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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알록달록 숲은 변함없어도, 내년 가을엔 좀 낯설지 않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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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령 삼거리까지는 험준한 산길이 이어지지만, 탐방로 곳곳이 단풍이어서 눈이 즐겁다.

단풍 ‘놀이’라는 표현은 설악산하고 어울리지 않았다. 험하고 지루했다. 그래도 설악산 끝청∼오색 구간의 단풍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국립공원 대피소에서 생애 첫 밤을 보낸 젊은 여행기자의 1박2일 산행기를 중계한다.

케이블카 놓일 끝청~오색 둘러보니

설악산의 어느 마지막 가을

설악산은 어느 탐방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산이 된다. 울산바위·백담사 등 탐방로마다 숨겨둔 명소가 수두룩하고, 코스 난이도도 제각각이다. 권금성(860m)처럼 케이블카를 타고 쉬 닿을 수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공룡능선처럼 당일 여정은 엄두도 못 내는 코스도 있다.

week& 은 한계령에서 대청봉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계령휴게소를 출발해 서북능선을 따라 대청봉을 오르고, 설악폭포를 지나 오색리 탐방지원센터로 내려왔다. 사실 한계령∼끝청∼대청봉∼오색리는 대중적인 대청봉 등반 코스 중의 하나지만, 설악산을 대표하는 가을 코스라고 할 수는 없다. 솔직히 천불동계곡이나 흘림골 쪽이 단풍은 더 곱다. 산행 자체의 재미도 공룡능선 종주에 비하면 미지근하다.

그러나 올가을만큼은 끝청(1610m)을 올라야 했다. 한계령에서 올라 오색으로 내려와야 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끝청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가을 풍경을 마주해야 했다. 끝청의 단풍이 화려해서가 아니다. 이번 가을 끝청의 풍경은 내년 가을의 풍경과 사뭇 달라질 터이기 때문이다.

끝청은 한계령과 대청봉 사이에 있는 봉우리다. 이웃한 두 봉우리보다 이름은 덜하지만,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다. 권금성에 이어 또 하나의 케이블카가 놓일 자리가 끝청 정상에서 130m 아래에 있다. 강원도·양양군이 추진하는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 사업은 지난 8월 국립공원위원회로부터 조건부 승인을 받았다. 이르면 내년 6월 오색에서 끝청 하단을 잇는 3.5㎞ 길이의 케이블카 공사가 시작된다.

끝청으로 가려면 우선 서북능선에 들어야 했다. 한계령휴게소에서 시작한 탐방로는 곧장 가파른 계단길로 이어졌다. 단풍 그늘 돌산길을 2시간 남짓 올라 한계령 삼거리에 닿았다. 갈림길에서 대청봉 쪽으로 방향을 틀자 비로소 서북능선의 등줄기였다. 탐방센터에서 얻은 안내지도는 서북능선 코스의 탐방 난이도가 ‘어려움’이라고 표시했지만, 실제로는 그리 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서북능선은 양 옆이 훤히 열린 구간이 많아서 산세를 둘러보며 쉬엄쉬엄 걸을 수 있었다. 난이도는 서북능선 중반부터 갑자기 치솟았다. 거친 바위를 계단 삼아 올라야 하는 독한 산행이 이어졌다. 동행한 백창우 설악산 국립공원 재난구조대원의 ‘희망 고문’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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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청에서 내려다본 봉정암의 모습. 오색케이블카 상부 정류장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는 풍경이다.

 “절경이 코앞이에요. 이 고비만 넘으면 진짜 설악이 나와요.”

마침내 끝청이었다. 사방이 트인 끝청에선 북쪽 방향으로 공룡능선과 중청, 그리고 대청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과연 설악의 풍경이었다. 그에 비하면 남쪽 오색 방향은 다소 심심했다. 날렵한 능선과 뾰족한 암봉이 겹겹이 층을 이룬 북쪽과 달리, 남쪽은 고만고만한 봉우리가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케이블카 상부 정류장이 될 끝청 하단의 봉우리는 오색 단풍으로 빈틈이 없었다. 이 현란한 숲 위로 케이블카가 오르내리는 장면이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끝청에 올라서 보니 환경단체의 주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끝청보다 130m 낮은 곳에 들어설 케이블카 정류장에서는 지금과 같은 조망을 확보하기 힘들어 보였다. 박그림 설악녹색연합 대표도 “케이블카가 들어서는 자리에서는 서북능선과 끝청 봉우리에 가려 설악의 경관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양양군은 끝청 정류장에 2층 높이의 전망대를 세울 것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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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내려앉은 대청봉. 중청대피소에서 정상으로 오르며 단풍을 만끽할 수 있다.

끝청에서 약 40분을 더 올라 대청봉 아래 중청대피소(1595m)에 도착했다. 어느덧 해는 저물었고, 대피소에는 함께 하룻밤을 보낼 동지만 남아 있었다. 간단한 음식을 가운데 놓고 조촐한 저녁 자리가 벌어졌다. 화제는 자연스레 케이블카 이야기로 흘렀다. 누군가 “정상 문턱이 낮아지면, 산의 존엄성을 모르는 날라리 등산객만 늘어날 것”이라고 혀를 차자, 다른 누군가는 “노부모 모시고 온 가족이 부담 없이 설악산을 구경할 수 있겠다”고 맞섰다.

단풍 숲 우거진 오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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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 코스로 내려오는 길. 단풍으로 울긋불긋하다.

생전 처음 국립공원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말하자면 대피소는 지극히 친환경적인 숙소이자 지극히 열악한 숙소였다. 중청대피소는 물 사정이 좋지 않아 씻기는커녕 식수도 부족했다. 화장실도 물이 필요 없는 재래식 변기여서 냄새가 고약했다. 침실도 아찔했다. 중청대피소의 수용 인원은 115명인데, 침실은 2개뿐이었다. 단풍 시즌이라 대피소는 만원이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 50여 명이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누워 경쟁하듯이 잠을 잤다. 코 고는 소리와 땀 냄새가 온 방에 진동했다.

이튿날 새벽 어둑어둑한 능선을 따라 대청봉에 올랐다. 오전 6시 25분 대청봉 일출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주 맑은 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구름 위로 솟아오르는 해를 볼 수 있었다. 해가 나자 설악산의 오장육부가 훤히 드러났다. 시시각각 움직이는 햇볕을 따라 단풍도 춤을 췄다.

대청에서 일출을 감상하고, 오색약수 쪽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오색 코스로 내려오는 길은 대청봉에서 바로 이어졌다. 시작부터 가파른 돌계단이었다. 당장에라도 케이블카를 잡아타고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케이블카가 개통해도 탐방객은 케이블카를 탈 수 없다. 케이블카 탑승객 역시 탐방로를 입장할 수 없다. 국립공원 케이블카는 기존 등산로와 연계를 막는 것이 기본 원칙이기 때문이다. 탐방객 증가로 인한 환경 훼손을 막기 위해서다. 현재 계획에 따르면 케이블카 탐방객은 정류장에서 130m 위에 있는 끝청에 오르는 것도 금지된다. 설악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설악산을 관람하는 것으로 탐방 문화가 바뀌는 셈이다.

이 대목에서 환경단체가 반발한다. 환경단체는 끝청 정류장에서 끝청은 물론이고 대청도 거리가 멀지 않아 탐방객의 탐방 욕구를 막아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한다. 끝청 정류장에서 대청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1.4㎞ 떨어져 있다. 오구균 호남대 조경학과 교수는 “덕유산 국립공원 케이블카와 경남 밀양의 얼음골 케이블카도 원래 계획과 달리 승강장과 등산로의 연계를 막아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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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 코스는 계곡을 따라 걷는 길이다. 바위가 거칠어 힘든 코스다.

하산 루트로 잡은 오색 코스는 대청봉에서 설악폭포를 지나 양양군 오색리로 이어지는 5㎞ 길이의 탐방로다. 이 코스는 험준하기는 해도, 대청봉으로 통하는 가장 빠른 길로 통한다. 경사 급한 돌계단을 따라 꼬박 4시간을 오르면 대청봉에 다다를 수 있다. 반대로 하산길은 지루한 돌계단을 3시간 내려와야 한다.

케이블카가 들어서면 현재의 오색 코스에도 변화가 생길 예정이다. 탐방로는 달라지지 않지만, 지금과 달리 아무나 드나들 수 없게 된다. 케이블카가 설치되면 오색 코스에 탐방 예약제가 실시될 계획이다. 현재 국립공원에서 탐방 예약제를 시행하는 곳은 지리산 노고단 정상부와 칠선계곡뿐이다. 양양군은 탐방 예약제로 오색 코스의 성수기 탐방객이 60% 가량 줄어들 것으로 예측했다.

케이블카 노선은 오색과 끝청을 직선으로 잇는다. 8인승 케이블카 53대가 이 줄을 따라 부지런히 사람을 실어나를 것이다. 케이블카를 타면 불과 15분 만에, 전혀 힘들이지 않고 해발 1480m 높이의 끝청 정류장까지 단박에 올라갈 수 있다. 케이블카가 통과하는 지역은 산양·삵 등 멸종위기종 야생동물이 살고, 분비나무·만병초 등 아고산대(해발 1500∼2000m 지대) 식생 군락지로 알려져 있다.

오색 코스는 지루하고 험했다. 줄기차게 돌계단이 이어졌고, 설악폭포 말고는 트인 풍경도 없었다. 그나마 우거진 숲이어서 단풍 그늘을 걷는 호사를 누린 것이 다행이었다. 사진을 찍으며 걷느라 5시간 만에 오색리로 내려왔다. 케이블카 이동시간 15분을 생각하면 손해 보는 장사였지만,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도 시뻘건 단풍은 자꾸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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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정보= 대청봉 정상 산행은 녹록지 않다. 대청봉 등산 코스 중 거리가 가장 짧은 오색 코스(왕복 10㎞)를 택해도 족히 8시간이 필요하다. week&이 오른 한계령 휴게소∼서북능선∼대청봉∼설악폭포∼오색(남설악탐방지원센터) 코스는 13.3㎞ 거리로, 10시간 가량 걸린다. 일부 산악회가 당일 여정으로 다녀오기도 하지만, 중청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묵는 여정이 현명하다. 대청봉에서 20분 거리에 중청대피소가 있다. 1박 8000원. 국립공원 홈페이지(reservation.knps.or.kr)에서만 예약할 수 있다. 가파른 언덕과 돌계단이 많기 때문에 등산화와 스틱을 챙기는 것이 좋다. 033-636-7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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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오색 짙어지니, 사색 깊어지네

글=백종현 기자 jam1979@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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