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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요약 (21)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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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호 1 면

?『연산군일기』는 사실(fact)을 기술한 부분과 사관(史官)의 의견(opinion)을 개진한 부분을 분리해서 읽지 않으면 함정에 빠지기 쉽다. 쫓겨난 군주들에 대해 서술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자료의 편파성이다. 연산군은 즉위 초반인 재위 3년(1497) 마치 자신에 대한 후대의 비난을 예언한 듯한 말을 남긴다.


?“만약 내가 한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여러 역사책에 써 놓으면 장차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는가(『연산군일기』 3년 6월 5일).”


?연산군의 흔적 지우기는 그가 쫓겨난 직후 시작됐다. 연산군은 재위 12년(1506) 9월 2일에 쫓겨나는데 여드레 후인 9월 10일 정승 및 김감(金勘)이 중종에게 “연산군이 스스로 지은 시집(自製詩集)과 실록각(實錄閣)에 소장된 ‘경서문(警誓文)’을 다 태워 없애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건의했다. 연산군의 흔적을 지우자는 주청인데, 중종이 허락했기 때문에 그날로 불태워졌다. 김감이 이런 주청을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경서문’이 자신의 글이었기 때문이다. ‘경서문’은 연산군이 쫓겨나기 한 달 전인 재위 12년(1506) 7월 29일 바쳐졌다. 경서문은 연산군에 대한 충성 맹세였다. 영의정 유순이 백관을 거느리고 올렸지만 ‘경서문’에 백관의 이름이 다 올라간 것은 아니었다. 23명의 이름만 올라갔는데, 중종반정 때 23명 중 화를 당한 인물은 단 세 명뿐이었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좌의정 신수근(愼守勤), 그의 동생 형조판서 신수영(愼守英)과 좌참찬 임사홍(任士洪)만 반정 세력에 살해됐다. 나머지 스무 명은 어떻게 됐을까? 놀랍게도 스무 명 전원이 중종을 추대한 공으로 정국(靖國) 공신에 책봉된다.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을 제외하면 정변이 일어나리란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반정 당일 밤 말을 갈아탄 인물들이었다.


연산군이 폐출된 지 20여 일 되는 중종 1년(1506) 9월 24일. 빈청(賓廳)으로 대신들이 모였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합동으로 연산군의 아들 문제를 주청하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하여 연산군의 아들 사형제는 9월 24일 당일로 약사발을 들이켜야 했다.


연산군 이륭(李륭)처럼 축복 속에 태어난 경우도 찾기 어렵다. 성종 7년(1476) 11월 그가 태어나자 도승지 현석규(玄碩圭) 등은 “개국 이후 문종과 예종은 모두 잠저(潛邸)에서 탄생하시어서 오늘 같은 경사는 있지 않았습니다”고 축하했다. 단종을 제외하고 이륭 만이 궐내에서 탄생한 것이다.


성종은 재위 9년(1478) 7월 이조판서 강희맹(姜希孟)에게 말 1필을 내려줬는데『성종실록』이 “강희맹의 집에서 자라던 원자가 항상 준마(駿馬) 보기를 좋아하므로 내려준 것이다”고 쓴 것처럼 원자를 위한 것이었다. 강희맹은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의 외손자로서 세종의 조카였다. 세 살 때부터 말을 좋아했던 연산군을 성종은 ‘학자(學者) 군주’로 키우고 싶었다. 성종은 재위 23년(1492) 1월 승정원에 직접 전교를 내려 “세자가 지금 17세지만 문리(文理)를 해득하지 못해 내가 심히 근심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성종은 세자의 학습 순서를 바꾸었다. 동부승지 조위(曺偉)가 성종 23년 “『사기』를 읽으면 문리가 쉽게 통합니다”며 역사서를 먼저 읽게 하자고 제안했고, 성종도 동의했다.(『성종실록』 23년 1월 29일)


그러나 이후에도 연산군의 학문이 진취했다는 기록은 없고 “왕(연산군)이 오랫동안 스승 곁에 있었고 나이 또한 장성했는데도 문리를 통하지 못했다”는 『연산군일기』의 기록처럼 학습은 지지부진했다. 연산군은 시(詩)를 좋아한 반면 경전(經典)을 싫어했는데, 이는 유교국가 조선의 국왕으로는 큰 결점이었다.


연산군은 1494년 19세의 젊은 나이로 즉위했으나 왜 유교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왕이 된 이후 학문을 더욱 등한시했다. 경서(經書)는 물론 역사서도 읽지 않다 보니 국왕 자리가 지닌 고도의 정치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연산군의 무지를 파고든 사건이 재위 4년(1498)의 무오사화(戊午士禍)였다.


‘유자광전(柳子光傳)’에서 ‘유자광은 소매 속에서 김종직의 문집을 꺼내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술주시(述酒詩)’를 추관(秋官)들에게 두루 보이면서 “이것은 모두 세조를 지칭해 지은 것인데 김일손의 악한 것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친 것이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연산군은 유자광의 시각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았다. 연산군은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 세 사관(史官)을 대역죄로 능지처사했는데, 유자광 등의 훈구 세력이 자신을 이용해 정적인 사림 세력을 제거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사림이 왕권 강화와 훈구 세력의 약화에 도움이 되는 세력이라는 객관적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무오사화 이후 왕권은 크게 강해졌지만 훈구라는 바다에 떠 있는 왕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강화된 왕권만을 바라보았다.


연산군은 국왕과 사대부가 공동 통치한다는 신흥사대부들의 건국이념을 부정했다. 연산군이 사대부 계급의 공동의 적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산군은 백성들에 대해서도 폭군이었는가? 사관은 백성들에게도 폭군이었다고 비판한다. 중종 즉위일 『중종실록』은 민가 철거를 폭정의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연산군은 실제로 민가를 철거했다. 그러나 철거 대상은 국법에서 주택 건축을 금하고 있는 궁궐 담장 아래 100척 이내, 즉 30m 이내의 주택들이었다. 게다가 강제 철거도 아니었다. 연산군은 “궁궐 담 밖의 집 건축은 법으로 금하고 있는데 백성들이 법을 돌아보지 않고 집을 지었으니 마땅히 법으로 논하여야 할 것이지만 지금 도리어 빈 땅을 떼어 주었다”라고 대토(代土)까지 마련해 주었다. 게다가 “집을 비운 백성들이 편하게 거주할 곳(安接處)을 마련해 아뢰어라”라고 명해서 병조판서 강귀손(姜龜孫)은 명에 따라 보상책을 보고했다. 일정액의 보상금과 대토, 거주지를 마련해 주고 봄까지 철거를 연기한 것을 폭정(暴政)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래도 대간에서 계속 반대하자 연산군은 속내를 드러냈다. “집을 헐리고 원망하며 근심하는 심정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리를 아는 조사(朝士:벼슬아치)들도 법을 범하면서 집을 지은 자가 많으니 헌부(憲府:사헌부)에서 당연히 죄주기를 청하여야 할 것인데, 지금 도리어 말을 하는 것이냐?(『연산군일기』9년 11월 9일)” 사헌부가 백성들을 빙자하지만 속으론 벼슬아치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었다. 연산군의 민가 철거는 백성들보다는 벼슬아치들에게 더 큰 타격이었다.


사관은 또 연산군이 이궁(離宮:행궁)을 짓기 위해 백성들을 괴롭혔다고 비난하고 있다. 동북 4고을, 서남 7고을 등 모두 11고을의 백성을 내쫓은 듯이 비판했지만 그 숫자는 모두 500여 호에 불과했다. 이궁을 설치하려 한 이유에 대해 연산군은 “무신년(성종 29년)에 대비께서 편찮으셔서 부득이 인가로 피어(避御)하셨으니 어찌 국가의 체모에 합당하겠는가?”라면서 “궐내에 온역(瘟疫:전염병)이라도 발생하면 옮겨 거처할 곳이 있어야 하고 또 사대부일지라도 집 몇 채를 가졌거늘 하물며 한 나라의 임금이 어찌 별궁(別宮)을 만들 수 없겠는가?(『연산군일기』 10년 7월 28일)”라고 말했다. 또한 이때 만들려던 이궁의 규모는 ‘큰 집 50칸(大家五十間)’이었으니 99칸 민간 부호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소박한 궁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끝내 50칸짜리 이궁도 짓지 못했지만 11고을 백성들을 다 내몰았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연산군은 백성들의 굶주린 기색을 근심하고 사대부들이 ‘임금을 능멸하는 풍속’을 통한하고 가짜 충성을 경계했다. 그 결과 연산군은 붓을 잡고 있는 사대부들에게 희대의 폭군으로 몰린 것이다.


연산군이 재위 11년(1505) “모든 도(道)의 고을들은 모두 운평을 두라”고 말한 것에서 운평은 지방 관아 소속 음악인들임을 알 수 있다. 운평 중 음악 실력이 뛰어나 서울로 뽑혀 올라온 이들이 흥청이었다. 흥청악·운평악·광희악을 통칭 삼악(三樂)이라고 불렀다. 『경국대전』은 지방에서 뽑아 올리는 선상기는 여기(女妓) 150명, 연화대(蓮花臺:가무극 배우) 10명, 여의(女醫) 7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뽑힌 선상기 중 뛰어난 음악인이 흥청이다.『연산군일기』는 재위 12년(1506) 3월 “흥청악 1만 명을 지공(支供)할 잡물과 그릇 등을 미리 마련하라”고 명했다고 써서 흥청악이 1만 명이나 되는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연산군이 11년 4월 “흥청은 어찌하여 수를 채우지 못하는가?”라고 묻자 장악원은 ‘정원 300명 중 93명을 채웠고 207인을 못 채웠다’고 답했다. 93명을 겨우 채운 흥청이 11개월 만에 1만 명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니 이 역시 사관의 창작이다. 삼악(三樂) 모두가 여성인 것도 아니었다. 연산군은 흥청을 최고의 예술가로 대접했다.


『연산군일기』와『중종실록』은 연산군을 사냥광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런 비난의 본질은 연산군의 숭무(崇武)정책에 대한 반발이었다. 연산군은 군사력 강화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연산군은 재위 2년(1496) 4월 친시(親試)에서 직접 낸 책문(策問)으로 “우리나라는 남쪽으로 섬 오랑캐와 이웃이고 북쪽으로는 야인(野人:여진족)과 접했다”면서 그 대책을 물었다. 연산군 5년(1499) 4, 5월에는 함경도 삼수군(三水郡)과 평안도 벽동진(碧潼鎭) 등 3개 지역을 습격해 군사와 백성을 살해하고 우마와 백성을 사로잡아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연산군은 즉각 대신들과 의논해 정벌을 결정하고 5월 12일 우의정 성준(成俊)과 좌찬성 이극균을 서정장수(西征將帥)로 임명해 2만 병력을 준비시켰다. 그러자 5월 14일 홍문관 부제학 최진(崔璡) 등이 반대하고 나섰다. 천문(天文:혜성 출현)이 변하는 변괴가 발생한 데다 가뭄 때문에 흉년이 들었으니 정벌에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혜성과 가뭄은 모두 하늘이 임금에게 경고하는 것이므로 근신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연산군은 “서정의 거사는 진실로 농사의 풍흉을 보아야 하지만 죽고 사로잡힌 우리 백성이 너무 많으니 지금 만약 정벌하여 많이 참획(斬獲:목을 베고 사로잡음)하면 저들이 반드시 두려워하여 스스로 침략을 중지할 것이다(『연산군일기』 5년 5월 17일)”고 강행 의사를 밝혔다. 연산군은 다시 어서(御書)를 내려 “오직 변방 백성이 피살당하고 사로잡혀 간 것에 분한(忿恨)하는 마음을 잠시도 잊지 못하기 때문에 서정에 나서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최진 등은 여진족이 습격한 것은 하늘이 연산군에게 경고한 것이므로 근신해야지 군사를 일으킬 때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습격에 대한 응징은 물론 사로잡혀 간 백성의 귀환 대책은 찾을 수 없었다. 변경에 사는 백성이 감내해야 할 일이라는 투였다.


연산군은 “지금 서정은 오직 백성을 사랑(愛民)하기 때문이다”고 재차 호소했으나 대간에서 극심하게 반대하자 대신들도 점차 주저하게 되면서 서정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자 그해 9월 4일 여진족은 다시 평안도 이산(理山)의 산양회진(山羊會鎭)을 공격해 100여 명을 잡아가고, 또 벽동군 아이진(阿耳鎭)을 습격해 갑사(甲士) 김득광(金得光) 등 9인과 말 12필을 약탈해 갔다. 연산군은 통탄했다. 연산군은 “저들이 오늘 몇 사람을 잡아가고 내일도 몇 사람을 잡아갈 것이니 어찌 앉아서 구경하며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대신들과 의논한 끝에 내년에 정벌하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면서 그 전에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강무(講武)에 나서기로 했다. 강무는 군사훈련을 겸한 수렵이었다. 그러자 좌참찬 홍귀달(洪貴達)이 “이름을 강무라 하지만 실은 사냥하는 것입니다”면서 “선왕(先王)의 적자(赤子)들이 온통 적에게 살해되고 잡혀갔는데 그 자제들을 구휼(救恤)하지 않고 사냥해서 그 제물로 제사를 드리려 한다면 선왕·선후(先后)께서 어찌 안심하고 이를 흠향하겠습니까?(『연산군일기』 5년 9월 16일)”라고 반대했다.


연산군은 재위 7년(1501) 10월 “근래 오랫동안 군사 사열(査閱)을 폐했기 때문에 군사들이 해이해질까 두려워 사냥(打圍)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연산군에게 사냥은 군사훈련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문신들은 강무든 사냥이든 군사를 움직이는 것에 모두 반대하면서 오직 임금의 근신만 요구했다.


재위 6년이 되자 서정 반대가 잇따랐다. 대간뿐 아니라 좌의정 한치형(韓致亨) 같은 대신들과 도원수 성준까지 반대론에 가세했다. 서정을 하지 않으려면 방어 태세라도 잘 갖추어야 했다. 연산군 7년(1501) 5월 평안도 절도사 김윤제(金允濟)가 “금년 도내가 약간 풍작이 들었으니, 청컨대 먼저 이산에 장성을 쌓아 오랑캐의 침략을 막아야 합니다”고 치계(馳啓)했다. 산양회진 등이 있어 여진족의 침범이 잦은 이산에 장성을 쌓자는 말이었다. 이때 장성 축성에 찬성하면서 좌의정 성준이 한 말은 대간들이 왜 축성에도 반대하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우리나라 조정 신하들은 남쪽 사람이 많은데, 인부를 뽑아 부역을 시키면 그 폐단을 받을 것을 꺼려 극력 저지하는 것입니다.”(『연산군일기』 7년 5월 25일) 성준의 말에 홍문관에서는 “성준이 ‘조정에는 남도 사람이 많아서 자기 집의 종이 부역에 나가는 것을 어렵게 생각해 정지할 것을 청한다’고 한 것은 이른바 ‘한마디 말로써 나라를 망치는 자’입니다”고 반박했다. 성준이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고 피혐하자 연산군은 사직하지 말라고 말리면서 오히려 홍문관원을 국문했다. 그 전에도 축성 이야기가 나오면 대간에서는 무조건 반대했는데 연산군은 “성을 쌓지 않았다가 후에 만약 일이 생기면 너희가 그 과실에 책임을 져야 한다(『연산군일기』5년 7월 12일)”고 꾸짖기도 했다. 연산군은 군사를 백안시하는 이런 문풍(文風)을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가 큰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중종반정 이후 정권을 잡은 문신들은 병역의 의무 대신 군포(軍布)를 받는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를 실시해 조선의 국방력을 무력화했다. 임진왜란의 비극은 이때 예고된 것이었다. 연산군이 “만약 무사(武事)를 미리 연습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뜻하지 않은 변란이 발생하면 붓을 쥐고 대응하겠는가?(『연산군일기』7년 10월 2일)”라고 말한 것이 90여 년 후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성종은 왕비 윤씨를 빈(嬪)으로 강등시킨 후 재위 10년(1479)에는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13년(1482)에는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에게 사약을 내려 죽이게 했다. 연산군은 언제 모친의 비극을 알았을까? 조선 중기 김육(金堉)이 편찬한『기묘록(己卯錄)』은 연산군이 성종의 계비(繼妃) 정현왕후 윤씨를 생모로 알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 후 임사홍을 통해 모친의 비극을 알았다는 것이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임사홍을 통해 모친의 비극을 알고 나서 복수에 나선 사건이 아니었다.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조선 정치구조를 바꾸려는 의도로 시작된 사건이었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재위 10년(1504) 3월 엄씨와 정씨를 타살한 것이 시발로 알려져 있었지만 재위 9년 9월 인정전에서 베푼 양로연 때 예조판서 이세좌가 연산군이 내린 회배주(回盃酒)를 반 이상 엎질러 연산군의 옷을 적신 작은 사건이 시작이었다. 이세좌는 술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했으나 국문 끝에 유배형에 처해졌다. 연산군은 이세좌를 이듬해 3월 석방했으나 그달 11일 경기관찰사 홍귀달(洪貴達)이 세자빈 간택을 위한 간택령 때 손녀가 병이 있다면서 “지금 비록 입궐하라는 명이 있어도 입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항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연산군은 이세좌와 홍귀달을 불경죄로 모는 한편 그해 3월 24일 승정원에 폐비 사건과 관련된 신하들을『승정원일기』를 상고해 보고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연산군은 두 사건을 병합해 거대한 폭풍을 일으켜 공신세력을 무너뜨릴 계획이었으나 아무도 그 의도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 3월 30일 “이세좌는 선왕조 때 큰일을 당했을 때 극력 간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약을 내리고 홍귀달도 그해 6월 교수형에 처했다. ‘선왕조 때 큰일’이란 물론 모후(母后)에게 사약을 들고 간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세좌는 부친 이극감(李克堪)뿐만 아니라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극배·극감·극증·극돈·극균 등의 백·숙부가 모두 봉군(封君)된 거대 공신 가문이었다. 연산군은 나아가 공신들의 세력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기로 결심했다.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 5월 7일 공신들이 노비를 마음대로 차지했다고 비판한 것을 시작으로 ‘개국 이후 여러 공신의 공적을 경중으로 나누어 아뢰라’고 명했다. 사관은 연산군이 연락(宴樂)에 빠져 돈이 부족해지자 ‘여러 공신의 노비·전지를 도로 거두려 하였다’고 비판하는데 연락 때문에 돈이 부족해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공신들의 물적 기반을 해체하려 한 것은 사실이었다. 연산군은 5월 10일 여러 『공신초록(功臣抄錄)』을 내리면서 “내 생각으로는 연대가 오래된 공신들은 그 노비와 전토를 회수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공신들의 세습 노비와 토지들을 기한을 정해 환수하겠다는 뜻이었다. 법 제정을 통한 일괄 환수가 불가능해지자 연산군이 선택한 것이 개별적 재산 몰수였다. 연산군은 폐비 사건의 책임을 물어 윤필상·이극균·성준·권주 등 생존 대신들을 사형시키고, 한치형·한명회·정창손·어세겸·심회 등 사망한 대신들은 부관참시 했는데, 이들에게는 거의 예외 없이 재산 몰수가 뒤따랐다. 이보다 앞선 재위 9년(1503) 6월에는 환관 전균(田畇)이 죽자 그의 노비 109명을 내수사(內需司)에 속하게 하고 20명은 본 주인에게 돌려주게 했다. 계유정난에 참여한 공으로 세조에게서 받은 것이었으나 사패(賜牌)에 ‘영원히 상속한다’는 말이 없었다고 관청(公)에 귀속시킨 것이었다. 연산군은 이렇게 몰수한 재산 처리에 대한 확고한 방침을 갖고 있었다. 재위 10년 5월 9일 “전일 적몰한 노비를 3등분으로 나누어 2분은 내수사에서 가려 차지하고, 1분은 각 관사에 나누어 주라”는 하교가 이를 말해 준다.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에서 3분의 2를 차지하라는 것은 결국 연산군이 그만큼 갖겠다는 뜻이었다. 신하들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옥사를 확대한다는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한명회나 정창손처럼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 느닷없이 부관참시당하고 전 재산을 몰수당한 가족들의 원한이 하늘을 찌를 것은 당연지사였다.


『연려실기술』은 연산군이 쫓겨나던 날 우의정 김수동이 “전하께서는 너무 인심을 잃었으니 어찌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전하는데 인심을 잃은 결정적 이유가 재산 몰수에 있었다. 세조나 예종은 정적(政敵)들에게 빼앗은 재산을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연산군은 자신이 차지했다. 연산군은 사대부 전체를 적으로 만들었다. 공신 집단을 해체하기로 결심했다면 그 대체세력을 찾아야 했는데 이 경우 공신세력의 정적인 사림이 대안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재위 10년 9월 느닷없이 무오사화 때 귀양 간 인물들을 언급하면서 “이 무리들을 두었다가 어디 쓰겠는가? 모두 잡아오도록 하라”고 명했다. 연산군에게는 성리학에 입각해 간쟁하는 사림도 왕권에 항거하는 제거 대상일 뿐이었다. 미리 몸을 피한 정희량(鄭希良)을 제외하고 수많은 사림이 화를 입었다.


공신들은 물론 사림까지 적으로 돌렸으니 그를 보호할 세력이 없었다. 연산군이 공신들의 자리에 사림을 배치하고 공신들에게서 빼앗은 재산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그는 왕위에서 쫓겨나지도 않고 역사상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림마저 적으로 삼은 그가 역사상 최고의 폭군으로 기록될 것은 사림이 사필(史筆)을 쥔 이상 필연적인 결과였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90호 2008년 11월 30일, 제91호 2008년 12월 7일, 제92호 2008년 12월 14일, 제93호 2008년 12월 21일, 제94호 2008년 12월 28일, 제95호 2009년 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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