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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 폐교에 남은 이승복 동상…칠곡엔 인혁당 사형수 무덤…우리 역사는 어드메쯤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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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전남 나주 금천동초등학교를 찾은 소설가 김훈. 이승복 조형물을 바라보고 있다. 학교는 2009년 폐교됐다. 혁신도시로 지정돼 건축 중인 아파트 단지를 조형물이 바라보는 모양새다. [나주=프리랜서 오종찬]

12월 9일은 반공소년 이승복(1959~68)의 47주기다. 그 아이가 살았으면 56살이다. 나는 지난 수년 동안 폐교되었거나 운영 중인 초등학교를 찾아다니며 이 소년의 시멘트 조형물을 들여다보았다. 여행길에 들렀고, 일삼아 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 소년의 형상은 이념의 이름으로 인간을 학살하는 야만적 폭력의 희생자로, 국시(國是)로 자리 잡은 반공의 표상으로, 그리고 생활과 교육의 지표로 반세기 동안 전국 초등학교 운동장에 깔려 있었고, 무서워서 외면하려는 내 마음을 기어이 끌어당겼다. 이 시멘트 조형물을 찾아가는 내 발길은 서남 해역의 여러 섬들과 내륙 산간마을과 대도시 주변의 폐교장에까지 이어졌다.

이승복 47주기에 부쳐

반공 아이콘으로 전국 학교마다 동상

 대체로 초등학교들은 본관 건물의 현관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반공소년 이승복과 효자 정재수(1964~74)의 시멘트 조형물을 세워서 충(忠)과 효(孝)의 두 기둥을 삼았고, 그 옆에 서양 여자아이의 모습을 닮은 ‘독서하는 소녀상’을 앉혔다. 학교에 따라서는 충무공이나 세종,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을 시멘트 조형물로 세워놓기도 했는데, 내가 본 바로는 반공소년 이승복과 효자 정재수가 가장 많았다(1969년 이후 초등학교의 시멘트 조형물 건립에 관한 자료를 지방 교육청에 요청했으나, 나는 취재에 실패했다). 이 구도가 지금 60살에 가까운 한국인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유년의 학교이다. 이 조형물들은 운영 중인 초등학교에 아직도 남아 있다.

 남해안 어촌마을 폐교장의 이승복 형상은 꽃핀 벚나무 아래 서서 잡초에 덮인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내륙 산간 폐교장에서는 넝쿨이 형상을 감고 올라와서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전남 나주시 금촌동 초등학교는 2009년에 폐교되었고 그 주변에는 한국전력, 농어촌공사의 본사 건물과 나주혁신도시의 주상복합단지가 들어섰다.

 이 폐교장의 이승복 형상은 책보를 옆에 끼고 대도시의 고층 빌딩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가이기도 한 초등학교 교사 서영주(43)씨가 2008년에 찍은 사진에 따르면, 전북 남원의 두동초등학교 폐교장은 한 진보정당의 연수원으로 쓰였는데, 그 운동장에 남아 있는 이승복 형상은 ‘반공소년 이승복’이라는 타이틀이 뭉개지고 ‘전태일’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폐교장이 팔린 경우에는 매입자의 용도에 따라서 이승복의 형상은 폐기되거나 구석으로 치워져 있었다. 경기도 파주 한 사설 박물관은 이승복의 시멘트 형상 두 점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출처가 분명치 않았다.

 1968년 12월 9일에 이승복과 그의 어머니, 7살·4살 난 두 동생이 무장공비에 의해 살해된 경위는 한국인이 다들 알고 있다. 울진·삼척 해안으로 침투한 무장공비들은 이승복의 마을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세 가족을 몰살했다. 86살 노인과 젖먹이까지 죽였다. 칼로 찌르고 돌로 찍어서 웅덩이에 끌어다 버렸다. 생포된 자들은 이 살육의 목적이 산간오지의 작은 마을에 혁명거점을 확보하려는 것이라고 진술했다. 이승복의 아버지 이석우(당시 37살)씨는 이웃집에 갔다가 죽음을 모면했지만, 그날의 충격으로 40여 년을 정신질환에 시달리다가 지난해 작고했다. 이승복이 살해당하기 직전에 무장공비를 향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소리치며 저항했다는 현장발 기사가 한 일간지에 특종기사로 보도되었고, 이승복의 ‘항거’는 1969년 국정교과서 ‘바른생활’에 실렸다. 광복 70년의 한국현대사는 어느 대통령의 공식적 동상도 세울 수 없었지만 반공소년 이승복과 효자 정재수의 형상은 전국 초등학교 운동장에 들어서서 한 시대를 대표하는 국시의 표상을 이루었다.

지금은 잡초 덮이고 구석 밀려나 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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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개관한 강원도 대관령 이승복반공관 내부. 학살장면을 재현했다. 82년 이승복기념관으로 이름을 바꿔 강원도 용평면으로 옮겼다. [중앙포토]

 1998년부터는 이승복이 절명하기 직전에 그 아홉 개의 음절을 발성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특종 보도한 언론사 사이에 소송이 벌어져서 8년을 끌었다. 그 8년 동안 이승복의 죽음과 외침은 증발해서 무화되는 듯싶었지만, 법원은 그 보도가 사실에 근거했다고 판결했다.

 거푸집에 시멘트 반죽을 부어서 만드는 방식으로는 섬세한 조형적 표현을 기대할 수 없겠지만 지금 폐교장에 남은 반공소년 이승복과 효자 정재수의 형상은 세월이 지나간 빈 마당에서 두루뭉술한 윤곽으로 풍화되었고, 넝쿨이 기어오르고 있다.

 역사교과서를 다시 국정으로 돌리는 일을 놓고 온 나라가 결딴이 나버린 지난달에 나는 무주·나주 지역에 가서 이승복 동상을 살폈다. 풍화된 시멘트의 안쪽에서 반세기 전에 살해된 소년이 무슨 말을 하는 듯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그 9살 난 화전민의 아들이 공산주의 세계관과 지향성을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소년의 싫어요! 라는 외침은 산골 마을 여러 집에서 벌어진 잔혹한 학살에 대한 항거였을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그 야만적 폭력을 지휘하는 이념은 낙원을 제시하고 있었지만 살해된 소년은 이념이나 낙원과는 관련이 없었고, 그의 마지막 외침은 체제의 폭력에 저항하는 개인의 육성으로 정당하고 소중했다. 그 소년의 저항은 물리력이 아니라 ‘나’를 주어로 하는 일인칭의 언어로 발현되었다.

인혁당 사건은 2007년 32년 만에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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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 8일 인혁당 관련자들에 대해 사형·무기징역이 확정되자 가족들이 절규하고 있다.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은 이튿날 형이 집행됐다. [중앙포토]

 이승복의 형상이 교육의 지표로 전국 초등학교 운동장에 들어서는 동안에, 박정희 소장이 ‘5·16 혁명공약 1호’로 내걸었던 ‘반공국시(反共國是)’는 생활 속에 자리 잡았다. 이 국시는 ‘자유’나 ‘정의’처럼 관념적 추상성이 아니라 정치권력의 핵심을 장악해서 법제화된 물리력으로 사람들의 일상을 기속했고, 헌법을 장식적 규범으로 전락시켰다.

 이승복의 시멘트 형상은 그 국시의 아이콘이었다. 한국현대사에서 그 국시의 이름으로 자행된 국가 폭력의 실상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에 수록되어 있다. 많은 죽음과 야만행위는 끝내 ‘진상규명불능’으로 남아 있다. 그 보고서는 너무 방대하고 숨막혀서 나는 아직 다 읽지 못했다. 보고서를 읽으면서 나는 늘 이승복을 생각했다. 체제와 이념에 의한 폭력에 저항했던 그의 마지막 음절 9개는 또 다른 체제와 이념이 조정하는 폭력의 비명 소리에 묻혀서 소멸되거나 증폭되거나 뒤섞여서 난청의 백색음을 이루는 듯했다. 넝쿨이 시들고 눈이 쌓이는 빈 운동장에서, 그 소년의 시멘트 형상은 고속도로의 자동차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이승복 피살의 대척점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도예종(1924~75)과 그의 동지 7명의 죽음이 있을 것이다. ‘대척점’이라고 썼지만, ‘연장선상’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두 죽음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일은 나의 시대의 고통의 중심부이다.

 도예종 등은 대통령긴급조치위반, 국가보안법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위반의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었다. 그들의 이 무거운 죄목은 한마디로 국시위반이었을 것이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이들의 사형을 확정했다. 도예종 등은 판결 후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되었고, 강제로 화장되었고, 당국은 유족들에게 재를 나누어 주었다.

 도예종과 그들은 2007년 재심에서 무죄로 판결되었다. 사형당한 지 32년 만이었다. 그들을 수사하고 기소하고 재판하는 과정에서 국가사법제도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에 관하여 관계기관이나 담당자들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사법에 의해 살해된 그들은 무죄가 되어서 지금 대구광역시 외곽 칠곡현대공원에 묻혀 있다(도예종·송상진·하재완·여정남).

 공원묘지의 많고 많은 무덤들은 긴 대열을 이루며 산허리를 겹겹이 돌아나가는데, 무죄인 그들의 무덤은 그 대열 속의 3평이다. 무덤은 중앙고속국도 건너편 칠곡지구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념의 폭력에 개인의 육성으로 항거했던 소년의 형상을 아이콘으로 만들어 가면서, 그 반대쪽에서 법령과 제도와 공조직을 동원해서 또 다른 국가 폭력을 자행해온 세월이 당신들과 내가 살아온 시대이다. 그 세월의 야만과 오욕, 퇴행과 저항들이 모두 모여서 오늘의 현실과 역사의 내용을 이룬다.

 
현대사, 반성과 고백 위에서 쓰여져야

영광과 자존만으로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통과해 온 한국 현대사는 성취와 자랑만이 아니라 반성과 고백의 기조 위에서 쓰여져야 한다. 이승복과 도예종의 자취를 돌아보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의 넋은 역사 교과서 어느 페이지에 깃들게 되는 것일까. 승복아 너는 어디 있니. 

김훈 소설가
사진=프리랜서 오종찬

김훈=1948년 서울에서 출생. 고려대 영문과를 중퇴한 뒤 한국일보 등에서 30년 넘게 기자생활을 하다 늦깎이로 소설을 쓰기 시작. 긴장감 넘치는 문체로 이순신 장군의 내면 복원을 시도한 장편 『칼의 노래』, 치밀한 관찰과 성찰이 돋보이는 산문집 『자전거 여행』 등 주로 남성 독자들이 좋아하는 선 굵은 작품들을 써왔음. 동인문학상·이상문학상·황순원문학상·대산문학상 수상. 최근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