 속도·심박수·슈팅 방향 등을 실시간으로 분석한다. 빅데이터를 근거로 슈틸리케 감독은 전술에 변화를 준다. 결국 손흥민은 기민한 움직임으로 골을 터뜨린다. 공상 과학영화 같은 이 장면은 먼 미래의 얘기가 아니다.

축구평의회, GPS 부착 허용
선수 상태 실시간 확인 가능해
교체 타이밍·전술 변화 등 활용

IT기술 익숙한 젊은 지도자 인기
호펜하임 감독에 28세 비디오 분석관
슈틸리케도 독일서 기술 설명 듣고와

 축구 선수가 실전에서 GPS를 몸에 달고 뛰는 시대가 열렸다. GPS는 인공위성을 통해 위치와 움직임을 알 수 있는 시스템이다. 쉽게 표현하면 축구 선수가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달고 뛰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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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스페인 프로축구 FC바르셀로나의 훈련장에서는 리오넬 메시(27)가 GPS가 부착된 조끼를 입고 훈련하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바르셀로나 뿐만 아니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 등 유럽 명문 구단들은 선수들의 속옷 조끼 등에 작은 센서를 부착해 세밀한 데이터를 수집한다.

 이같은 변화는 축구계의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국제축구평의회(IFAB)는 지난 5월 GPS 장치 사용을 공식적으로 허용했다. ‘축구 종가’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 대표 1명씩과 국제축구연맹(FIFA) 대표 4명 등 총 8명으로 이뤄진 IFAB는 축구 경기규칙을 최종 결정하는 기구다. IFAB의 결정에 따라 FIFA도 지난 7월 국제축구 대회에서 GPS를 자율적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올해 열린 FIFA 20세 이하 월드컵과 FIFA 여자월드컵에서도 GPS 사용을 부분적으로 허용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제약이 있다. 경기 전 대회 주최 측에 GPS 장치의 검사를 받아야 하고, 경기 중 코칭스태프가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받을 수 없다. 하프타임과 경기가 끝난 뒤에만 데이터 활용이 가능하다.

 룰 개정에 보수적인 축구계는 GPS 규정 도입에 부정적이었다. 축구는 인간이 하는 것이고, 기계를 활용하면 축구의 권위가 떨어질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시스템에 필요한 정보기술(IT)도 미완성 단계였다. 얼마 전까지도 공식경기에서 GPS 장치를 부착하는 게 금지됐다. 부작용과 부상이 우려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IT기술이 발달하면서 축구가 시대에 역행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골라인 오심 판정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FIFA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부터 골라인 판독기(공의 골라인 통과 여부를 확인하는 장치)를 전격 도입했다. GPS 착용도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지난해 브라질 월드컵 우승국 독일은 IT기술을 축구에 활용하는 대표적인 국가다. 독일 대표팀은 자국 소프트웨어 기업인 SAP의 ‘매치 인사이트 솔루션’을 도입한 뒤 빅데이터를 세밀하게 분석했다. 선수들이 훈련을 할 때 무릎과 어깨에 4개의 센서를 부착, 운동량·순간속도·심박수 등의 데이터가 감독의 태블릿 PC에 실시간으로 전송되도록 했다. 그 결과 90분 동안 선수당 432만여 개의 데이터, 팀 전체 4968만여 개의 데이터가 만들어졌다. 브라질 월드컵 경기 중에 독일 대표팀은 경기장 밖 카메라를 통해 데이터를 분석했다. 이같은 전술 덕분에 ‘전차군단’ 독일 대표팀의 별명은 ‘스마트 전차군단’으로 바뀌었다.

 앞으로 축구 경기에 GPS가 전면 도입된다면 큰 변화가 예상된다. 코칭스태프는 선수의 움직임과 체력 상태를 실시간으로 체크할 수 있다. 총 90분 경기 동안 수백 만개의 데이터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교체 시점, 상대팀 대응전략 등을 결정할 수 있다. 경기가 질적으로 향상되는 건 물론 구단 운영을 더욱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박문성 SBS 해설위원은 “축구계에 혁명과도 같은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며 “감독이 선수들을 투시할 수 있는 안경을 쓰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만화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기광 국민대 스포츠 건강재활학과 교수는 “GPS 활용 제도가 안착한다면 모호한 오프사이드 판정 등에도 적용할 수 있다. 선수들의 심박수를 실시간으로 체크해 급성 심장마비를 막을 수도 있고, TV 시청자들은 축구 경기를 비디오게임처럼 색다른 방식으로 즐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IT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젊은 지도자들이 주목받고 있는 것도 최근 축구계에 나타난 두드러진 변화다. SAP 투자를 받고 있는 독일프로축구 호펜하임은 지난 10월 율리안 나겔스만(28) 감독에게 다음 시즌 지휘봉을 맡기기로 했다. 20세 때 무릎을 다쳐 은퇴한 나겔스만은 비디오 분석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호펜하임 유소년팀 감독을 거친 그는 분데스리가 최연소 감독이 된다.

 통역관이자 체육교사 출신인 조세 무리뉴(52) 첼시 감독이나 16세 때 ‘명장’ 보비 롭슨에게 전술을 지적하는 편지를 보내 FC포르투(포르투갈) 스카우트로 채용된 안드레 빌라스 보아스(38) 제니트(러시아) 감독도 첨단 기술을 적극 활용하는 지도자들이다. 앞으로는 축구 선수 출신이 아닌 IT 전문가가 축구 지도자를 맡는 사례가 늘어날 전망이다.

 한국 축구는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69) 감독의 요구에 따라 비디오 분석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현재 한국 축구대표팀은 훈련할 때 심박수를 체크하기 위해 조끼를 입는다. 대한축구협회는 독일 국가대표처럼 SAP 시스템 도입을 검토 중이다. 지난 8월 슈틸리케 감독이 독일 본사로 날아가 설명을 듣기도 했다.

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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