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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보다 실’ 유가 급락 … 정유·유화·조선 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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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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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산 원유값이 크게 떨어져 중동 물량을 아프리카 원유로 돌리겠습니다. 런던 지사에서는 (매입) 대상 원유의 선적 일정과 가격 수준을 파악해 공유 바랍니다. 확인하는 대로 구매 여부를 최종 결정하겠습니다.”

30달러대, 빨간불 켜진 산업계
유가 하락 → 단가 하락 → 가격 경쟁
악순환에 빠진 유화업계 직격탄
조선·철강·건설도 덩달아 위축
항공·해운은 유류비 떨어져 느긋

 SK이노베이션의 원유 트레이딩팀 김모(40) 부장이 8일 오전 싱가포르·런던·두바이 트레이더에게 보낸 메시지다. 워낙 상황이 순식간에 변하는 까닭에 해외 상황 모니터링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이 회사는 올 1월부터 유가 급락에 대비해 매달 한 차례 계열사 관련 부서 임원 전원이 참석하는 ‘시장 변수 검토 회의’를 신설해 가동해왔다. 4분기 들어선 이 회의를 한 달에 3~4차례 열고 있다. 김 부장은 “지난해 하반기 유가가 폭락해 최악의 실적을 냈던 때를 떠올리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상반기 100달러를 웃돌았던 국제 유가가 최근 30달러대까지 내려가자 한국 산업계에 빨간 불이 커졌다. 세계적인 경기불황으로 인한 저유가인 까닭에 수출 비중이 큰 한국 경제엔 저유가가 주는 득보다 실이 더 큰 것이다. 특히 정유·석유화학·조선·해양플랜트 등의 산업이 위기다.

 원유를 정제해 판매하는 유화업계는 직격탄을 맞았다. 지난달 가솔린 같은 석유제품 수출은 지난해보다 36% 줄어든 24억3000만 달러(약 2조9000억원)을 기록했다. 석유화학제품 수출도 24% 준 27억8000만 달러(약 3조3000억원)였다. 원유값이 하락하면서 생산원가도 줄었다. 하지만 원유값 하락→제품단가 하락→업체간 가격경쟁→제품단가 추가 하락이란 악순환이 이어지면서 업체의 채산성이 크게 나빠졌다.

 심각한 일감 부족에 시달리는 조선업계엔 저유가 악재까지 덮쳤다. 글로벌 석유업체가 심해 시추선과 해양 플랜트 주문량부터 줄이면서다.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는 “저유가가 지속하면 신규 유전 개발을 위한 각종 프로젝트가 중단·지연될 수 있다. 최근에도 재무 상황이 나빠진 선주사가 중도급을 납입하지 않아 7034억원 규모 드릴십 계약을 파기했다”고 말했다.

 철강업체도 도미도의 가운데 섰다. 철강협회에 따르면 올 7월 기준 강관 수출은 전년동기 대비 53% 감소했다. 에너지용 강관은 같은 기간 68% 줄었다. 협회 관계자는 “석유·가스 개발 신규 프로젝트 투자가 줄어 강관 수출에 직접적인 피해가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산유국이 몰린 중동을 주요 시장으로 둔 건설업체도 잔뜩 움츠러들었다.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8일 현재 해외건설 수주액은 409억 달러(약 48조1000억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1% 줄었다. 이 가운데 중동 지역 수주액은 147억 달러(약 17조3000억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48% 수준이다.

 다만 지난해 저유가로 최악의 실적을 거둔 정유업체는 올 들어 일제히 흑자로 전환하며 한숨 돌렸다. 지난해엔 유가가 급락해 충격이 컸지만 저유가가 장기화하면서 상황에 적응했다. 정제마진이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다 저유가로 인해 소비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항공·해운업계처럼 저유가를 반기는 곳도 있다. 항공사는 전체 영업비용에서 유류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30%에 육박한다.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은 올 3분기 영업비용 중 항공 유류비 비중을 전년 동기 대비 8% 줄였다. 한진해운은 3분기 연료비로 약 2000억원을 지출했다. 전년 동기 대비 1000억원 가량 아꼈다. 한진해운 관계자는 “저유가 추세에선 연료비를 아낄 수 있는데다 유가 상승에 대비해 연료를 비축하려는 수요가 늘어나 탱커(액체 화물을 운반하는 선박) 물동량이 늘어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환익 전국경제인연합회 산업본부장은 “최근 저유가는 글로벌 경기 침체를 맞아 수요가 공급을 못 따라가 나타난 결과여서 한국 수출 전선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며 “유가가 높을 때 수익성이 높은 플랜트 등에 사업을 집중한 것이 위기로 다가왔다”고 풀이했다. 그는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해 사업을 구조조정하고 신사업을 발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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