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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가 바로 저긴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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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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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욱
금융연구원 상근자문위원

“1960년대 말 기술연수생으로 일본 산요전기에 갔다. 모든 게 신기했다. 통계적 관리 기법을 이용한 품질관리, 산업공학 기법을 이용한 생산관리 등이 활발했다.” 삼성전자 윤종용 전 부회장의 회상이다(윤종용, 『초일류로 가는 생각』, 2004년). 당시 삼성전자의 성장 모델은 일본이었다. 산요전기와 NEC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들여왔다. 원자재와 부품, 설비는 일본제였고 공장 설계와 공정 배치, 기계 설치와 시운전, 가동까지 모두 일본 기술진에게 의존했다. 기술도 일본이 가르쳤다. 다른 기업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일본은 ‘넘사벽’이었다. 그러면서 극복 대상이었다. 모방의 궁극 목적은 독자 개발이었다. 80년대 초 반도체 사업을 시작할 당시 이병철 회장은 “도대체 일본을 이기지 못할 이유가 뭐냐”고 질책했다. 추격을 넘어 추월하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그 꿈이 현실화될 거라고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그만큼 일본의 벽은 높았다. 그러나 꿈은 실현됐다. 2000년대 초반 소니를 꺾었고, ‘스승’인 산요전기는 망했다.

 이 얘기를 꺼내는 건 조만간 일본을 추월한다는 국제통화기금의 전망 때문이다.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년 뒤 추월하고, 1인당 명목 GDP는 5년 뒤 비슷해진단다. 온통 우울한 얘기뿐인데 오랜만에 듣는 기쁜 소식이다. 이제 기업을 넘어 나라 경제조차 일본을 앞지른다니. 고지(高地)가 바로 저기라는 의미 아닌가. 게다가 일본은 여전히 헤매고 있다. 이럴 때 조금만 더 노력하면 추월을 당길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도 ‘제2의 일본’이 돼 가고 있다. 골인 지점까지 다 와서 확 지쳐버린 형국이다. 다른 말로 경제 활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저축-투자 갭의 확대가 방증이다. 10년 전만 해도 투자가 저축보다 더 많거나 저축이 조금 더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저축이 훨씬 많고, 갈수록 그 갭이 더 커지고 있다.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 이유로 세계 경제 침체, 고령화, 가계 및 기업 부채 등이 꼽히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요즘 기업가의 의지와 마인드지 싶다. 성장의 근본 요인은 기업가 정신과 제도라서다. 제도경제학의 설명이 그렇다. 똑같은 자본과 기술을 갖고서도 어떤 나라는 흥하고 어떤 나라는 망한다. 우리가 그랬다. 자본과 기술이 없는 나라가 자본은 빌리고, 기술은 모방해 오늘의 한국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판을 키우려는 의지와 마인드가 부족해졌다. 기업가 정신이 실종됐다는 증거다. 제도경제학에 따르면 그 결과는 저성장이다. 우리도 5년째 연평균 2%대 저성장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예전 기업인이라고 안주(安住)하려는 마음이 없었을까. LG그룹 창업자 구인회 회장은 50년대 초반 크림 화장품과 플라스틱 빗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러자 고민이 됐던 모양이다. “(여기서 멈춰) 실속도 챙기고 행복도 찾는다면 한세상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고쳤다. “갈 데까지 가보자. 그게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씌워진 굴레이자 소명이다”(LG, 『한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 2004년). LG전자를 설립한 배경이다.

 재계는 기업가 정신이 크게 떨어진 건 지나친 정부 규제, 반기업 정서, 기업 하기 나쁜 환경 때문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지만 예전 기업가들은 이보다 더한 악조건이었다는 걸 감안해보면 결정적 이유는 아니다. 믿기 어렵다는 사람들을 위한 퀴즈다.

 75년께 중동 건설 현장을 보고 온 정부 관리들은 다들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에게 중동은 건설을 할 수 없는 나라였다. 땅은 모래와 자갈투성이에 날씨는 너무 더워 일할 수 없고, 비가 오지 않아 공사에 필요한 물이 없었다. 그럼 현대 정주영 회장도 같은 생각을 했을까. 답은 ‘정반대’다. 위험은 기회였다.

 “비가 오지 않는다? 그럼 1년 내내 공사할 수 있다. 모래와 자갈이 많다? 딴 데서 자재를 조달할 필요 없다. 낮에 일할 수 없다? 낮에 자고 밤에 일하자.” 정 회장에게 중동은 건설 최적의 땅이었다. 같은 걸 보는데도 진짜 기업가의 눈은 이렇게 다르다. 다음주(25일)는 정 회장 탄생 100주년이다. 그의 정신이 부활해야 우리가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

김영욱 금융연구원 상근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