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선 2035

미안하다는 말 대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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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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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미
JTBC 사회부문 기자

“사실 우리가 미안하지.” 취재원과의 저녁자리에서 원치 않는 고백을 들었다. 50대 후반의 A씨는 한 기업의 임원이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지금의 회사에 입사해 줄곧 승승장구했다. 그는 “그때는 뭘 해도 되던 때라 낭만이 있었다”고 입을 뗐다. 다섯 명 남짓한 저녁 자리에는 A씨를 모시는 직원 두 명과 젊은 기자 두 명이 함께했다. A씨를 빼고는 모두 30대였다.

 사과의 변(辯)은 이랬다. 그가 말하는 낭만이란 건 요즘으로 치면 뉴스에 나올 만한 일들이었다. 대학 졸업 후 합격한 회사 비교해 골라가기, 업무시간 중 낮술 한잔하고 사우나 가기, 회사 돈으로 호화 출장 가기, 접대를 이유로 술집에서 기분 내기 등. 그는 최선을 다해 매일을 사는데도 이런 ‘낭만’을 누리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결론은 이상한 쪽으로 흘렀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응원한다던 그는 2차를 권했다. 맛난 음식과 흥겨운 음악으로 우리를 응원하겠다는 거였다. 결국 술이 거나하게 취해 각자 ‘노래방 18번’을 몇 곡씩 뽑아낸 뒤에야 자리는 끝이 났다. 12시가 넘은 귀갓길, 나는 "힘든 세상을 물려줘 미안하다”는 그의 말을 되새겼다.

 요즘 청년들은 사과받는 게 일이다. “노동개혁을 통한 청년 일자리 창출을 하는 데 국회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어 청년들에게 미안하다”는 정치인, “귀하와 같은 인재를 채용하지 못해 안타깝고 미안하다”는 기업이 차고 넘친다. 하지만 결국 (미안하지만) 일자리보다 좌우 이념이 당장 아프고, (미안하지만) 기업이 잘돼야 나라가 잘된다는 옛날 논리다.

 진짜 미안하면 변할 일이다. 국정교과서의 이념보다는 일자리 정책을 놓고 싸우고, 사내유보금보다 투자나 고용을 늘리면 될 일이다. A씨도 마찬가지다. 회사 돈으로 호화 출장 못 보내줘 미안하다면, 날 바뀌기 전에 집에 보내주면 된다. 업무시간에 놀게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면, 업무시간 아닐 땐 제발 마음 편하게 놀게 해주시면 좋겠다. 힘들 때 "나 때는 더 힘들었다”는 독한 말보단 연륜이 묻어나는 삶의 지혜가 훨씬 고맙다.

 한때 연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말이 있다. “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거야.(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 영화 ‘러브스토리’에 나오는 대사다. 해석하기에 따라 “사랑한다면 미안한 일을 만들지 않는 거야”라는 말도 된다. 부디 이 시대의 아픔과 낭만에 따라 변해주시라. 그 흔한 미안하다는 말 대신.

김혜미 JTBC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