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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칠놀이·필사·점잇기·나노블록 … “몰입하면 마음이 편해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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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밑그림을 따라 뾰족한 펜으로 종이를 긁어내 도시 야경을 그리는 스크래치 나이트뷰. 먹지에 이쑤시개 등으로 그림을 그리던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사진 라고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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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만에 벌써 세 권째 칠하고 있어.”

[?뉴스 속으로] 손의 재발견

 회사원인 친구 A가 말했다. 미술엔 통 관심이 없는 친구였는데 늦바람이 분 건지 몇 달 전부터 색칠하기 놀이에 빠졌다. 잡념이 생기거나 스트레스가 쌓일 때는 이만 한 놀잇감이 없다는 게 A의 이야기였다. 며칠 뒤 서울 시내 한 카페에서 아는 동생 B와 마주쳤다. B는 혼자 카페에 앉아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작은 레고 블록으로 아이언맨을 맞추는 중이었다. B는 한바탕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더니 중얼거렸다.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났네.”

 긴장과 불안. 현대인을 괴롭히는 이 두 가지 감정에 대해 정신과 전문의들은 “가만히 있을수록 꼬리에 꼬리를 물고 증폭되거나 강화되는 감정”이라고 진단한다. 그래서 요즘 인기 있는 취미 활동들은 두 감정을 약화시키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대표적인 게 지난해 8월 국내에 처음 소개된 ‘어른들의 색칠놀이’ 컬러링북이다. 나오자마자 ‘안티 스트레스(Anti-stress)’ 취미 활동으로 입소문을 타 수많은 국내 독자를 포섭했다. 열기는 현재까지 이어져 교보문고 예술 분야 서적 베스트셀러 10권 중 7권이 컬러링북일 정도다.

 그 열기는 색칠하기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다양한 취미 활동들을 낳았다. 명시나 고전 등을 받아 적는 필사책은 올해에만 『마음 필사』 등 30권 넘게 출간됐고 명화를 직접 그려보는 미술 DIY 제품도 인기다. 밑그림이 그려져 있는 검은색 먹지를 전용 펜으로 긁어내 도시의 야경을 완성하는 ‘스크래치 나이트 뷰’, 촘촘히 박혀 있는 점선을 순서대로 따라가다 보면 그림이 저절로 그려지는 ‘점 잇기(dot to dot)’ 책도 나왔다. 작은 블록들을 조립하는 ‘나노 블록’은 문구점뿐 아니라 지하철 가판대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최근에는 하고 싶은 낙서를 책에 마음껏 하는 ‘낙서 책’까지 등장했다.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이런 취미들은 ‘리추얼(ritual·반복적인 행동 패턴)’이라는, 이미 정해져 있는 특정 일을 반복해 목표를 성취한다는 점과 어린 시절에 하는 놀이와 유사하다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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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블록은 작은 블록 여러 개를 조립해 만든다. 도날드덕과 그의 여자친구 데이지덕.

 최근의 여러 취미 활동 행위를 관통하는 건 바로 ‘손’이다. 한 서점 관계자는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스마트폰 터치를 하는 게 고작이던 현대인들이 좀 더 아날로그적인 손 운동 거리를 찾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모니터 속 만질 수 없는 무언가가 아닌, 직접 손으로 느끼고 완성할 수 있는 취미 수단을 찾아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날로그 ‘손 운동’이 주는 안티 스트레스 효과는 정말 실재할까. 일본 뇌과학계의 원로인 구보타 기소 교토대 명예교수는 그의 책 『손과 뇌』에서 손을 ‘외부의 뇌’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손으로 하는 단순한 반복이 일정한 리듬으로 신경계를 활성화시켜 정신의 안정이 유지된다”고 설명한다. 주의력 집중 장애나 불안 장애 등을 겪는 사람이 손을 자꾸 움직이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사람이 불안을 느낄 때 뇌의 변연계가 활성화되는데 손을 움직이게 되면 자극이 뇌의 두정엽 등 다른 쪽으로 쏠려 불안을 잠재운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뇌 활동의 균형을 맞춰주는 셈이다. 이때 가장 원초적으로 나오는 버릇이 바로 ‘손톱 물어뜯기’다.

 방승호(55) 아현산업정보고 교장은 7년째 아침저녁으로 필사를 한다. 방 교장은 “보통 A4 용지 한 장 쓰는 데 15~20분이 걸린다. 그 행위가 반복되면 어느새 몰입이 되고 마음이 평화로워진다”며 “그 글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방 교장의 사례처럼 이런 취미를 즐기는 이들은 ‘몰입을 통한 마음의 안정’을 추구한다. 실제로 안티 스트레스의 원조 격인 컬러링북은 본고장인 영국보다 항우울제 복용률이 높은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끌며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사례가 있다. 스크래치 나이트 뷰를 처음 개발한 국내 업체 ‘라고 디자인’의 정호영 부대표는 “검은색 종이를 펜으로 사각사각 긁고 있으면 손에 오는 감촉이 마치 복권을 긁는 것처럼 부드럽고 마음은 편안해진다”며 “여기에 한 작품이 완성됐을 때 주는 만족감이 더해져 많은 사람이 찾는 것 같다”고 말했다.

 색채가 주는 자극도 우울한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 이나미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우리 눈에 흑백만을 보여주는 건 일종의 징벌”이라며 “감옥에 갇힌 수감자들이 식물 하나에 희망을 느끼는 것처럼 다채로운 색감이 주는 치유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모래놀이를 시키거나 물감을 쥐여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손가락으로 모래에 그림을 그리고 물감을 뿌리며 놀듯, 옷을 입고 음식을 만들 때 자연스럽게 색의 조화를 추구하듯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이미지·색·조형 등을 갈구하는 본능이 있다. 그것이 골고루 만족될 때 사람의 정서도 두루 발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안티 스트레스 취미 행렬에 기자도 동참했다. 180블록으로 구성된 디즈니 캐릭터 도널드덕 나노블록과 컬러링북, 그리고 24색 색연필도 구입했다. 조각조각 나 있는 블록들과 밑그림이 그려진 책의 첫 장을 보자 한숨부터 나왔다. 마음을 비우고 차분하게 하나씩 하나씩 해보기로 했다. 설명서가 알려주는 대로 블록을 맞춰봤다. 지지부진하던 블록 맞추기가 도널드덕의 얼굴이 나타나자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완성. 알 수 없는 성취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2시간이 후딱 지나가 있었다. 색연필로 컬러링북의 밑그림을 채울 때도 하는 행위는 다르지만 느낌은 비슷했다. 정해진 공간에 색을 칠했을 뿐이지만 ‘마이너스의 손’으로 불릴 만큼 손재주가 없는 기자도 그럴듯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손으로 칠하고, 조립하고, 긁고, 점을 잇고…. 일련의 행위들을 직접 따라 해 본 결과 그 몰입 효과는 상당했다. 하지만 오래 붙들고 있다 보니 눈과 목이 쉽게 피로해졌다. 전홍진 교수는 “지나치게 집중하면 몸의 긴장이 오히려 증가하고 완성하는 데까지 걸리는 긴 시간이 도리어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도 있다”며 “한 가지만 하는 것보다 여러 가지를 바꿔가며 해보거나 혼자보다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하는 것이 ‘힐링’에는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런 취미들을 통해 무언가에 집중하는 행위를 소위 ‘멍 때리는’ 행위와 동일시하는 분석도 있다. 멍하니 있을 때 우리 뇌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라는 특정 부위가 활성화된다. 이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는 뇌가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뇌의 충전 역할을 하는 건데 지난해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일부러 ‘멍 때리기’ 대회가 열렸을 정도로 현대인들에겐 충전의 시간이 부족하다. 윤대현 서울대 정신의학과 교수는 “색칠 하기든 점 잇기든 큰 생각을 하지 않고도 쉽게 집중할 수 있어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자꾸 찾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효과는 차치하고, 솔직히 이런 취미들이 대유행하는 사회가 썩 건강해 보이진 않네요.” 취재 도중 불쑥 튀어나온 한 정신과 전문의의 대답이 어딘지 뼈아프게 들려왔다.

[S BOX] 손글씨 ‘캘리그래피’도 인기 … “익숙하면서 낯선 매력”

매일 쓰는 손글씨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지난해부터 자신만의 독특한 손글씨를 배우는 ‘캘리그래피(Calligraphy)’가 인기다. 캘리그라피는 아름다운 서체란 뜻을 지닌 그리스어 ‘Kalligraphia’에서 유래한 말이다. Calli는 미(美), Graphy는 화풍·서풍·서법·기록법 등을 뜻한다. 개성 있는 문자 표현이 매력적인 캘리그래피는 영화 포스터나 광고, 책 표지 등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

주부 이유정(28)씨는 2년 전 산후우울증을 겪다가 취미로 캘리그래피를 선택했다. 다양한 필기구를 이용해 만들어진 자신의 글씨를 보며 묘한 활력을 느꼈다. 이씨는 “책을 보면서 독학으로 취미 삼아 배워봤는데 점점 나만의 필체를 찾아가는 재미가 있어 조만간 자격증 시험에도 도전해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캘리그래피는 2000년대 초반 국내에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일반인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건 2010년 이후다. 인스타그램이 발표한 올해 상반기 가장 인기 있었던 해시태그도 ‘#캘리그래피’였다. 많은 이용자가 저마다 개성을 살린 캘리그래피 게시물에 ‘#손글씨’나 ‘#캘리그래피’ 해시태그를 달아 지인들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한 전문가는 “목적을 전하는 수단으로만 비슷비슷한 글자를 타이핑하는 게 일상화한 지금, 손글씨는 사람들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매력을 느끼게 한다”고 말했다.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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