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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가 검정교과서를 만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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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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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탁
정치국제부문 차장

지난 12일 교육부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 고시를 발표한 후 열흘이 지났다. 그동안 현행 교과서에 어떤 문제점이 있고,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에 대한 차분한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정치 쟁점으로 번지면서 날 선 공방만 난무한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가 선대의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려는 것”(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아이들에게 김일성 주체사상을 미화하는 교육을 시키는 건 역적 행위”(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등 여야 지도부도 극단적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야당은 내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서도 이 이슈를 꺼내겠다고 예고했다.

 지금 상태라면 기존 역사 교과서를 보완하고 미래지향적 가치를 담은 고품격 교과서가 나올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보수·진보 진영 간 견해 차이는 차치하더라도 전국 대학의 역사학 관련 교수들이 잇따라 국정교과서 집필 거부를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22일 서울대 역사학 관련 교수 36명은 집필 거부를 넘어 국정화 강행 시 ‘대안적 역사 교재’를 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양질의 콘텐트가 담긴 교과서를 위해선 실력과 균형감을 겸비한 학자들의 참여가 필수적인데, 이념 공방의 장에선 필진으로 나서기가 여의치 않다.

 역사 교과서 문제가 기왕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면 꼬인 매듭도 정치의 방식으로 풀면 좋겠다. 여야 협상에서 한쪽이 독식(獨食)하는 경우는 드물다. 역사 교과서 문제도 ‘단일 국정교과서’만 강조하는 정부·여당과 ‘국정화 반대’만 외치는 야당이 절충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대안을 모색할 때 기준은 진영 논리가 아니라 제대로 된 역사 교과서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맞춰야 한다.

 정부가 국사편찬위원회에 국정교과서 발행을 맡기는 게 아니라 국사편찬위가 검정 역사 교과서를 발행해 민간과 경쟁토록 하는 방안을 논의해 봤으면 한다. 국정화 반대 여론 중에는 “한 종의 국정교과서는 국가가 역사 해석을 독점하는 것”이란 우려가 반영돼 있다. 이를 해소하면서 정부가 장담하듯 고품질 교과서의 표본을 선보이자는 얘기다. 검정교과서라면 수준 높은 학자들의 집필 참여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국사편찬위 발행 검정교과서가 확연히 뛰어날 경우 민간 출판사의 교과서까지 개선되는 효과를 견인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신 야당과 진보 진영은 학교에서 역사 교과서를 채택하는 자율권을 확실히 보장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여당과 머리를 맞대야 한다. 2013년 고교 한국사 교학사 교과서가 나왔을 때 진보진영은 친일 등 민감한 소재와 관련한 일부 부적절한 표현을 대대적으로 부각했다. 해당 교과서를 사용하려던 고교의 명단이 인터넷에 유포되고 해당 학교에 항의가 빗발치면서 ‘채택률 0%’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김무성 대표가 “논리적으로는 검증을 강화하고 수정해 가르치는 게 맞지만 좌파의 사슬이 강해 어쩔 수 없이 국정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은 교학사 교과서 때의 경험 때문이다. 정부의 국정화 확정 고시까지 열흘 남았다. 정치권의 정치력을 기대한다.

김성탁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