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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이유영이 피어났다

중앙일보

입력

[인터뷰|'그놈이다' 이유영] 비로소 이유영이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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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갈색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몰입력. 배우 이유영(26)의 성장이 놀랍다. 지난해 밀라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데뷔작 ‘봄’(2014, 조근현 감독)부터 심상치 않더니, ‘간신’(5월 21일 개봉, 민규동 감독)의 팜므파탈 설중매 역을 거쳐, ‘그놈이다’(10월 28일 개봉, 윤준형 감독)에선 귀신을 보는 여인 시은 역을 신들린 듯 소화해냈다. 1년 새 비중 있는 배역을 잇따라 맡으며, 20대 여배우 기대주로 떠오른 그를 만났다. 결혼 정보 업체 모델다운 풋풋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그놈이다’를 찍다가 눈의 실핏줄이 터졌다고 들었다. “주인공 장우(주원)와 함께 위기에 처하는 장면에서 너무 힘줘 연기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눈의 절반이 새빨개졌는데 감독이 더 좋다고 하더라(웃음). 가쁘게 호흡하는 장면이 많아서 두통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심리적인 후유증은 없었나. “전혀 없었다. 영화 촬영장이 이렇게 편하고 행복한 곳인 줄 처음 알았다. ‘간신’의 경우 불면증 같은 후유증이 심했다. 자신감이 없는 상태에서 잘하려고 너무 욕심내서 그랬던 것 같다. 시은 역은 시나리오 읽을 때부터 정말 마음에 들었다.”

-어떤 부분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시은이 나와 비슷했기 때문에 몰입했던 것 같다. 당연히 자신감도 생겼다. 난 겉으론 밝아 보이지만, 속마음은 시은처럼 여리고 상처도 잘 받는다. ‘간신’의 설중매처럼 당돌하고 되바라진 성격이 아니다. 겉은 설중매지만, 속은 시은 같은 여자랄까(웃음).”

-귀신을 보는 여인을 연기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감독이 추천해 준 다큐멘터리 ‘사이에서’(2006, 이창재 감독)를 봤다. 영매를 다룬 그 작품을 보고서 신내림 받는 여인들이 불쌍하다고 느꼈다. 평범한 여자인데, 상황과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을 이상한 여자로 만들고 있었다. 그때부터 시은의 정서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상처를 많이 받는 성격이다 보니 심리적 방어기제로 사람들에게 일부러 못되게 굴 때가 있다. 그런 경험을 떠올리며 시은을 연기했다.”

-원래 예민한 성격인가. “안 좋은 일을 겪거나 우울함 또는 불안함을 느끼면 그날은 반드시 악몽을 꾼다. 악몽의 내용은 메모장에 적어 놓는다. 나중에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웃음).”

-시은의 과거를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 전혀 없어 아쉬웠다. “시은이 평범한 대학생이자 목사의 딸인데, 이상한 현상을 겪은 뒤 집에서 쫓겨나 외딴 마을에서 살게 됐다며 마을 사람들이 쑥덕대는 대목이 있었다. 그게 편집돼 서운했다.”

-극의 긴장감을 조율하는 중요한 캐릭터여서 부담감도 컸을 것 같다. “현실감 없는 캐릭터로 보이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컸다. 관객이 시은에 대해 말도 안 된다고 느끼면 영화는 망하는 거니까. 감독과 제작자도 내가 가장 중요한 캐릭터라고 항상 강조했다. 시은을 현실적인 캐릭터로 만들려 무척 노력했다.”

-시은의 외모에 대해 감독과 어떻게 조율했나. “시나리오를 읽고서 ‘꽃잎’(1996, 장선우 감독)의 소녀(이정현) 같은 광녀(狂女)의 외모를 떠올렸다. 그 말을 했더니 감독이 경악하며 ‘내가 5년간 머릿속에 그려 온 시은은 그런 여자가 아니다. 겁 많고 연약한 아이다’라고 하더라. 빙의 장면에서 토악질과 경련은 물론, 아기 목소리도 내고 싶었는데 감독의 말대로 수위를 낮췄다.”

-마침 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동기인 박소담도 ‘검은 사제들’(11월 5일 개봉, 장재현 감독)에서 빙의 연기를 했다. “이 영화보다 먼저 ‘검은 사제들’ 시나리오를 봤는데, (박)소담이 연기한 영신 역을 무척 하고 싶었다. 삭발이 문제냐며 적극적으로 나선 끝에 장 감독과 연락이 닿았는데, 영신 역을 맡기엔 내가 너무 여성스럽다고 하더라. 어떻게 어필할까 고민하던 차에 이 영화와 인연이 돼서 출연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검은 사제들’은 짝사랑으로 끝났고, ‘그놈이다’와 커플이 된 거다. 후회는 없다. 소담이도 ‘그놈이다’에서 장우의 동생 은지 역을 맡을 뻔했다.”

-연관 검색어로 항상 ‘노출’이 따라붙어 속상하지 않나. “이 영화가 뜻깊은 이유 중 하나는 내가 벗지 않은 첫 번째 영화라는 점이다(웃음). 앞으로 다양한 작품을 하면 나를 보는 시선이 자연스레 바뀌겠지. 말 많은 ‘간신’의 동성애신의 경우 대역을 쓸 수 있었지만 쓰지 않았다. 오롯이 내가 연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간신’은 잘 되지 않는 연기 때문에 힘들었지, 노출 때문에 마음고생 하진 않았다.”

-갈색 눈동자가 연기하는 데 방해되진 않나. “흐리멍덩해 보이는 눈이 늘 콤플렉스였다. 그런데 연기를 하면서 눈이 매력적이란 말을 자주 듣다 보니, 내 눈을 사랑하게 됐다(웃음). 연기 때문에 서클렌즈를 낀 적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다.”

-얼마 전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출연했다고 들었다. “두 달 전에 찍었는데, 주인공 김주혁 선배의 상대 역인 웃음이 헤픈 여자 민정을 연기했다. 한 번도 웃는 캐릭터를 맡지 못했는데, 이번엔 정말 나답게 많이 웃었다. 감독님이 웃음기를 조금만 빼자고 할 정도였다. 그 영화를 찍으며 일상적인 연기에 대한 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

-배우가 되기 전 미용사 일을 했다는 점도 특이하다. “대학 진학에 뜻이 없어 이것 저것 많이 해 봤다. 어느 날 만만해 보였던 연기를 하겠다며 연기 학원에 보내달라고 했더니, 어머니가 미용사 자격증부터 따라고 했다. 당시 미용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뭔가 시작했으면 끝을 보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거였다. 결국 자격증을 딴 뒤 연기 학원에 갈 수 있었다. 반항기 있고 자유로운 영혼이었는데, 연기의 세계를 접하고부터 잘 풀리는 것 같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에 계속 연기를 할 거다.”

글=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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