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미 기자가 본 무력한 예산소위 현장] 밀실서 만들어진 깜깜이 예산 그마저 여야 싸워 도루묵될까 걱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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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오전 10시. 국회 예결위원회 회의장 안쪽에 위치한 ‘밀실’이 공개됐다. 여야 예산안조정소위 위원들이 내년도 예산안에 마지막 ‘칼질(증액·감액심사)’을 하는 공간이었다. 21일부터 문을 굳게 닫고 심사를 해오던 소위의 모습이 사진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하기 위해 잠깐 공개됐다.

 양당 간사인 새누리당 김성태 의원과 새정치민주연합 안민석 의원 등 4명이 사각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안 의원=“마지막 날인데 여당이 통 크게 양보를 몇 가지 해주시죠. 누리과정(3~5세 무상보육) 예산을 뭐 다른 엉뚱한 예산 가지고 퉁치려는 거 (우리는) 일절 받지를 못하니까.”

 ▶김 의원=“예산이 뭐 하늘에서 떨어진 돈입니까? 다 국민 혈세예요!”

 10분가량의 포토타임 내내 두 의원은 설전을 벌였다. 하지만 결국 지도부만 바라봤다.

 ▶안 의원=“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씀만 일주일째 하시는데, 더 이상 우리 선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까 원내대표 협상으로 넘기든지 하고 할 수 있는 것만 합시다.”

 ▶김 의원=“(야당이) 경제활성화법안과 민생법안에 대해 협조만 하면, 전향적으로 언제든지(할 수 있는데).”

 결국 이날 예산소위는 오후 4시20분쯤 중단됐다. 새누리당과 정부의 긴급당정회의에서 “노동개혁 법안 협상 타결 시까지 예산안 수정(협상)을 중단한다”는 방침이 결정됐기 때문이다. “쟁점 법안이 처리 안 되면 차라리 정부 원안대로 예산안이 처리돼야 한다는 게 청와대의 입장”이란 얘기까지 돌았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여야가 합의한 예산항목은 모두 백지화된다.

 허를 찔린 야당은 반발했다. 오후 4시부터 두 시간 동안 열린 의원총회에선 “판을 깨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최재천 정책위의장은 “여당이 우리를 지역구 예산 몇 푼에 목 메는 사람들로 만들었다”고 했고, 김성수 대변인은 “세상에 어떻게 여당이 예산과 법안을 연계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예산소위의 문은 이날 다시 열리지 않았다. 지난달 16일부터 본격 시작된 예산소위는 지역구 예산을 따내기 위해 위원을 매일 바꾸는 ‘인간쪽지’ 논란에 첫날부터 시끄러웠다. 이후 누리과정 국고 지원과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업 등의 쟁점 예산을 사이에 두고 정쟁으로 겉돌았다. 그 와중에 총선을 앞두고 지역구 예산을 한 푼이라도 더 따내려는 의원들의 ‘예산 베어먹기’가 활개쳤지만 그 내역은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았다. 그 ‘밀실’에서 만든 ‘깜깜이’ 예산마저 여당의 노동개혁법안-예산안 연계로 폐기될까 봐 예결위는 숨을 죽였다. 그게 무력한 예산소위의 현주소다.

박유미 기자 yumi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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