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씨 남긴 조흥은행 협상 타결] 파업에 굴복한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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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흥은행 노조 파업이 닷새 만에 극적으로 타결됐지만 이번에도 역시 정부의 원칙 없는 노동정책이 재연됐다.

노사협상의 대상이 아닌 경영권 문제로 파업에 나선 노조를 상대로 사태 해결에만 집착해 이들의 무리한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임으로써 '밀어붙이면 된다'는 식의 잘못된 노사관행을 답습했다는 지적이다.

'법과 원칙'을 내세웠던 정부가 또다시 불법파업과 집단이기주의에 밀리는 바람에 앞으로 줄줄이 예정된 노동계의 하투(夏鬪)와 금융구조조정에도 악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타결 위한 타협=한 금융계 인사는 이번 조흥은행 노조의 파업에 대해 "주주들끼리 거래를 하는 데 노조가 나서서 협상을 하는 것은 국제적인 기준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는 불법 파업을 하는 노조를 상대로 협상에 나섰고, 협상대상이 아니라던 노조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또다시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정부는 조흥은행의 매각이 실패할 경우 은행 민영화라는 금융구조조정의 대전제가 흔들릴 것을 우려해 이달 말까지 이를 처리한다는 입장을 정했다.

조흥은행의 매각 여부가 국가 신용등급 평가의 관건이 된 데다 해외 투자가들도 이를 참여정부 경제정책의 시금석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파업이 계속되면서 전산망 중단과 예금 대량인출 등 금융대란의 가능성이 높아진 데다 노조 측의 반발에 조흥은행의 매각가치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조바심이 커지면서 정부는 협상타결에 더욱 매달렸다.

정부는 협상타결 직후 "어쨌든 조흥은행 매각이라는 구조조정은 이뤄지지 않았느냐"고 밝혔지만 이번 사태에서 보여준 정부의 자세는 '협상 타결에 급급해 원칙을 훼손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정부는 그동안 일관되게 '노조의 경영개입 불가'원칙을 천명해 왔으나 이번 협상에서는 합병시기나 은행장 선임 등 경영권에 관련된 사안을 협상의제로 삼아 노조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21일 심야협상에서도 정부 관계자들은 협상에는 직접 나서지 않았지만 신한지주 측에 경영권 관련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며 신한 측의 양보를 유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구조조정에도 악영향="제대로 팔 능력도 없는 정부와 누가 협상하겠느냐." 한 외국계 증권사 임원은 조흥은행 파업을 지켜보며 "경영진조차 마음대로 선임할 수 없는 인수.합병이라면 앞으로 매각대상으로 나온 정부소유 금융기관을 사겠다는 투자자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 합병은 말 그대로 덩치를 불려 효율성을 높이자는 것으로 불필요한 조직과 인력.시설을 줄여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핵심적인 관건이다.

그러나 이번처럼 합병 시기를 늦추고, 구조조정을 사실상 차단하는 내용을 노조와 합의한 것은 앞으로 금융 구조조정은 물론 국내 기업 간 인수.합병에 두고두고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하반기로 예정된 우리은행과 투신사 등의 매각을 앞두고 노조가 경영권 보장 등을 현안으로 들고 나올 경우 외국투자가들의 투자가 위축되는 것은 물론 민영화 작업 자체가 무산될 우려가 크다.

◆'줄파업'에도 나쁜 선례=파업으로 요구를 관철하려는 노조의 강경노선이 더욱 힘을 얻게 될 전망이다.

국무총리실 관계자는 "대기업이나 공공 분야 노조는 파업을 통해 국가경제에 큰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노사관계에서 마지막 카드가 돼야 할 파업이 오히려 협상을 타결시키기 위한 상시적인 압력수단이 돼 버린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흥은행 파업은 금주부터 이어질 '줄파업'에 적잖은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개별 노조들이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 등 상급단체의 파업일정에 맞춰 파업을 준비하는 경우도 있다. 파업이 너무 성급하고 자주 '활용'된다는 얘기다.

홍병기.김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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