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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노트북 주기적 교체, 해외 서버 이용 … 갈수록 고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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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포스코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가 지난 7월 3일 동양종합건설을 압수수색했다. 수사관들이 대구시 동구 동양종합건설 회장실 등에서 압수한 물품을 차량에 옮겨 싣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2006년 3월 26일 대검 중수부가 서울 용산구의 글로비스(지금의 현대글로비스)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현대차 비자금 수사의 신호탄이었다. 이때 한 검사가 글로비스 사무실 9층 벽면에 숨겨진 ‘비밀 금고’를 찾아냈다. 평범한 이동식 책장을 옆으로 치우고 벽면을 밀어보니 금고가 나왔고, 안에서 1만원권 현금 50억원과 현금 다발을 묶었던 띠지가 무더기로 발견된 것이다.

 #지난 7월 3일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가 포스코 협력업체인 동양종합건설을 압수수색하기 위해 대구 동구시 소재 본사에 들이닥쳤다. 동양종건 임직원들은 “올 게 왔다”며 담담하게 압수수색에 응했다고 한다. 검찰은 동양종건 측이 포스코 수사가 착수되기 한두 달 전 컴퓨터를 모두 포맷하고, 문제가 될 만한 서류를 이미 정리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압수수색 대비 매뉴얼’도 발견됐다. ‘압수수색 시 사장실에 보고 후 관련 자료를 차량에 싣고 외부로 옮긴다’는 등의 내용이었다고 한다.

 기업 수사 때마다 단서를 하나라도 더 찾으려는 검찰과 최대한 숨기려는 기업 사이의 숨바꼭질은 전쟁에 가깝다. 대기업 수사가 본격화한 2000년대 중반만 해도 검찰의 압수수색에 기업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2006년 서울 양재동 현대차 사옥 현관에서 재무팀 등이 있는 이른바 ‘로열층’까지 검사와 수사관들이 제지 없이 밀고 올라갈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기업들의 대응력은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종이 서류는 남기지 않고, 중요 자료를 보관하는 컴퓨터 서버를 해외에 두기도 한다.

 글로비스처럼 회사 안팎에 비밀 공간을 만들어 압수수색에 대비하는 것은 고전적인 방법이다. 올해 3월 방위사업비리 정부 합동수사단이 수사한 일광공영의 이규태 회장의 경우 삼선동 B교회에 있는 회장실 비품 창고 옆에 ‘비밀의 방’을 두고 있었다. 방 안에는 바깥을 볼 수 있는 폐쇄회로TV(CCTV)와 도주할 수 있는 후문이 있었다. 서울 도봉산 기슭에 소재한 1t짜리 대여 컨테이너엔 방산 자료를 보관하기도 했다. 수백 대의 대여 컨테이너들 속에 있던 이 비밀 컨테이너의 비밀번호는 이 회장과 그의 최측근만 알고 있었다.

 보다 진일보한 방식이 컴퓨터 등 자료를 삭제하기 위한 ‘시간 끌기’다. 2010년 9월 서울서부지검이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비자금 의혹을 수사하기 위해 한화 본사를 압수수색했을 때 외부용역 경비업체 직원들이 수사관들의 건물 진입을 막았다. 이 사건으로 경비업체 직원 7명이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기소됐고 모두 유죄를 선고받았다.

 2011년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가 수사한 SK그룹 비자금 사건에서는 압수수색팀이 본사에 진입하려 하자 건물의 모든 전력이 일시에 끊어졌다고 한다. 엘리베이터가 먹통이 되는 바람에 수사관들의 진입이 1층에서 차단됐다. 검찰 관계자는 “컴퓨터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던 SK 직원들도 엘리베이터에 갇혔고, 수사관들이 해당 층을 뛰어 올라가 엘리베이터 문을 수동으로 개방해 증거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최근 추세는 컴퓨터 파일 등 물리적 흔적 자체를 남기지 않는 것이다. 특수 수사에 정통한 한 부장급 검사는 “모 기업의 경우 주요 부서 직원들에게 업무일지를 남기지 않도록 교육하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징계까지 한다고 들었다”고 했다. 일정한 주기로 직원들의 노트북과 휴대전화를 교체하도록 하고, 사설 포렌식 업체에 의뢰해 자료 복구가 불가능하도록 기록을 삭제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가 진행 중인 포스코 수사에서도 A기업은 회사의 메인 서버를 중국으로 옮겼다가 최근 다시 국내로 옮겨온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해당 기업이 압수수색에 대비하기 위해 해외로 서버를 옮겼다가 보안상 이유로 국내로 다시 들여온 것으로 보고 있다.

 기업들이 필사적으로 검찰의 압수수색에 대비하는 데는 검찰의 먼지털이식 수사 관행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검찰은 일단 횡령이나 배임 혐의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은 뒤 다른 범죄의 단서를 찾으면 압수한 관련 자료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다시 받아 열람하는 관행을 유지해 왔다. 한 번 압수한 전자매체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열어 볼 수 있다는 얘기다.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컴퓨터 기록 등을 통한 수사가 갈수록 강화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기업으로선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압수수색 단계부터 대비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법조계에 따르면 몇 년 전 서울중앙지검의 인지부서가 특허권 분쟁과 관련해 중소기업인 B사를 압수수색했다. 이 회사의 직원이 갖고 있던 USB에서 직원이 전에 다녔던 대기업과 관련한 비리 문서가 발견됐다. 해당 중소기업과 대기업은 전혀 관련이 없었지만 결국 대기업 수사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런 부작용을 우려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7월 “압수수색 영장 혐의와 관련 없이 수집된 증거는 모두 불법 증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중앙지법은 압수 당사자의 참여 없이 이뤄진 압수수색은 무효라는 대법원 판단에 따라 실무 개선안을 마련해 시행에 들어갔다. 법조계의 반응은 엇갈린다. 검찰 관계자는 “법원이 압수수색에 대해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은 채 계속 제한만 하다 보니 범죄에 대응할 수단을 잃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검찰이 밝힌 대로 ‘환부만 도려내는 수사’를 하려면 압수수색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S BOX] ‘야동’ 저장 하드디스크, 자료 복구 해보니 회계장부

과거 검찰의 기업 압수수색은 회계 장부나 업무 일지 등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요즘에는 디지털 포렌식 과정이 필수적이다. 압수물이 주로 컴퓨터 파일이나 스마트폰의 통화 기록 등 전자매체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확보한다’는 것은 실제 하드디스크를 가져온다는 뜻이 아니라 내용물을 이미징(복제)해 오는 것을 의미한다. 2011년 SK그룹 수사 때 최태원 회장 개인의 자산 관리를 담당했다는 관제팀 직원의 자택 장롱에서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발견됐다. 외관상 ‘야동’밖에 저장돼 있지 않았지만 디지털 포렌식을 한 결과 숨겨져 있던 회계 자료가 드러났다고 한다.

 검찰은 포렌식 장비와 기법을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올해 법무부는 대검찰청 국가디지털포렌식센터(NDFC)와 서울중앙지검 등의 디지털수사팀에 스마트폰 분석을 위한 포렌식 장비를 구입하는 예산 23억여원을 신규로 편성했다. 갤럭시나 아이폰 등 다양한 기종·운영체제의 휴대전화기 메모리 전체를 비트 단위로 복구해낼 수 있는 첨단 장비들도 구입했다. 최장 1년 전 삭제한 카카오톡 메시지까지 복구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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