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클립 하나 만년필 하나에도 놀라운 역사가 숨어 있었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50호 32면

저자: 제임스 워드 역자: 김병화 출판사: 어크로스 가격: 1만6000원

지금 앉아있는 책상 위를 보자. 무엇이 보이는가. 왼쪽에는 각종 핀이 들어있는 작은 플라스틱 함, 오른쪽엔 연필·볼펜·만년필이 들어있는 필통. 뭐, 가운데엔 잉크병과 깃털이 달린 근사한 옛날식 펜이 하나쯤 놓여있을 수도 있겠다.


그중 하나, 예를 들어 클립을 하나 집어들고 유심히 살펴보라. 그리고 생각해보라. 도대체 누가, 어떻게, 이 작은 물건을 만들어냈을까. 그것도 하필 이런 모양으로.


문구류 매니어인 영국인 제임스 워드는 책을 펼친 우리에게 책상 위 작은 물건 하나하나에 얼마나 커다란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지 자분자분 들려준다. 사물의 생성 과정부터 제작에 얽힌 비화, 당시 시대상과 경쟁사의 대응에 이르기까지 시공을 초월하는 그의 이야기는 전혀 지루하지 않다. 파리의 한 문구점에서 팔던 고무줄 달린 모눈종이 공책 ‘카르네 몰스킨’이 어떻게 “빈센트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지며 세계적인 명품이 됐는지, 노트를 구성하는 종이는 중국의 채륜이 만들었다고 알려져 왔지만 2006년 중국 간쑤 지방에서는 이보다 100년 앞서는 종이가 발견됐다는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1945년 10월 잉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불량품을 “미국 최초의 볼펜”이라며 시장에 허겁지겁 내놓은 미국 사업가 밀턴 레이놀즈의 전략도 흥미롭다. 개당 12달러 50센트(현재 시가 160달러·약 18만원)나 되는 어마어마한 가격에도 석 달 만에 100만 자루가 넘게 팔린 현상에 대해 레이놀즈는 “난 그 펜이 1945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판매된다면 성공하리라 확신했다”고 말한다. 전쟁 직후 뭔가 놀랄 만한 것을 원하고 갖고 싶어한 대중들의 심리를 노린 전략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알고 있는 흥미진진한 비화가 사실은 거짓말이라는 과감한 폭로(?)도 서슴지 않는다. 이를테면 보험 영업사원이었던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이 최초의 만년필을 선보인 이유가 계약서에 서명하다가 펜에서 잉크가 번져 고객을 놓쳤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빈티지펜스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데이비드 니시무라의 조사에 따르면 워터맨 펜 회사의 기원에 대해 상세하게 실린 사보 1904년판에는 이런 내용이 없고 워터맨이 죽은 20년 후인 1921년 이전에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주에서 쓸 수 있는 펜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돈을 들인 미항공우주국(NASA)과 그냥 연필을 썼다는 러시아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65년 발사된 제미니 3호 승무원들은 연필을 가져갔다. 하지만 연필심은 걸핏하면 부러지기에 민감한 기기에 해를 끼칠 수 있고 우주인들의 눈을 찌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주 펜 개발에 실제로 돈을 쓴 사람은 NASA가 아니라 따로 있었으니, ‘우주용’이라는 수식어를 얻기 위해 직접 만든 볼펜으로 NASA의 필기구 테스트를 모두 통과한 발명가 폴 피셔가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이 책의 미덕은 시시콜콜한 정보를 정리한 데 있지 않다. 저자가 애정하는 건 책상을 구성하고 있는 문구류라는 세상 전체다. 작은 것 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거대한 전설을 만들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책상 위를 다시 한번 볼 필요가 있다. 압정 하나부터 스테이플러나 포스트잇의 모습이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일 테니.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