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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요약 (22)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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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호 1 면

조선 중기의 유명한 예언가 남사고(南師古)가 “원주 동남쪽에 왕기(王氣)가 있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그런데 선조 때의 문신 이기(李旣:1522~1604)는『송와잡설(松窩雜說)』에서 “임진년 여름 광해군이 왕세자가 된 다음에야 그 말의 효험이 입증되었다”고 쓰고 있다. 공빈은 광해군이 세 살 때인 선조 10년(1577) 세상을 떠난 데다 동복 형인 선조의 장남 임해군(臨海君)이 있었다.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했고 인빈의 아들 신성군(信城君)은 어렸기 때문에 광해군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조선 후기 이건창(李建昌)이 쓴『당의통략(黨議通略)』은 조정 신하들은 광해군에게 뜻을 둔 반면 선조는 인빈 김씨 소생인 4남 신성군에게 뜻을 두고 있었다고 말한다. 서인인 좌의정 정철은 북인인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선조를 만나 광해군의 건저(建儲:왕세자를 세우는 것)를 요청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 날 하루 전에 이산해는 인빈의 동생 김공량(金公諒)을 몰래 만나 “정철이 광해군을 세우고 신성군 모자(母子)와 너를 죽이려 한다”고 말했다. 정철은 남인 우의정 유성룡과 선조를 만나 세자 건저를 요청했다. 선조는 크게 화를 내면서 정철을 강계(江界)로 유배 보내고 서인을 대부분 조정에서 내쫓았다. 자신을 세자로 세우려다 서인 정권이 붕괴된 상황은 광해군의 꿈을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그러나 1년 후 발생한 임진왜란이 상황을 극적으로 전환시킨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조정은 삼도순변사 신립(申砬)에게 저지하게 했다. 신립은 그달 28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가 패전했는데, 신립의 패전 소식에 놀란 선조가 먼저 파천(播遷) 이야기를 꺼내 신하들이 세자 건저 문제를 다시 들먹였다. 세자를 세우지 않으려는 선조의 속마음을 읽은 이산해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승지 신잡(申잡)이 “오늘은 반드시 청에 대한 답을 얻은 뒤에야 물러갈 수 있습니다”라고 붙잡았다. 그제야 선조는 “광해군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국본(國本:세자)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경 등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물었고 대신 이하가 모두 일어서서 “종사와 생민의 복입니다”라고 절했다. 이렇게 광해군은 극적으로 세자로 결정되었다. 그해 6월 평안도 영변까지 도주한 선조는 세자 광해군에게 분조(分朝:조정을 둘로 나누는 것)를 이끌라고 명한 후 자신은 다시 북으로 도주했다.


광해군은 평안도·함경도·황해도·강원도 등을 누비며 의병을 모집하고 전투를 독려하며 민심을 수습했다.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러 갔던 임해군과 순화군(順和君)이 회령(會寧)에서 조선 백성 국경인(鞠景仁) 등에게 체포되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진영에 넘겨진 것과 대조적이었다. 광해군이 적진을 헤매고 다닐 때 선조는 “나는 살아서 망국의 임금이니 죽어서 이역의 귀신이 되려 한다. 부자(父子)가 서로 떨어져 만날 기약조차 없구나”라는 편지를 보내 광해군을 위로하면서 명나라에 세자 책봉을 주청했다. 이제 광해군이 선조의 뒤를 잇는 것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그러나 명나라는 책봉 승인을 거부했다. 그간 세종·세조·성종 등 적장자가 아닌 왕자의 왕위 승습을 명나라가 거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는 원군(援軍) 파견을 계기로 과거의 형식적 조공(朝貢) 관계를 실질적 지배로 바꾸려는 음모에 불과했다. 선조는 자주 선위(禪位) 소동을 벌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확인했고 그때마다 광해군은 왕위를 극력 사양하는 거조(擧措)를 취해 부왕을 밀어낼 의사가 없음을 천명해야 했다. 그나마 전쟁이 끝나자 선조의 마음은 더욱 흔들렸다.


재위 33년(1600)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2년 후 김제남의 딸을 계비(繼妃)로 맞아들였으니 인목왕후였다. 『당의통략(黨議通略)』은 의인왕후가 승하했을 때 예관(禮官)이 명나라에 다시 세자 책봉을 주청하자고 건의하자 “왕비 책봉은 청하지 않고 세자 책봉만 청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꾸짖었다고 전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목왕후는 선조 39년(1606년) 3월 영창대군을 낳았다.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선조는 서른두 살의 광해군 대신 강보에 싸인 어린 적자(嫡子)에게 자꾸 눈길을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 예부(禮部)는 선조 37년(1604) 11월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다시 거부했다. 장남 임해군이 있다는 명분이었지만 원군 파견을 계기로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려는 속셈이었다. 원임 영의정 이항복(李恒福) 등이 선조 39년(1606) 4월 명 사신에게 “적장자(嫡長子)를 세우는 것이 상경(常經)이긴 하지만 공을 우선하고 현인을 택하는 것도 예법의 권도(權道)”라고 말한 것처럼 광해군은 현명했으며 임란 극복에 공이 있었다.


차기 임금을 두고 집권 북인은 둘로 갈라졌다.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대북(大北)은 광해군을 지지했고, 유영경을 중심으로 한 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했다. 14년 동안 세자였던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바라보는 정치세력이 있다는 것 자체가 광해군에게 타격이었다.


선조가 조금 더 살았다면 광해군의 운명은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영창대군이 탄생한 이듬해(1607) 3월부터 병석에 누웠다. 회복될 가망이 없자 만 두 살짜리 아이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는 없다고 판단한 선조는 이틀 후 원·시임(原時任:전·현직 관리) 대신들을 불러 “세자가 장성했으니 고사에 따라 전위(傳位)하는 것이 좋다. 만일 전위가 어렵다면 섭정(攝政)도 가하다”라고 광해군에게 왕위 계승을 명했다. 그러나 영의정 유영경, 좌의정 허욱, 우의정 한응인은 전교를 거두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인목왕후가 삼공(三公:삼정승)을 빈청으로 불러 선조의 병세를 설명하면서 “지금 이 전교를 따르지 않는다면 심기가 더욱 손상돼 더욱 심해지실까 우려된다. 대신은 상의 명을 순순히 따르기를 바랄 뿐이다”라는 내지(內旨)를 내렸다. 이때 일을 기록한 박정현(朴鼎賢)의『응천일록(凝川日錄)』은 유영경이 선조의 비망기를 감추어두고 조보(朝報)에도 게재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같은 소북인 병조판서 박승종(朴承宗)과 공모해 군사를 동원, 대궐을 에워쌌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 41년(1603) 정월 전 참판 정인홍(鄭仁弘)이 상소를 올려 유영경을 공격해 전세 반전을 꾀했다. 유영경이 그해 정월 24일 사직 상소를 올리자 선조는 정인홍을 ‘무군반역(無君叛逆)의 무리’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안심하고 출사하라’고 유영경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선조는 열흘 후인 재위 41년 2월 1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선조가 사망하자 유영경은 인목왕후를 찾아가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수렴청정할 것을 종용했으나 인목대비는 16년 동안이나 세자 자리에 있었던 33세의 광해군 대신 두 살짜리 아기를 임금으로 삼는 것이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광해군의 즉위를 결정하면서 선조의 유서를 공개했다. “동기(同氣)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삼가 듣지 말라. 이를 너에게 부탁하니 모름지기 내 뜻을 몸으로 따르라”라는 내용으로서 영창대군을 부탁하는 말이었다.


광해군은 험난한 길을 걸어 즉위에 성공했다. 준비된 임금인 광해군은 즉위 석 달 후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건의를 받아 경기도에 대동법을 시범 실시했다.『광해군일기』는 이에 대해 “기전(畿甸:경기) 백성들의 전결(田結)의 역이 이후부터 조금 나아졌다”고 박하게 평가했지만 대동법은 백성들의 삶을 크게 향상시키는 선정으로서 민생을 위한 새로운 개혁 정치가 시작될 것임을 선포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난관이 남아 있었다. 명나라에서 광해군의 왕위 계승 승인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명 사신은 그해 6월 20일 서강(西江)에서 임해군을 만나고 귀국했다. 명의 두 사신은 수만 냥에 달하는 은화(銀貨)를 이미 챙긴 후였다. 이 사건은 광해군의 명에 대한 신뢰를 근본에서부터 흔들었다. 이런 자각은 동아시아 격변기 조선의 국왕으로서 바람직한 것이기도 했다.


광해군 8년(1616) 누르하치는 스스로를 영명칸(英明汗)이라 칭하면서 금(金)나라를 재건하고 천명(天命)을 연호로 사용했다. 2년 후인 광해군 10년(1618) 4월에는 “명나라가 내 조부와 부친을 죽였다” “명나라가 우리 민족을 탄압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7대한(七大恨)’을 발표하고 현재의 요령성 무순(撫順)시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충격에 휩싸인 명나라 경략(經略) 왕가수(汪可受)는 그해 윤4월 27일 광해군에게 글을 보내 군사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조명군(助明軍)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명이 임란 때 파병한 것은 명나라가 아닌 조선을 싸움터로 결정한 고육지책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광해군은 고민 끝에 그해 5월 1일 전교를 내렸는데 국경 너머로 군사를 보내는 대신 “급히 수천 군병을 뽑아 의주(義州) 등지에 대기시켜 놓고 기각(협격)처럼 성원하는 것이 지금의 상황에 적합할 듯하다”는 내용이었다. 군사를 파견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광해군의 이 결정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집권 대북의 실세 이이첨(李爾瞻)과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까지 군사 파견을 강력히 주장했다. 국익에 반하는 조명군 파견에는 당론이 일치했다. 광해군은 동아시아의 운명을 가를 이 싸움이 청(후금)의 승리로 끝날 것을 예견한 조선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중국인을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서인은 광해군의 현실적 외교관을 ‘황제의 은혜에 대한 불충’이란 명분으로 몰아세우면서 쿠데타를 준비했다.


1608년 2월 2일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그달 14일 남인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남인 이원익의 영상 제수는 연립정권으로 전후 복구에 임하겠다는 광해군의 정국 구상을 표출한 것이었다. 세자 시절 도움을 받은 대북만으로 정국을 운영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광해군은 즉위년 2월 25일 내린 ‘비망기(備忘記)’에서 “근래 국가가 불행히도 사론(士論)이 갈라져 각기 명목(名目:당파)을 만들어 서로 배척하고 싸우니 국가의 복이 아니다”며 “지금은 이 당과 저 당(彼此)을 막론하고 오직 인재를 천거하고 현자를 등용해 다 함께 어려움을 구제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견지에서 광해군은 즉위년 5월 서인 이항복(李恒福)을 좌의정으로 발탁했다. 남인·북인·서인을 아우르는 연립정국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속마음이 대북에 있다는 사실은 다 알고 있었다. 대북의 핵심은 정인홍이었다.


광해군 정권에 참여한 다른 당파들도 전란 극복에 힘을 보탰다. 전후 복구에 초당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광해군 즉위년 이원익의 건의로 경기도에 대동법이 실시되고 재위 2년 허준(許浚)의『동의보감(東醫寶鑑)』이 편찬되고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기 위한 양전(量田)사업도 추진되는 등 광해군의 주요 업적이 이 시기에 집중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각 당파가 정면충돌한 사건은 문묘종사(文廟從祀) 문제였다. 성균관 문묘에 공자와 함께 제사 지내는 것이 문묘종사인데 종사되는 인물들의 사상이 국가의 지도 이념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광해군 즉위년 7월 경상도 유생 이전(李琠) 등이 오현(五賢)의 문묘종사를 청한 것을 시작으로 성균관 유생과 홍문관에서 거듭 오현종사를 요청했다. 오현은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을 뜻한다. 당초 이 문제가 나왔을 때 광해군은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을 알았다”고 칭찬했으나 막상 그 시행은 ‘선왕도 어렵게 여겼다’며 유보하고 재위 2년(1610) 3월에는 이 문제의 제기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요구가 거세지자 재위 2년(1610) 9월 문묘종사를 허락했다. 이것이 연립정권 운영자였던 광해군의 한계였다. 광해군은 오현 그대로를 문묘에 종사해서는 안 되었다. 오현 선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굉필·정여창·조광조는 모든 당파에서 동의하는 인물이지만 이언적과 이황은 아니었다. 남인의 지주인 이언적·이황은 포함된 반면 집권 북인의 종주인 남명 조식은 누락된 것이다. 연립정권은 이렇게 문묘종사라는 민생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변적 현안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집권 북인은 현실적으로 소수당이었다. 서인이 제1당, 남인이 제2당, 북인이 제3당이었다. 그러나 절의(節義)를 숭상했기 때문인지 북인은 다른 당파와 충돌이 잦은 것은 물론 당내에서도 분란이 잦았다. 선조 32년(1599) 11월 남인 영상 이원익(李元翼)이 선조에게 “동론(東論: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렸는데 북인은 또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렸습니다”고 개탄한 것처럼 북인은 뿌리가 같은 남인과 합당하는 대신 대북·소북으로 나뉘었다.


북인 분당의 계기는 선조 32년 3월 북인 홍여순(洪汝諄)의 대사헌 임명 때문이었다. 홍여순을 지지하는 이산해·이이첨 등의 대북과 홍여순을 비판하는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 등의 소북으로 분당됐다. 그나마 대북은 선조 33년(1600) 홍여순과 이산해 사이에 다툼이 발생해 이산해가 육북(肉北), 홍여순이 골북(骨北)으로 다시 나뉘었다. 소북도 세자 광해군을 지지하는 남이공 중심의 청북(淸北: 또는 남당)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유영경(柳永慶) 중심의 탁북(濁北: 또는 유당)으로 나뉘었다.


광해군 즉위에 결정적 공을 세운 대북은 권력을 독차지하려 했으나 즉위 초 광해군은 이조판서와 이조전랑, 승지와 대간 등의 실직(實職)은 대북에게 주었으나 최고위직인 정승은 서인(이항복)과 남인(이원익·이덕형)에게 주어 연립정권을 구성했다. 대북은 광해군의 통합적 정국 운영에 불만을 가졌으나 전란 극복에 전 당파의 합심이 필요하다는 논리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연립정권은 문묘종사(文廟從祀) 문제로 공존의 기반이 크게 흔들렸다. 집권당이면서도 종주(宗主) 남명 조식을 종사하지 못한 상황에 큰 불만을 가진 대북은 연립정권 내 다른 당파들의 축출을 구상했다. 광해군 4년(1612) 김직재(金直哉)의 옥사가 대북의 이런 정국 구상에 이용되었다. 봉산(鳳山) 군수 신율(申慄)에게 ‘김경립(金景立: 일명 김제세)의 군역(軍役)을 면제하라’는 관문(關文: 상급 관청의 공문서)이 내려왔는데 예조에는 없는 예조참지(禮曹參知)란 직명이 쓰여 있었다. 조사 결과 관문에 사용된 어보(御寶)와 병조인(兵曹印) 등이 모두 위조된 것이었다. 승려였던 김경립은 환속 후 군역의 과중함을 견디다 못해 관문서를 위조한 것인데, 이 단순한 사건은 순화군(順和君: 선조의 6남)의 장인 황혁(黃赫)이 순화군의 양자 진릉군(晋陵君) 이태경(李泰慶)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이 사건의 추관(推官)이던 판의금 박동량(朴東亮)은 무리한 옥사라고 주장했고 김시양(金時讓)도『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에서 “도적이 죽음을 늦추고자 모반했다고 고변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이첨 등의 대북은 이 사건을 이용해 서인·남인·소북 계열의 반대파들을 쫓아냈다.


광해군 5년(1613) 4월에는 ‘칠서(七庶)의 옥(獄)’이 발생한다. 조령(鳥嶺)에서 한 상인이 살해당하고 은자 수백 냥을 탈취당한 사건인데 수사 결과 범인은 고(故) 정승 박순(朴淳)의 서자 박응서(朴應犀), 고 목사 서익(徐益)의 서자 서양갑(徐羊甲) 등 명가의 서자 7명이었다. 현실에 불만을 품은 서자들이 여주(驪州) 강가에 거처를 마련하고 공동생활을 하는 도중 일어난 사건이었으나 이 역시 대북에 의해 역모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폐모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왕권의 범위를 넘는 문제였다. 『광해군일기』는 남인 이덕형은 물론 영의정을 지낸 대북 기자헌(奇自獻)까지 광해군에게 “『춘추(春秋)』에서 아들이 어머니를 원수로 대할 의리가 없다고 한 것은 선유(先儒)가 정한 의논이고, 아들이 어머니를 끊는 도리가 없습니다”라고 반대한 것처럼 대북도 폐모에 모두 찬성하지 않았다. 서인과 남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남인 이원익·이덕형, 서인 이항복은 폐모론에 반대하다 귀양 가거나 쫓겨났으며, 소북 남이공도 반대했고 심지어 정인홍의 제자 정온(鄭蘊)은 사제 관계를 끊으면서까지 폐모론에 반대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대북 강경파 이이첨 등에게 휘둘려 당론 조절의 역할을 포기하고 내심 폐모론을 지지했다. 드디어 다른 당파를 모두 내쫓은 대북은 광해군 10년(1618년) 인목대비의 호를 삭거(削去)하고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복형제와 선왕의 장인을 죽인 것도 모자라 계모를 폐서인하는 광해군과 대북의 과잉조처는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광해군을 유교정치 체제의 공적(公敵)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대북은 폐모론을 주도해 권력을 독점했으나 소수 정당의 한 파벌에 불과한 당세로서 무리한 권력 독점이었다. 광해군 말기 사방에서 고변이 잇따랐으나 정작 가장 중요한 광해군의 이복동생 능양군(綾陽君: 인조)과 서인 핵심부의 쿠데타 기도를 알아채지 못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기초 정보망조차 붕괴된 것인데 이런 대북에게도 쿠데타 당일 마지막 기회가 있었다. 광해군 15년(1623) 3월 12일 광평대군의 후손 이이반(李而頒)은 길에서 만난 친족 이후원(李厚源)으로부터 “오늘 반정에 함께 참가하자”는 요청을 받았다. 이이반의 부친 이유홍(李惟弘)이 대북에 의해 귀양 갔기 때문에 권한 것이지만 이이반은 급히 광해군에게 고변했다. 하지만『광해군일기』는 어수당(魚水堂)에서 술에 취한 광해군이 이이반의 상소를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유희분·박승종이 두세 번 비밀리에 아뢰자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전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쿠데타 군이 들이닥치자 광해군은 북쪽 후원으로 도망가 사복시 개천가에 있는 의관 안국신(安國信)의 집에 숨었으나 곧 체포되고 말았다. 대외 문제에서는 탁월한 현실 인식을 갖고 있었으나 대내 문제에서는 소수 강경파에 휘둘려 당론 조절과 사회 통합을 포기했던 대북 군주의 허무한 종말이었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96호 2009년 1월 11일, 제97호 2009년 1월 18일, 제98호 2009년 1월 25일, 제99호 2009년 2월 1일, 제100호 2009년 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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