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믿을 수 없는 원숙함, 어느 별에서 온 왕자일까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월간중앙]

기사 이미지

오케스트라와 만난 조성진의 손은 저절로 움직였다. 물을 만난 고기와 같았다. 여유 있게 잡은 템포에서 음악은 장엄하게 흘렀다. 발라드 연주를 듣는 순간 청중은 마법에 사로잡혔다. 쇼팽에 최적화된 그의 테크닉, 테크닉을 넘어 계시에 가까웠다.

쇼팽 콩쿠르 우승에 빛나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음악세계

 지난 10월 21일에 끝난 17회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파리 음악원에 재학중인 한국인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우승을 차지했다. 조성진을 향한 뜨거운 관심은 음악계와 문화계를 넘어 사회 각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1990년대 초반 미국 뉴욕 필하모닉과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데뷔를 통해 ‘신동’으로 각광받던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의 내한공연, 1994년 11세의 나이로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쿠르에서 우승한 장한나 이후 근 20여 년 만에 한국사회가 클래식 영스타 출현에 열광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뉴미디어가 대회 생방송 중계에 활용되면서 심사위원들이 정당한 평가를 통해 상위 라운드 진출자를 결정하는지, 경연장 밖의 네티즌들이 실시간 옵서버로 나섰다. 지난세기 콩쿠르와는 현격히 다른 풍경이다.

기사 이미지

 단 하나 남았던 고지에 오르다

2011년 러시아에서 열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5명의 한국인 연주자가 대거 입상하면서 이른바 ‘K-클래식’이 이슈가 됐다. 2015년 조성진의 쾌거를 놓고 ‘K-클래식’의 승리로 규정하는 담론은 ‘민족의 뛰어난 예술성을 세계에 알렸다’는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축전을 제외하면 찾아보기 어렵다. 경제지를 중심으로 국내 음악재단들의 후원을 평가하고 일간지에선 한국 피아노 교육의 수월성을 되돌아보는 기사를 내고 있지만 아직까지 해외에서 조성진의 쇼팽 우승을 바라볼 때는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 대목이다. 조성진의 우승은 개인의 성취인가, 국내 음악계가 기울인 투자의 산물인가? 그동안 조성진이 밟아온 성장의 궤적과 음악적 특징, 향후 도약을 위해 필요한 과제는 무엇인가?

  흔히 일본과 국내 언론은 러시아의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폴란드의 쇼팽 콩쿠르를 ‘세계 3대 콩쿠르’로 칭한다. 앞의 두 경연이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 성악 등의 다양한 기악군을 포함하는 반면 쇼팽 콩쿠르는 5년 주기로 쇼팽의 기일인 10월 17일을 전후해 오직 쇼팽의 피아노 음악만을 다룬다.

  한국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복수의 우승자를 배출했다. 4년마다 열리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선 1990년 바리톤 최현수, 2011년 베이스 박종민과 소프라노 서선영이 각각 남녀 성악 부문 우승을 차지했다. 성악과 피아노, 바이올린이 매년 윤번제로 열리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선 2015년 임지영이 바이올린 부문을 우승했다. 2015년 10월 이전까지 한국인이 오르지 못한 고지는 오직 하나 쇼팽 콩쿠르였다.

  오래전부터 쇼팽 콩쿠르가 해외에서도 뜨거운 주목을 받은 건 입상자, 특히 우승자들이 경연을 치르고 난 다음 선보인 기량이 월등했기 때문이다. 1960년 6회 우승자 마우리치오 폴리니를 비롯해 1965년 마르타 아르헤리치, 1975년 크리스티안 치메르만, 2005년 라파우 블레하츠 등의 우승자는 콩쿠르 이후의 공연과 음반 발매를 통해 지금도 세계 클래식 시장의 핵심 피아니스트로 자리 잡고 있다. 앞서 언급한 우승자 가운데 내한 피아노 독주회를 가진 건 오직 2003년 치메르만 리사이틀이 유일할 만큼 한국 시장은 쇼팽 콩쿠르 우승자를 직접 보는 데 갈증을 느껴왔다. 그래서 1985년 우승자 스타니슬라프 부닌, 2000년 우승자 윤디 리의 첫 내한 공연은 아이돌 스타공연의 객석처럼 젊은 여성 팬들로 가득했다. 2005년 공동 3위를 차지한 임동민-임동혁 형제 역시 이듬해 정초부터 국내에서 콩쿠르 기념 공연을 가졌고, 이들을 성원하는 팬들까지 ‘동동 브라더스 서포터스’라는 애칭을 갖기도 했다.

  1927년 이후 역대 16회의 대회 가운데 6위까지 공식 시상하는 입상자 명단엔 임씨 형제 말고는 한국 국적은 없었다. 일본은 이 대회전까지 1965년 나카무라 히로코(4위)를 시작으로 우치다 미쓰코(1970년 2위), 고야마 미치에(1985년 4위) 등 여덟 명이 입상했고, 중국은 2000년 우승자 윤디 리, 같은 대회 4위 천사 등 세 명이, 홍콩(콜린 리, 2005년 6위)과 베트남(당 타이손, 1980년 1위)도 각각 한 명씩 입상자를 배출했다.

  2015년은 공교롭게도 3대 경연 가운데 차이코프스키와 쇼팽 콩쿠르가 함께 열리는 해였다. 또한 아르헤리치(1957년 1위), 게릭 올슨(1966년 1위)을 배출한 명문 대회인 부소니 콩쿠르도 함께 열려 문지영(19세, 한국예술종합학교 기악과)이 한국인으로는 처음 우승했다. 누가 어느 대회에 나갈지가 지난해 연말부터 화제를 모았고, 조성진은 지난 2011년 대회 3위 입상으로 참가 자격이 없는 차이코프스키 대신 쇼팽을 선택했다. 당초 쇼팽 콩쿠르 출전자 명단에 든 임지영은 부조니 대회 우승 이후 쇼팽 대회 참가 의사를 철회했다.

  1994년생인 조성진은 6세에 피아노를 시작해 성남 신기 초등학교 6학년까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함께 교육받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2005년 금호 영재 콘서트로 무대에 올랐지만 채 악기를 선택하기 전의 공연으로 기억한다. 동네 학원을 거쳐 서울 예술의전당 영재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박숙련 순천대 교수를 사사한 것이 본격적인 음악 교육의 시작이다.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거쳐 2012년 프랑스 국립음악원으로 유학을 가서 학사를 마치고 현재 석사과정 중이다. 예원 2학년 시절 출전한 2008년 모스크바 청소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음악계에 조금씩 이름이 알려졌다. 스스로는 직업 연주가의 목표를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잡고 쇼팽 콩쿠르에 도전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2005년 쇼팽 콩쿠르 실황을 동영상으로 지켜볼 때부터라고 밝힌다. 결심한지 10년 만에 일궈낸 결실이다.

  올 초 쇼팽 콩쿠르를 준비하는 조성진의 여정은 험난했다. 예심이 면제되는 1차 예선 참가자 명단에 들지 못해 가을 본선 참가를 위한 예선을 연초에 따로 치렀다. 마레크 야놉스키&베를린 방송교향악단, 로린 마젤&뮌헨 필하모닉, 미하일 플레트네프&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 발레리 게르기예프&마린스키 오케스트라, 정명훈&서울시향-라디오 프랑스 필처럼 그동안 조성진이 협연한 커리어를 보거나, 2009년 하마마츠 콩쿠르 우승, 2011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3위(1위 다닐 트리포노프, 2위 손열음)의 성과를 감안할 때 쇼팽 협회의 결정은 의외였다.

기사 이미지

 “쇼팽은 가장 자신이 없었던 작곡가였다”

무사히 예심을 통과한 조성진은 10월 대회를 위한 준비에 총력을 다했다. 지난해 12월 파리에서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샬플레옐 공연 관람을 위해 공연장을 방문한 조성진을 만났을 때도 그의 관심은 쇼팽에 쏠려 있었다. 스스로는 어릴 때부터 가장 많이 연습하고 연주한 작곡가지만 가장 자신 없는 작곡가로 쇼팽을 들고 있다.

  보통 콩쿠르를 앞두고 연습을 겸한 리사이틀을 갖거나 손을 풀어보는 형태의 협연을 오케스트라와 갖는 경우도 잦은데, 2015년 상반기만 해도 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참가를 배려하는 국내 음악계의 움직임은 미진했다. 지난 3월 경기도에서 열린 마레크 야놉스키&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공연 무대에 올랐지만 연주곡은 대회와 무관한 베토벤 협주곡 였다. 2011년 6월 LG아트센터에서의 독주회(CMI주최)처럼 콩쿠르 곡을 관객 앞에서 보이는 국내 독주회도 잠시 모색했지만 원하는 조건으로 이를 연결하는 기획사는 찾기 어려웠다. 기획사 입장에선 조성진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당시만 해도 상업성을 자신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2010년 10월 루체른 페스티벌 스트링스 내한공연을 시작으로 조성진이 참가하는 해외 오케스트라 협연이나 독주회에서 조성진의 이름을 이용한 티켓 파워는 2015년 전반기까지 유의미한 수치를 기록하지 않았다. 2011년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2013년 뮌헨 필하모닉처럼 평균 가격 20만원을 전후한 해외 연주단체 협연에 조성진이 함께했을 때, 협연자 이름을 보고 움직이는 티켓 흐름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2013년 뮌헨 필하모닉 공연을 앞두고 약 17개 미디어와 일일이 인터뷰를 나눈 끝에 팔린 유료 티켓수가 1천 석에 못 미친다. 이 역시 마젤과 악단의 명성에 힘입은 바 크다. 이미 플레트네프, 야놉스키, 정경화, 라두 루푸 등 세계적인 지휘자와 기악 연주자들이 연주회가 끝나도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며 격려하는 아티스트였지만 국내 팬들에겐 가끔 나타나는 재외 음악인 중 하나였다.

  2010년대 이전 프로 연주자로 발돋움하기 전까지 그래도 조성진의 모습을 무대에서 볼 수 있던 곳은 금호아트홀이다. 2005, 2006년 독주회와 2007∼08년 피아노 트리오 공연은 금호 아시아나 문화재단이 선정한 영재 공연의 일환이었다. 2011년 신년 음악회가 2011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앞두고 한층 무거워진 조성진의 음악 가치를 일반 관객도 확인할 수 있던 드문 기회였다. 대원문화재단은 후원자 연결을 통해 무대 밖 조성진을 측면 지원했다. 민남규 케이디켐 대표가 재단 소개를 통해 조성진을 꾸준히 후원했다.

  조성진의 음악성을 상업적 가능성에 주목해 먼저 투자한 곳은 일본이다. 2009년 11월 조성진은 일본 하마마츠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뒀다. 흔히 이 대회는 ‘세계 3대 콩쿠르’ 입상을 위한 예비 등용문으로 알려진 대회다. 피아노 전공자와 일부 음악팬 사이에서만 알려졌던 조성진의 위상이 전방위로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가 이 대회였다. 일본 굴지의 프리젠터이자 매니지먼트 재팬아츠는 다음 경연이 있기 전까지 이 대회 우승자의 일본 내 흥행에 대한 책임을 분담하고 있다.

  경연이 끝나고 재팬아츠의 한국 담당자가 회사의 극동담당 부장과 함께 서울을 방문했다. 우선적으로 조성진의 일본 프로모션의 타당성 검토를 위해 국내 모 기획사를 방문해 그동안 조성진이 연주한 한국 연주 영상을 요청하고 음악계 주변에 대한 탐문을 시작했다. 스승 신수정 전 서울대 음대 학장의 성향을 파악하고 국내 음악인들의 평가도 수집했다. 향후 재팬아츠가 조성진이 개입된 유럽 오케스트라의 아시아 투어를 서울에 판매할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다른 업무 차 한국을 방문해도 주요 카운터파트에 조성진에 대한 평가를 넌지시 청취한 것도 그 즈음이다.

기사 이미지

 “영원한 1등도 영원한 꼴찌도 없다”

2010년 조성진은 서울예고에 입학했고 신수정 교수와의 개인 교습이 이어지는 동안, 커리어를 쌓을 현장 교육인 공연은 거의 일본이 주도했다. 그동안 한국 피아노 교육계가 해외 콩쿠르 입상자를 배출하면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지만 조성진의 경우도 같은 시스템이 작동했는지 살피려면 우선적으로 그가 거친 중등 공교육기관의 교육 내용을 살펴야 한다. 2010년대 이후 조성진의 공식 인터뷰에선 공교육의 수혜를 언급한 부분은 찾아보기 어렵다.

  조성진이 서울예고에 입학한 이후 한국 음악계가 과연 일본만큼 조성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투자를 이어왔는지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2011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입상이 아니었더라면 2012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2013 뮌헨 필 한국 공연에 조성진을 내세우기는 흥행상 쉽지 않았다. 그나마 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 베를린 방송교향악단과 꾸준한 아시아 협연을 통해 조성진과 플레트네프, 야놉스키의 관계가 돈독해지도록 하는 데 국내 기획사들이 일조했다.

  그 사이 조성진를 볼 수 있던 곳은 ‘피스 앤 피아노 페스티벌’이 열리는 수원, 대관령 국제음악제가 열리는 강원도 평창, DMZ 페스티벌이 열리는 경기도 연천이나 신수정 전 학장과 특수 관계에 있는 서초동의 모차르트홀이었다. 서울 시향이 해외 투어 직전 사실상 국내에서 연습 무대로 오르는 지방 공연에 발품을 판 것도 조성진이다.

  반면 재팬아츠는 2010년부터 일본 독주회 개최와 일본 악단 협연에 대한 마케팅을 지금까지 수행하고 있다. 국적을 불문하고 야마하 피아노 브랜드를 생산하는 하마마츠 지방을 빛내는 경연의 우승자를 대우하는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 조성진은 그 이득을 지속적인 계약 연장으로 이어가고 있다. 이미 재팬아츠는 2014년에 2016년 일본 스케줄을 조성진과 협의했고, 지금도 갑자기 협연자 교체가 필요한 공연에 조성진의 의사를 한국이나 유럽보다 앞서 선제적으로 확인 중이다. 재팬아츠는 쇼팽 콩쿠르가 열린 바르샤바 현장으로 직원을 보내 실시간 SNS로 조성진의 소식을 널리 알렸다.

  2011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3위의 결과가 단지 조성진이 가진 잠재력의 일부분이라는 평가는 2014년 이스라엘에서 열린 루빈스타인 콩쿠르 3위 입상 때도 이어졌다. 대회 기간 내내 시종일관 탁월한 기량을 연출하고도 결과는 석연치 않았다. 2006년 초등학교 6학년 시절 국내 이화 경향 콩쿠르에 우승하고 주최 신문사인  기자에게 밝혔듯이, “영원한 1등도 영원한 꼴찌도 없다고 배웠다. 겸손하게 피아노를 공부하겠다”는 자세를 다시금 되새겼다. 루빈스타인 대회 기간의 자신을 돌아보건대, 어떻게 하면 도드라지게 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시야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 소득이었다. 그래도 루빈스타인 대회의 경연 곡이었던 브람스 4중주와 난곡인 리스트 소나타는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조성진이 프랑스 파리의 연습실에서 되풀이한 어마어마한 질량의 고뇌는 그대로 2015년 쇼팽 콩쿠르의 탄복할 만한 해석으로 이어졌다. 라운드마다 이어지는 조성진에 대한 현지 언론의 상찬은 대단했다. 마치 2009년 12월 정명훈&서울시향과 라벨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을 때의 국내의 언론 반응처럼 ‘믿을 수 없는 원숙함’이라는 구절로 요약됐다.

기사 이미지

파리에선 음악보다 문화를 배운다

라운드별로 레퍼토리가 바뀔 때마다 조성진의 탄탄한 기본기는 경쟁자들을 압도했다. 특별상을 수상한 폴로네이즈에서 맹수의 모습으로 건반을 종횡으로 누비는 조성진의 비주얼은 이미 10대 중반에 참가한 하마마츠 콩쿠르 때부터 이어진 것이다. 당당하되 과장 없는 특유의 제스처는 국내외 여러 리사이틀에서 유미주의자의 시각으로 고전주의 곡들을 조응하던 때의 모습 그대로다.

  결승전에선 쇼팽이 남긴 피아노 협주곡 두 곡 가운데 1번을 택했다. 수많은 연습 과정에서 상상 속 악단의 반주를 상정하고 그에 대응하는 독주를 이어가던 그는 실제 오케스트라를 접하니 물을 만난 고기가 되었다.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는 발언은 그렇게 해서 나왔다. 여유 있게 잡은 템포에서 확인할 수 있듯 장중한 흐름의 깊은 맛을 우러나게 했고, 발라드 연주에선 애수의 느낌을 손끝에 불어넣는 특유의 기술이 여지없이 발휘되면서 좌중을 사로잡았다. 쇼팽에 최적화된 조성진의 테크닉 바로 그것이었다.

  현재 파리 음악원에서 조성진을 가르치는 미셀 베로프는 자신의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제자에게 주입하는 교수가 아니다. 조성진 역시 받아들일 내용을 한정해서 자신의 연주에 응용하는 제자다. 스승의 음악세계를 유추해 무리하게 조성진의 음악 세계에 투영하는 외부의 지적이 거듭되기도 했다. 조성진은 그때마다 “파리에 온 이유는 음악을 배우러 온 것이 아니라 문화를 배우기 위해서다”라는 말로 그런 지적을 에둘러 부정했다.

  서양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꼭 거쳐야 할 곳으로 그는 파리를 점찍었다. 2012년 봄 그가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이다. 학교 입학을 위한 프랑스어 시험 통과를 위해 그는 석달 동안 밤낮없이 공부했다고 한다. 파리에서 누리는 조성진의 자유를 지난해 겨울 잠시 엿볼 수 있었다. 조성진은 놀러 간다는 생각으로 파리의 살 플레옐과 샹젤리제 극장을 수도 없이 드나들었다. 파리에서 만났을 때 조성진의 표정은 밝았다. 한 캐주얼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시키며 “그리고리 소콜로프, 마우리치오 폴리니,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머리 페라이어, 라두 루푸를 정말 원 없이 보고 있다”고 말했다. 파리 생활이 그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느껴졌다. “공연을 한 명의 청중으로 즐긴다”는 그의 표현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자신의 연주에 영향을 미칠까 봐 다른 아티스트의 공연을 일부러 보지 않는다는 노장도 많다. 그는 석사과정이 끝난 이후에도 파리 생활을 계속 이어갈지 고민하고 있다.

  11월 2일 생활 근거지인 파리를 출발해 버밍엄으로 들어오는 조성진은 쾌조의 컨디션을 보였다. 쇼팽 콩쿠르에 우승하고 10월말 폴란드 일정을 마치고 모처럼만에 파리 자택에서 쉬면서 몸을 잘 추슬렀다. 보통 콩쿠르가 끝나면, 긴장이 풀어져서 몸살을 앓는 경우가 많은데 연말까지 프랑스와 일본, 네덜란드로 이어지는 우승자 공연을 위해 지금도 긴장한다고 말했다.

  국내에선 연일 화제에 오르는 조성진이지만 영국 음악계는 아직까지 실연으로 검증되지 않은 경연 출신자에 대해 의전상 특별한 예우를 보이지 않았다. 영국 악단들이 다른 협연자에게 요구하듯, 조성진도 알아서 공항에서 숙소로 이동하고, 약속된 시간에 맞춰 리허설에 참가하는 또 한 명의 루키였다. 세계 유수의 매니지먼트와 계약된 대다수의 중견 연주자 역시 영국에선 비슷하게 대우받는다.

기사 이미지

  태도와 심성이 연주의 질 못지않게 중요

11월 3일 버밍엄 공연을 앞두고 조성진은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와 4년 만에 만났다. 조성진은 2011년 10월 피아노 듀오 공연을 위해 내한한 아쉬케나지를 만나려고 예술의전당 백스테이지를 찾았다. 자신을 차이코프스키 입상자라고 밝힌 조성진에게 아쉬케나지는 일면식이 없어도 용기 있게 문을 두드린 점을 칭찬했다. 아쉬케나지는 조성진처럼 차이코프스키(1962년 공동 1위)-쇼팽 콩쿠르(1955년 2위)에 동시 입상한 이력이 있고,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의 경력도 그렇게 시작됐다.

  리허설 중 두 사람은 쇼팽 협주곡에 대한 심플한 해석과 왼손의 베이스라인 처리에 관한 기술적인 부분을 조율했다. 버밍엄 심포니홀에서의 첫 연주는 온라인 전문 비평사이트 ‘바흐트랙’에서 별 다섯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조성진은 “데뷔한 곳에서 다시 초청을 받기 위해서는 이제부터의 연주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자신을 채근했다.

  이제 조성진에게 필요한 것은 레코드 레이블과 세계 활동을 전반적으로 조절할 제너럴 매니지먼트다. 역대 쇼팽 콩쿠르 우승자의 이력을 보면 레코딩 레이블은 자연스레 도이치 그라모폰(DG)으로 굳혀질 가능성이 크다. 이미 11월 5일 런던 페스티벌 홀에서의 필하모니아 협연 공연 때 그런 징후가 드러났다. DG의 모기업인 유니버설 뮤직그룹의 A&R(아티스트와 레퍼토리) 부사장 코스타 필라바치가 조성진의 일정을 챙기며 유럽 스태프들과 저녁을 함께했다.

  보다 주목되는 이슈가 제네럴 매니지먼트와의 계약이다. 클래식 비즈니스계엔 런던을 중심으로 아티스트 활동을 관리하는 대형 매니지먼트 회사가 여럿 있다. 정명훈과 김선욱이 소속된 아스코나스홀트, 지휘자 라인업이 빛나는 해리슨 패럿, 유태인 파워가 남다른 인터무지카, 전통의 명가 IMG 런던 등 대형업체와 장르를 특화한 중소형 매니지먼트가 셀 수 없이 많다.

  조성진이 앞으로 고려할 만한 기획사는 앞에 서술한 곳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유수의 매니지먼트는 연주의 질뿐 아니라 아티스트의 태도와 심성을 면밀히 관찰한다는 것을 조성진은 잘 알고 있다. 10대 중반부터 재팬아츠 매니저들을 통해 이미 체득한 사실이다. 어떻게 아티스트를 관리하고 무엇으로 연주자를 평가하는지 잘 지켜본 결과, 조성진은 “회사도 중요하지만 매니저가 더 중요하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레이블과 매니지먼트 계약이 구체화되면 조성진의 연주활동은 날개를 달 것이다.

  2016년 3월 11일 런던 사우스뱅크센터가 주관하는 인터내셔널 피아노시리즈를 위해 조성진은 다시 런던을 찾을 것이다. 그 즈음에는 그의 제너럴 매니지먼트와 음반사가 정해져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정확히 그로부터 5년 전인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조성진은 정명훈이 지휘하는 체코 필하모닉 공연을 위해 후쿠오카에 머물렀다. 조성진은 필자와 함께 우설구이로 저녁식사를 하며 지진 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들었다. 그는 “사람의 운명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란 취지의 말을 했다. 바로 그랬다. 그 소년이 약 5년 후 세계 제일의 피아노 경연에서 우승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아마도 피나는 노력을 쏟아부었던 5년이었을 것이다.

한정호

한정호=한국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공연월간지  기자로 5년간 클래식 음악을 담당했다. 기획사 ‘빈체로’에서 6년간 홍보와 기획을 맡았고 일본 오케스트라 연맹에서 1년간 일했다. 국립무용단 자문위원을 역임했고 2013년부터  옴부즈맨으로 2년간 활동했다. 현재 런던시티대에서 문화정책 석사과정을 밟고 있으며  런던통신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기사 이미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