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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뗀 기념으로 쓴 시, 1000권 팔릴 줄 몰랐다카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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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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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경북 칠곡군 북삼읍 마을회관에서 할머니들이 직접 쓴 시를 들어보이고 있다. 시집은 2주 만에 1000권이 팔렸다. [프리랜서 공정식]

‘시를 쓰라하니 눈아피 캄캄하네/글씨는 모르는데 어짜라고요.’-박점순(74) 할머니의 ‘글’

칠곡 어르신 89명 『시가 뭐고?』
글 삐뚤빼뚤, 맞춤법 틀려도
문인들 “감성 순수” 출판 권해
"몇 자 기린 긴데 부끄럽데이"
수익금 전액 장학금 내놓기로

 ‘공부시간이라고/일도 놓고/헛둥지둥 왔는데/시를 쓰라 하네/시가 뭐고/나는 시금치씨/배추씨만 아는데.’-소화자(72) 할머니의 ‘시가 뭐고?’

 군데군데 맞춤법이 틀린 삐뚤빼뚤한 글씨체. ‘절제의 미학’과는 거리가 먼, 투박하기까지 한 표현. 이런 시집이 발간된 지 2주일 만에 초판본 1000권이 매진됐다. 경북 칠곡군의 할머니 87명과 할아버지 2명이 함께 낸 시집 『시가 뭐고?』다.

 시집은 할머니·할아버지들이 한글을 깨우친 기념으로 만들었다. 지난해 한글을 배우기 시작해 올 5월 시를 지었다. 시를 쓴 데 특별한 의도는 없었다. 강사가 그냥 “짧은 시를 한번 써 보라”고 한 게 전부였다. 그랬더니 할머니들이 이런 시를 지었다.

 생활 속의 느낌을 진솔하게 옮겨 놓은 시들도 많았다. 김말순(79) 할머니가 지은 ‘비가 와야대갰다’는 이렇게 올 가뭄을 노래했다. ‘비가 쏟아져 오면 좋겠다/풍년이 와야지대갰다/졸졸 와야지/고구마, 고추, 콩, 도라지/그래야 생산이 나지.’ 병 구완을 해준 며느리에 대한 고마움을 나타낸 시, 뒤늦게 글을 배우는 어려움을 표현한 시도 있다.

 칠곡군은 처음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지은 시 98편을 그냥 보관해 뒀다. 이걸 지역 문인들이 보더니 “감성이 예쁘다”고 평했다. 그래서 시집을 내게 됐다. 칠곡군 이한이(54) 평생교육담당은 “그래야 감성이 살아날 것 같아 맞춤법이 틀린 부분을 그냥 뒀고, 할머니·할아버지들의 글씨체도 그대로 살렸다”고 말했다. 각 시의 제목 역시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처음에 적어 놓은 그대로였다.

 지난달 칠곡군이 인쇄료 1300만원을 들여 151쪽 분량의 시집 초판본 1000권을 찍었다. 출판사 ‘삶창’은 이 시집을 교보문고와 인터넷 서점에 권당 정가 9000원에 내놨다. 그게 2주일 만에 다 팔렸다. 삶창 황규관(48) 대표는 “순수한 시골 할머니들이 솔직한 눈으로 바라본 그들만의 세상에 독자들이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시가 뭐고?』 서평에서 고영직(48) 문학평론가는 “시인들이여, 시가 뭐고?”라고 문단에 화두를 던졌다.

 할머니들은 겸연쩍다는 반응이다. 시집 제목이 된 ‘시가 뭐고?’를 쓴 소화자 할머니는 “생각나는 거 몇 자 종이에 기린(그린)긴데, 아이고 부끄럽데이”라고 했다. 김말순 할머니는 “내가 시인? 그냥 시골 할매라카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칠곡군과 출판사는 시집 재판본을 만드는 중이다. 오는 21일에는 할머니·할아버지들에게 출판기념회를 열어주기로 했다. 할머니·할아버지들은 『시가 뭐고?』판매 수익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내놓기로 뜻을 모았다. 칠곡군은 내년에 할머니·할아버지들의 시를 더 받아 『시가 뭐고?-두 번째 이야기』를 발간할 예정이다.

대구=김윤호 기자 youkn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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