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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미술관도 화랑도 없던 50년대, 우리의 전시장은 다방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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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수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대학서 치즈 배급받는 게 최고 호사던 시절
프랑스·미국 잡지 베껴가며 미술 비평 공부
‘공간’ 편집장 땐 돈 없어 혼자 잡지 만들기도

70년대 국립현대미술관은 대여 공간이었어요
전문위원으로 소장품 늘리고 기획전 위주로
난 야외형 비평가…화랑서 신인 발굴 정착돼야

‘야전군 사령관’ ‘현장 비평가’. 뮤지엄 산(SAN)의 오광수(76) 관장을 일컫는 말이다. 1963년 미술평론을 시작한 이래 미술 전문지 편집장, 미술관 관장, 여러 국제 전시회 감독과 조직위원장 등을 거쳤다. 한국 큐레이터 1세대로도 꼽힌다. 지난달 31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만난 그는 ‘2015 올해의 작가상’ 심사를 위해 그곳에 들른 길이라고 했다. 오는 18일부터는 뮤지엄 산에서 판화 전시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침체한 국내 판화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다. 그의 인생을 통해 한국 미술의 역사를 되짚어 봤다.

멋쟁이 천경자, 파리지앵 김환기

“미술은 전공하는 게 아니라 취미로 하는 것이다.” 미술대학에 가겠다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깡통 차고 싶은 거냐”고 불호령을 내렸다. 50년대 화가는 환쟁이로 불렸다. 화가는 직업이 아니라 무직자로 분류됐다.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아들이 법관이나 정치가가 되길 바랐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는 58년 홍익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당시 홍대 미대에는 오 관장처럼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가의 길을 택한 학생들로 가득했다.

“미대 학생들은 어디서나 그렸어요. 다방에서도 그리고 역 대합실에서도,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그렸죠. 학교 강의실에는 조금이라도 더 그리고 가겠다는 학생들과 퇴근해야 한다는 수위들의 말싸움이 수시로 일어나곤 했어요.”

제대로 된 미술관도 화랑도 없던 시절 그는 서울 시내에서 열리는 전람회란 전람회를 모두 찾아다녔다. 화신백화점·동화백화점·미도파·국립공보관 화랑이 그나마 유명했고, 상당수의 전시는 시내 다방에서 열렸다. 명동의 동방살롱은 미술인·문인·연극인·음악인들이 모이는 예술인들의 대표 집결지였다. “담배 연기 자욱한 다방은 작품 감상에 적당한 장소는 아니었지요. 현재 전시관이나 카페와는 비교할 수도 없지만 문화적인 분위기는 훨씬 뛰어나지 않았나 싶어요.”

그는 신촌시장 안에 있는 어느 가게의 2층 골방에서 친구와 자취를 했다. 50년대 신촌은 그야말로 시골이었다. 신촌로터리가 버스 종점이었다. 비포장이라 비만 오면 뻘밭이 됐다. 푹푹 빠지는 진흙탕을 가기 위해 장화가 필요했는데 학생들은 염색한 군화를 장화 대신 신었다. 맑은 날이나 비 오는 날이나 모두 신을 수 있어서였다.

가난한 학생들에게 학교에선 가끔 치즈 배급을 해줬다. 뜨거운 밥 속에 치즈 한 수저 떠넣으면 금세 밥 전체가 노랗게 물들었다. “간장을 부어 비비면 그렇게 구수하고 향긋할 수가 없었죠. 어쩌다 달걀이라도 넣으면 보통 호사스러운 식탁이 아니었고요.”

부산 출신인 그는 상경 첫해 사투리 때문에 고생했다. “경상도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싸우는 줄 알고 슬금슬금 피하더라고요. 날렵하고 재치있는 서울 억양은 흉내 낸다고 될 일이 아니더군요.” 한동안은 버스 차장 말을 못 알아들어서 고민하기도 했다. “1년이 지나서야 서울 친구에게 물으니 ‘굴레방 다리 내립쇼’라더군요. 지금도 굴레방 다리를 지날 때면 그때 생각에 웃음이 나요.”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에서 열린 해프닝 이벤트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 오 관장이 각본을 썼다.

역경 속에 예술혼을 불태운 이중섭은 당시 학생들 사이에 전설이었다. 56년 작고한 이중섭의 대표작 ‘흰 소’가 홍대 미술학부에 건물에 걸려 있었는데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이중섭의 예술혼에 대한 존경심을 되새겼다. “모두 가난했고 거지 같은 몰골이었지만 예술을 한다는 자부심과 희망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냈죠.”

당시 홍대 미술학부엔 동양화의 이상범·김기창·천경자 선생이, 서양화의 이종우·김환기·손응성·이종무·한묵·김원 선생이 있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조각가 김정숙 선생은 베레모를 썼고, 천경자 선생은 멋진 스카프를 둘렀다. “천경자 선생은 멋진 외모뿐 아니라 수필집의 인기로 학생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셨어요. 이상범 선생은 언제나 조용했고, 파리에서 귀국한 김환기 선생은 큰 키에 굵직한 목소리로 주위를 압도했어요.”

김수근의 의지로 버틴 잡지 ‘공간’

그가 군대를 다녀온 사이 두 개의 혁명이 지나갔다. 그즈음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에 당선되면서 비평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미술 창작에 전념할 것인가 비평가로 살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비평을 택했다. 학창시절 국문과와 미대 진학을 놓고 고민했을 정도로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에게 미술평론은 그림과 글을 모두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당시엔 전업 비평가가 많지 않았고 창작과 비평을 겸하는 작가들이 대부분이었죠. 창작을 포기하는 게 아쉬웠지만 비평가로 제대로 서기 위해서는 옆눈질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1987년 화가 송영방이 그린 오 관장의 모습.

비평가로서의 출발은 초라했다. 제대로 된 미술이론 서적 하나 구하기 어렵던 시절, 모든 게 독학이었다. 고서점이나 외국서점을 다니며 원서를 구했고, 박서보의 집에서 프랑스 미술지 ‘시매즈’를 빌려보곤 했다. 현대미술에 대한 정보는 일본 잡지나 미국 ‘타임’지 미술란 등을 통해 얻었다. 복사기가 없어 일일이 손으로 노트에 베껴서 정리했다. 60년대 초반 상업화랑이라고는 반도호텔 입구에 자리한 반도화랑이 유일했다. “그 으리으리한 호텔에 드나드는 건 주눅 드는 일이었지만 박수근·도상봉·김기창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 자주 갔어요. 나중에 들었는데 형편없는 행색에 잘 닦지도 않은 염색 군화를 끌고 내가 화랑에 들어서면 당시 화랑을 지키고 있던 박명자 여사(현 갤러리 현대 회장)가 ‘아이고 골치야’라고 했다더군요.”

67년에는 청년작가 그룹 ‘신전’ ‘무’ ‘오리진’의 멤버들이 공보관 화랑에서 개최한 ‘청년작가연립전’의 해프닝 시나리오를 써주기도 했다. 그해는 그가 미술 잡지 ‘공간’의 편집장이 된 해기도 하다. 2년 동안 ‘홍대학보’ 편집장으로 일한 후 김수근이 주도하는 공간건축사무소 부설 잡지 ‘공간’ 편집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69년부터 재정난에 잡지 발행이 위축됐지만 그는 비평가로서 미술지를 만든다는 자부심에 의욕적으로 일했다. “70년대 들어서는 원고료를 제대로 지급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1년간은 직원을 모두 내보내고 혼자서 잡지를 만들기도 했지요. 참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요. 하지만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잡지는 내자던 김수근의 의지가 힘이 됐어요.”

광주 비엔날레 작가 섭외하러 아시아 누볐다

72년부터는 대학 강사로, 79~83년 국립현대미술관 전문위원으로 일했다.

“당시 윤치오 관장이 제대로 된 미술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미술 전문가가 필요하다며 연락을 해왔어요. 당시엔 큐레이터라는 말이 없어서 그냥 전문위원이라고 했죠.”

대여 공간에 불과하던 미술관을 기획 전시 중심으로 바꾸기 위해 그는 동분서주했다. 국립미술관은 국내외에 한국미술의 수준을 알리는 장소이자 한국미술을 진작시키고 정체성을 추구하는 장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청년작가전’(현 오늘의 작가전) ‘수묵화 대전’ ‘한국 판화, 드로잉 대전’ ‘김환기 10주기전’ ‘이상범 10주기전’ ‘근대미술 자료전’ 등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유명 전시회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특히 ‘수묵화 대전’은 국내 수묵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고, 80년대 수묵화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한국 판화, 드로잉 대전’은 미국 뉴욕, 옛 유고슬라비아와 교류전으로 확대돼 한국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1979년 상파울루비엔날레에 한국 최고위원 자격으로 참여했던 당시의 오 관장(왼쪽에서 두 번째).

84년 파리에서 1년간 유학한 후 돌아와 미술 잡지 ‘화랑’ 편집위원과 ‘현대미술’ 편집주간을 지냈고. 91년부터는 환기미술관장 및 환기재단 상임이사로 일했다.

95년엔 제1회 광주비엔날레 부위원장과 아시아 지역 커미셔너(한국 최고관리자) 직을 맡았다. “처음엔 우리가 국제전을 열 수 있을까 의구심을 품었지만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파키스탄 국경 지대에 사는 작가와 연락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중국 작가 팡리준의 화실을 찾아 베이징 시내를 이틀간 돌아다니는 등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식으로 아시아 작가들을 섭외했어요.”

97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에 임명됐다. 한국관 규모가 작아서 여러 작가의 작품을 전시할 수가 없었다. 강익중의 손바닥만 한 작품들로 벽면을 채우고, 이형우의 작은 큐브 조각을 바닥 가득 펼치는 전시로 ‘회화이면서 회화가 아닌, 조각이면서 조각이 아닌 상태’의 작품을 기획했다. 이 전시로 강익중은 특별상을 수상했다.

민중미술 탄압자로 오해받은 적도

한국 미술계를 뒤흔든 몇 번의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99년 광주 비엔날레 총감독으로 임명됐을 때 일이다. 80년대 초 국립현대미술관 전문위원 시절 정보원이라는 사람이 약 30장의 사진을 들고 와 평가를 해달라고 해서 “몇 점 빼고는 작품으로 평가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했는데 졸지에 민중미술 탄압자로 알려지게 됐다. 당시 사정을 아무리 설명해도 막무가내로 그의 임명을 반대하던 9명은 탄핵 서명까지 발표했다. 그가 99년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임명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했다.

그는 그 9명을 광주지검에 형사고발 하며 맞섰다. “내가 그들에게 굴복한다는 건 내가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는 거고 그건 나 스스로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으니까요. 너무 뻣뻣하다거나 도도하다는 이야기는 가끔 듣지만 누구를 음해하거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일을 결단코 없어요. 민중계열이든 모더니즘 계열이든 작품성을 보고 비평해왔을 뿐이고 나의 양식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을 뿐이니까요.”

90년대 초 천경자의 ‘미인도’ 위작 사건에도 그의 이름이 나온다. 이 사건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미인도를 보고 천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면서 불거졌다. 미술관 측은 진품이라고 하고, 작가는 위작이라고 하는 상황이었다. ‘진품인지 검증도 안 하고 작품을 전시했다’며 국립미술관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었다.

“내가 국립현대미술관 전문위원으로 있을 때 미인도가 왔으니까 당시 상황을 비교적 잘 아는 셈이었죠. 고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의 압류 재산 중 하나였고, 정부에서 중앙박물관과 현대미술관 직원을 불러 소장 가치가 있는 작품을 골라 가져가라 해서 가져온 작품 중에 미인도가 포함돼 있었던 거예요.” 그의 해명으로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천경자 작가와 그는 서먹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게 당시의 사정이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왼쪽부터 79년 상파울루비엔날레 참가작인 박현기의 ‘무제’, 88년 서울올림픽 기념 상징조형물인 김중업의 ‘세계 평화의 문’, 97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설치 작품인 강익중의 ‘오페라를 부르시는 부처님’. 오 관장이 기획·제작·전시 등에 관여한 작품들이다.

영화관 가듯 미술관 가는 시대 올까

스스로를 ‘온실형 비평가’가 아닌 ‘야외형 비평가’라는 그는 요즘도 전시장을 자주 찾는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인사동이나 사간동 화랑가를 돌아본다. 인사동 일대는 60년대부터 표구점, 지물점, 골동품 가게 등이 있던 곳이다. 70년대부터는 현대미술 작품을 취급하는 화랑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조계사 앞쪽에 도화서가 자리 잡고 있어서 예로부터 서화가들과 인연이 깊던 곳이다.

“60~70년대 전시회는 한 달에 한두 건 정도, 그것도 가을·겨울 정도에나 열렸죠. 하지만 요즘은 계절에 상관없이 끊임없이 전시회가 열리고, 그나마 전시 기간이 일주일가량밖에 안 되는 경우가 많아요.” 초청받은 전시회에 다 가보지 못하는 게 그는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그는 화랑이 단순한 전시공간이 아닌 신인을 발굴하고 후원하는 제도가 정착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화랑도 큐레이터도 과거보다 훨씬 많아졌지만 질적인 측면에서의 발전도 그에 걸맞게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라고 했다. “대여료만 내면 누구에게나 화랑을 빌려주니까 검증되지 않은 전시로 인해 가치의 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선진국처럼 화랑을 통해 작가와 작품을 검증하는 시스템이 생겨야 합니다.”

자신을 원로라고 부르는 말을 들을 때마다 쑥스럽다는 그는 “나이를 먹었다는 데에 대한 반감 때문이 아니다”라고 했다. “비평에는 언제나 신진만이 있을 뿐이니까요. 신선한 안목을 지니지 않으면 그건 제대로 된 비평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제 영화관 가듯 미술관을 가는 시대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더 체계화되고 전문화 된 큐레이터들이 대중의 요구를 뛰어넘어 좋은 전시를 기획해야 합니다. 미술은 지식이 아닙니다. 다양한 작품을 두루 많이 보면 안목이 높아지죠. 좋은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들이 늘어나고 그런 전시를 찾는 관람객이 많아져서 한국의 미술문화를 더욱 발전시켜야 합니다.”

글=김소엽 기자 kim.soyub@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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