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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70년, 아직도 가야 할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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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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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렬
뉴욕 특파원

지나고 나면 그때 그 말과 행동이 오늘의 상황을 암시했음을 알게 되는 장면이 있다. 지난 9월 말 유엔 총회가 그랬다.

 창설 70주년을 맞는 유엔은 축제 분위기였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등 강대국 정상들이 이례적으로 총출동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방문했다. 지구촌 이슈로 부상한 난민 사태도 해법을 찾을 수 있을 듯싶었다. 하이라이트는 28일이었다. 미국과 러시아·중국 정상이 기조연설에 나섰다. 그런데 말 속엔 가시가 많았다.

 오바마는 강온 양면 화법을 구사했다. 그는 “ 미국과 동맹들을 보호하기를 주저하지 않겠다”면서도 시리아 사태 해결을 위해 러시아·이란과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오바마는 시리아 국민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알아사드 대통령의 퇴진을 강조했다.

 푸틴은 오바마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 그는 “이슬람국가(IS)와 맞서 싸우는 이들은 아사드 대통령의 군대”라며 오히려 아사드 정권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푸틴은 돌연 아랍의 봄 얘기를 꺼냈다. 그는 “중동과 북아프리카 국가들의 권력 진공이 무정부 상태로 이어졌고, 극단주의자들과 테러리스트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며 “누가 이런 상황을 초래했나”고 반문했다. 아랍 민주화를 지원한 서방의 책임을 묻는 비난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됐다. 정확히 이틀 뒤 러시아는 시리아 공습을 시작했다. 러시아는 테러리스트 거점을 타격했다고 했지만 미국에선 시리아 반군 장악 지역이라고 반박했다. 이후 계속된 공습으로 시리아는 더 피폐해지고 있다.

 미·중 간 남중국해 갈등도 감지됐다. 오바마는 남중국해를 거론하며 항해와 교역의 자유를 지키겠노라고 선언했다. 시진핑은 “주요국들은 무충돌, 무대치, 상호존중 원칙을 따라야 한다. 중국은 결코 헤게모니와 팽창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른 논점, 다른 이야기였다. 이날 세 정상들은 자신의 연설만 하고 자리를 떴다. 다른 정상의 연설을 경청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실망과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정상들에 앞서 연설을 했다. 수위가 높았다. 그는 “글로벌 인도주의 시스템이 망가졌다”며 안타까움을 표출했다. 특히 “안전보장이사회가 외교적으로 마비된 지난 4년간 시리아 위기가 통제 불능이 됐다”고 작심한 듯 안보리를 비판했다.

 돌이켜보면 이날의 기조연설은 유엔의 한계가 또렷하게 드러난 자리였다. 창설 70주년의 감격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세월 유엔이 거둔 성과는 결코 작지 않다. 지금도 약소국 국민들에게 유엔은 축복이다. 빈곤선 아래에 있는 약 1억 명이 유엔에서 식량을 제공받고, 6000만 명의 난민이 유엔의 보호를 받는다. 반 총장은 “유엔이 없었더라면 우리 세계는 훨씬 더 암울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얘기다. 다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이상렬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