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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 시간 품은 공간… 책의 영혼 노니는 ‘천국의 서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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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호 26면

1 800년 세월을 수장하고 있는 마스트리히트의?장엄한 도미니카넌서점.

주소 Boekhandel Dominicanen Dominicanerkerkstraat 1 6211CZ Maastricht전화 31(0)43 4100 010 www.boekhandeldominicanen.nl

책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 피어 있는 인간정신의 꽃이다. 서점은 인간정신의 꽃들이 어깨동무하면서 군무(群舞)하는 열린 공간이다.


1294년에 지어진 도미니크파의 고딕교회가 서점이 되었다. 높이 25m, 가로 25m, 세로 40m의 장대한 공간이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찬란한 햇빛이 쏟아진다. 인간정신의 꽃들이 경이로운 자태로 다시 탄생한다. 책을 사랑하는 세계인들은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마스트리흐트의 보석같이 영롱한 도미니카넌서점에서 고독한 영혼을 치유받을 수 있다. 도미니카넌은 네덜란드어로 도미니크 수도회의 교회를 뜻한다.


책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도미니카넌서점에서 나는 나에게 물었다. 나의 삶을 성찰해 보았다. 정의가 무엇인가를 큰 소리로 말하기보다 스스로 정의롭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이 문득 떠올랐다.


책 만드는 일이란 무엇인가. 저 이방인의 고독과 슬픔을 생각해야 한다. 저 변방에 내팽개쳐진 삶의 고단함과 고통을 담아내야 한다. 사람들의 가슴에 시혼(詩魂)을 심어주는 책이라야 한다.


800년 세월을 소장하고 있는 도미니카넌서점. 그 오랜 세월의 공간에 꽃피어 있는 책들은 필연코 시적(詩的)일 것이다. 그 세월은 끝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책들이 나에게 시를 읽어주었다. 이야기를 걸어왔다. 책들의 합창, 나의 가슴을 울리는 음향이었다.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황홀한 빛을 온몸으로 받는 책의 숲은 지상의 오로라였다.


고전이다! 나는 도미니카넌서점은 고전이라는 생각을 불현듯 했다. 위대한 고전은 내 마음의 저 깊은 곳에 존재하는 슬픔을 견인해내고 그 슬픔을 승화시킬 것이다. 무한한 세월을 인고해내는 고전이란 그 세월처럼 슬픔일 것이다. 플라톤이 그렇고 지브란이 그렇고 함석헌이 그렇다. 우리의 눈을 슬픔에 젖게 하기에 고전이다. 그 슬픔이 우리의 삶을 일으켜 세운다. 2008년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도미니카넌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라고 찬탄했다. 2011년 여름 도미니카넌을 찾아간 나에겐 충격이었다. 오늘도 나는 도미니카넌을 꿈꾼다.


애플도 탐냈던 매력적인 공간책을 극상으로 예우하는 도미니카넌서점은 2015년 여름 다시 찾아간 나를 편안한 친구로 맞아주었다. 찬란한 빛 속으로, 책의 숲 속으로 나는 뛰어들고 말았다.


벨기에와 독일의 빛깔을 띠는 인구 12만 5000의 고도 마스트리흐트. 2011년 독일의 뒤셀도르프에서 승용차로 두 시간 정도 달려 도착했다. 이번에는 파리에서 네 시간을 달렸다. 벨기에에서는 전차를 타고 네덜란드 국경을 넘으면 바로 마스트리흐트 역에 도착할 수 있다.


마스트리흐트의 응접실 프레이트호프 거리. 그 한구석에 자리 잡은 도미니카넌서점은 파란만장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고딕건물이지만, 1794년 네덜란드를 침공한 나폴레옹의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도미니크파가 퇴출당하면서 교회로서의 역할을 마감했다.


프랑스 침략군의 마구간이 되었고 물품 보관창고가 되었다. 복싱 시합장으로, 자전거 보관소로, 자동차 전시장으로, 소방서 장비 보관소로 사용되었다. 운전면허 필기 시험장이 되었고 여자핸드볼 경기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시신 보관소가 되었지만 한때 콘서트홀로도 사용되었다. 마스트리흐트 청소년들이 ‘키스 댄스’를 하면서 나름 이성에 눈뜨는 카니발의 공간이 되었다.


마침내 2004년 12월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네덜란드 최대의 서점 체인 셀렉시스가 이곳에 서점을 열었다. ‘도미니카넌 셀렉시스’라고 이름 붙였다. 도미니크 교회 공간의 새로운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애플 같은 대기업이 탐내는 공간이었지만, 교회 소유권을 가진 마스트리흐트 교구는 이곳에 서점을 개설하겠다는 셀렉시스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단 교회 안에 설치하는 서점 시설은 손쉽게 철수할 수 있어야 하고 교회의 그 어떤 시설도 파손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 교회는 건축 이래 한 번도 화재 같은 것으로 손상되지 않고 온존해 왔다. 건물 천장 위에 있는 2m 높이의 다락 나무서까래도 파손되지 않았다. 이 역사적인 건물을 서점으로 바꾸는 디자인을 맡은 암스테르담의 건축사무소 메르크스+히로트(Merkx+Girod)는 검은색 철재를 수직으로 세워 거대한 3층 서가를 만들었다. 서가는 물론 벽과 천장에 닿지 않도록 일정한 간격을 두게 했다. 1층에서 2, 3층으로 오르는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집 안의 집이 된 것이다. 일종의 가건물이지만 공간의 역사성을 존중함으로써 석재라는 클래식과 철재라는 현대가 잘 조화되는 설계솜씨를 발휘했다.

2 저 옛날 제단으로 쓰인 공간이 지금은 카페가 되었다.

카페에선 수사들의 기도소리 들리는 듯도미니카넌서점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순간 경외감에 사로잡힌다. 목소리를 낮춘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엄숙해진다. 고딕건축의 견고한 벽체와 천장,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돌기둥들, 1층 테이블에 놓여 있는 책과 1·2·3층의 검은 철제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의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서점에 들어선 사람들은 무심코 계단을 오른다. 걸어 올라가는 서가다. 책의 하늘로 다가선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지상에도 책들의 꽃이 만발하고, 하늘에도 책들의 꽃이 별무리가 되는 경이로움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성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애를 그린 천장 벽화가 시선을 끈다. 복원하기 쉽지 않은 석회벽의 그림을 잘 복원하여 사람들을 경근(敬謹)하게 한다. 천사들이 연주하는 모습을 그린 천장화도 복원되었다. 천사들이 평화로운 눈빛으로 방문자들을 내려다 본다.


옛것과 새것이 하나되는 도미니카넌서점의 가장 드라마틱한 사이트는 저 옛날 제단으로 사용된 중앙의 카페 공간이다. 십자가 모양의 긴 테이블이 놓여 있다. 까마득하게 높은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투영되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사람들은 커피를 마신다. 바리스타가 내리는 커피향이 제례 때 피워놓던 향으로 느껴진다. 책을 펼치는 독자들은 저 옛날 수사들의 기도 소리가 귓가에 낭랑해짐을 체험할 것이다. 카페 공간의 둥근 벽에는 주기적으로 미술작품들이 전시된다. 커피맛이 깊어진다. 도미니카넌서점의 리노베이션 설계로 메르크스+히로트는 2007년 렌스벨트 건축상을 수상했다.

3 크라우드 펀딩으로 서점을 살려 낸 톤 하르머스 대표.

1주일만에 10만 유로 모금해 다시 개장그런데 대형 체인서점 셀렉시스가 2012년 부도를 맞았다. 도미니카넌서점의 위기였다. 새 경영주가 나서면서 서점이름이 ‘폴라러’로 바뀌었다. 기존의 셀렉시스와 중고책 체인 더 슬레흐터가 합병해서 2013년에 출범한 것인데, 역시 사정이 좋지 않아 2014년 1월 문 닫는다고 통고해왔다.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서점, 가디언이 ‘천국의 서점(Bookshops made in Heaven)’이라 칭송했던 도미니카넌은 기로에 섰다.


도미니카넌의 매니저 톤 하르머스와 직원들은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서점 살리기에 나섰다. 크라우드펀딩을 시도하기로 했다. 하르머스는 ‘도미니카넌서점은 존속되어야 한다’는 편지를 페이스북에 올렸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에서 당신이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독자와 함께 걸을 것이다. 우리 서점의 새로운 미래에 투자해주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감히 당신을 ‘도미니카넌서점의 친구’로 부르고 싶다.”


톤 하르머스는 5년 안에 투자액의 125%를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1000유로를 투자하면 5년 후 1250유로를 되돌려주겠다는 구체적인 조건이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틀 만에 전 세계 4000여 페이스북 회원이 ‘좋아요’를 눌러주었다. 20명의 직원들은 자신감을 얻었다.


2014년 3월 7일에 크라우드펀딩이 개시되었고, 60시간 만에 5만 유로가 모였다. 다시 1주일 만에 10만 유로가 모였다. 서점 재생에 필요한 액수의 배가 되었다. 총 620명이 펀딩에 참여했다. 직원들도 참여했다. 3월 21일, 도미니카넌서점의 임직원은 다시 서점 문을 연다고 선언했다.


서점 대표를 맡은 하르머스는 ‘투자한 친구들의 날’을 정하고 서점 운영을 토론했다. 서점의 철학과 목표도 새로 다듬었다.


“우리 서점의 목표는 네덜란드 헌법의 기본인 표현의 자유, 출판의 자유와 일치한다. 독자들은 모든 진리와 사상을 우리 서가에서 찾을 수 있다. 책은 고객이 선택한다. 우리는 독자들의 책 선택과 책 읽기를 도와주는 서가를 만드는 일을 한다.”


외부인사 15명을 초빙하여 특별위원회를 만들었다. 책방 운영 전반을 토론한다. 특별회원제를 만들었다. 매년 50유로를 내면 특별회원이 되고 다양한 혜택을 준다. 네덜란드에서는 도서정가제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에 책값을 할인해줄 수는 없지만, 30권 이상 구입하면 일정한 혜택을 준다. ‘회원의 날’을 만들어 음악회를 연다.


만남의 공간과 토론의 광장 역할도도미니카넌서점은 마스트리흐트의 공회당이다. 재탄생하면서 공회당으로서의 역할은 더 강조되고 있다. 저자와 독자의 대화, 강연회, 음악회, 연극, 와인파티 등 한 해에 150개 이상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서점은 만남의 공간이자 토론의 광장이다. 서점은 진실이 꽃피는 곳, 우정이 쌓이는 곳이다. 온갖 아이디어가 공존하는 자유천지다.”


톤 하르머스는 서점의 이 코너 저 코너를 신나게 안내했다. 1700년대에 간행된 네덜란드어 성서를 보여주었다. 도미니카넌은 앤티크북도 취급한다.


“책과 함께,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내 삶의 에너지다. 나는 서점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한다.”


책은 새로움을 창조하고 신기함을 체험하게 한다. 책만큼 경이로운 영토가 어디 있을까. 새로움과 신기함을 찾아나서는 사람들, 5만 여 책의 꽃들이 사계절 싱싱하고 풍요롭게 피어 있는 책의 신전 도미니카넌서점에는 1년에 100만 명이 찾아온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도미니카넌서점에 와서 책의 향기에 취하면서 자유와 자유정신을 경험하기 바란다.”


김언호한길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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