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의원회관서 만난 상원의원 힐러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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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단정하게 오른쪽으로 빗어넘긴 짧은 머리, 엉덩이를 완전히 감싸는 깔끔한 아이보리색 재킷, 거기에다 목을 감싸는 진주 목걸이까지. 사진 속에서 늘 보던 익숙한 모습으로 힐러리 클린턴이 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왔다.

세간에 화제를 뿌리고 있는 '리빙 히스토리'가 출간되기 3주 전, 미 워싱턴 의원회관에서 만난 힐러리(55)는 이렇게 신문이나 TV뉴스 속의 이미지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그래서 그의 눈을 응시하며 악수할 때조차 모니터 속의 가상인물과 가상체험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힐러리가 법안 투표를 위해 황급히 의회로 돌아간 뒤에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여성을 만났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사실 힐러리의 정치적 위상은 미 의원회관인 러셀 빌딩에 들어서는 순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꼭대기층인 4층, 그것도 의원 전용 엘리베이터에서 가까운 476호가 힐러리의 집무실이다. 힐러리는 비서 네 명이 근무하는 이 접견실을 비롯해 모두 14개의 사무실을 쓰고 있다. 힐러리의 명함에 적힌 주소대로 의원회관의 스위트룸이다.

접견실의 비서 아멜리아 레이는 "모든 상원의원이 다 이렇게 많은 방을 배정받는 것은 아니다"면서 "어느 주 의원인지, 혹은 몇 선 의원인지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는 얼마나 많이 중요한 이슈를 제기하는지, 한마디로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여부가 방을 결정하는 주된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8년을 백악관에서 보냈던 힐러리지만 상원에서는 초선 의원일 뿐이었다. 연공 서열이 지배하는 상원에서 힐러리가 처음 받을 수 있는 곳은 러셀 빌딩의 지하실 방 한 칸이었다. 그로부터 2년 반이 지난 지금 그는 펜트하우스를 차지한 유력 상원의원으로 급성장했다. 이곳의 보좌관 30여 명을 비롯해 뉴욕주에 있는 8개의 사무실에는 1백 명 가까운 비서진이 힐러리를 보좌하고 있다.

그의 영향력을 실감하는 또 다른 모습은 방문객으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대는 사무실 풍경이다. 아무리 약속시간을 정하고 찾아와도 늘 기다리기 일쑤인 방문객들에게 차 시중을 하는 인턴 엘리자베스는 "오늘 힐러리와 만나기로 약속돼 있는 사람이 79명"이라면서 "보통 하루에 70~80명의 방문객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힐러리의 접견실은 이처럼 힐러리를 만나려는 많은 사람들이 꼭 통과하는 곳이다. 일반인에 공개하지 않는 다른 사무실들과 달리 힐러리가 드러내고자 하는 상징이 담긴 장소인 셈이다. 9.11 테러 당시 희생당한 뉴욕 소방관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담은 '우리는 당신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적힌 포스터,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바그람 기지를 방문하고 받은 기념패, 각국의 여성단체들로부터 받은 감사패…. 이 모든 게 힐러리가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일 것이다. 철새 정치인이라는 비난을 비껴가고 싶은 심정, 초당파적인 애국심, 평생을 바쳐온 여성운동에의 헌신 말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힐러리 사무실에서 가장 눈에 띠는 건 사무실 입구 바로 옆에 붙여놓은 액자 한 장이었다. 다름 아닌 뉴욕 타임스가 힐러리의 상원의원 당선을 알린 장문의 기사였다. 유명한 언론 혐오주의자 힐러리가 자신을 '타고난 거짓말쟁이'라고 부른 바로 그 신문의 기사를 단정하게 액자로 만들어 붙여 놓은 것이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백악관의 가장 오래된 출입기자였던 헬렌 토머스도 힐러리가 백악관에 들어온 지 1년 반만에야 처음으로 인터뷰를 했을 정도로 힐러리는 언론을 불신했다. 그러나 이 액자를 보면서 실은 언론에 사랑받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힐러리에게 언론은 인정받기 원했지만 칭찬에 인색했던 그의 아버지, 아니면 사랑받고 싶었지만 언제나 딴 여자에게 관심있는 남편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힐러리는 오늘도 엉덩이 아래로 내려오는 바지 정장에 진주 목걸이를 걸고는 신문과 TV 속에서 미소 짓는다. 선인세로 받은 8백만 달러만으로도 큰 부를 거머쥔 힐러리, 이제 세인들의 관심사는 과연 그가 백악관에 다시 들어설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워싱턴=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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