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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함에 질려서, 허름함에 반해서…낡은 공장·창고로 몰려든다, 오래된 것이 새롭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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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모든 새것은 세월 속에 헌것이 된다. 헌것은 옛것이다. 옛것은 옛날을 추억한다. 요즘 곳곳에서 폐창고·공장을 개조한 카페·레스토랑이 인기를 끌고 있다. 허름하고 낡은 이 폐허의 공간에 열광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어떤 감성이 헌것을 새것으로 거듭나게 하는가. 서울 성수동과 제주 올레길 인근에서 그 답을 찾아보았다. 2015년, 옛것이 새것이다.

 울퉁불퉁 성근 자갈길을 따라 돌담 건물에 들어서자 육중한 원동기가 시야를 메웠다. 세월의 이끼를 덧입어 녹슬고 바랬다. 그래도 전원 스위치를 켜면 굉음을 내며 돌아갈 것만 같다. 2층 높이 천장의 목재 트러스 사이사이로 빛이 쏟아졌다. 흙바닥 위에 듬성듬성 놓인 나무 탁자들. 조금 과장하면 난민 대피소처럼 허름하다. 지난 5월 문을 연 제주도 한림읍 커피숍 ‘앤트러사이트’ 얘기다.

 요즘 이곳은 제주에서 가장 ‘핫’한 장소 중 하나다. 지난 6일 찾았을 때 커피잔을 손에 든 남녀노소가 파티를 하듯 북적였다. 여자 친구와 함께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김창희(27)씨는 “인스타그램(사진 위주로 공유되는 소셜미디어의 일종)에 올라온 사진에 반해 들러봤다”면서 “채광이 좋고 공장 물건들 같은 볼거리가 신선하다”고 말했다.

 ‘공장 물건들’은 이 공간의 전사(前史)를 증명하는 장치다. 이곳은 40년간 고구마 전분을 빻던 공장이었다. 1951년 세워져 ‘옹포리 전분공장’으로 불렸다. 한림·신창 등 인근 마을에서 고구마를 수매해 전분을 생산했고, 부산 등 전국으로 판매했다. 카페 안에 보존된 50마력짜리 원동기는 당시 흔치 않던 영국산 수입품이다.

 91년 문을 닫은 뒤 폐허처럼 방치됐던 공간을 바꿔낸 이는 육지사람(제주도민이 외지인을 일컫는 말)이다. 2009년 서울 합정동 당인리발전소 인근에 커피숍 ‘앤트러사이트’를 열었던 김평래(44) 대표다. 앤트러사이트(Anthracite)는 ‘무연탄’이란 뜻.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무연탄처럼 커피로 에너지를 만들어 표현하겠다”는 의미란다. 합정 앤트러사이트 본점은 70~80년대 신발공장이었던 공간을 재활용했다. 제주 한림은 2호점이다. 김 대표는 전분공장 공간을 처음 봤을 때 느낌을 이렇게 말했다.

 “아, 여기는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완전히 망가진, 버려진 공간이었거든요. 그런데 추억이 있는 기계들이잖아요. 자꾸 사라져 가는 이런 공간을 남겨두고 싶다고….”

제주도 감귤창고를 개조한 레스토랑 ‘서광춘희’의 내부 ① 와 외관 ② . 천장의 목재 트러스 등 원래 구조를 최대한 살렸다. 서울 성수동의 옛 보부상회자리에 들어선 ‘사진창고’③ 는 허물어진 벽면을 그대로 둔 채 곳곳에 빈티지 소품을 배치했다. 한림 ‘앤트러사이트’의 전분건조장 지붕 틈새로 비치는 제주의 하늘 ④.

 ‘기계의 추억’은 산업화의 추억, 근대의 기억이다. 거대한 원동기가 돌아가며 전분을 빻던 시절, 제주 밭작물은 고구마와 보리가 주를 이뤘다. 고구마는 질박한 섬 생활의 주요 생계수단이었다. 제주도청 친환경농정과 오용화(46) 주무관은 “어렸을 때 집에서 고구마 농사를 지어 전분공장에 납품하곤 했다”며 “그때만 해도 제주에선 전분에 보리쌀 섞어 먹는 게 주식이었다”고 회고했다.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제주도 전분산업은 70년대 이후 쇠락의 길을 걷는다. 고구마 농사가 육지(전남 고흥 등)의 생산성에 밀려 경쟁력을 잃은 때와 궤를 같이한다. 채산성 좋은 감귤농사가 빠르게 확장했다. 오 주무관네 고구마밭도 80년대 초 감귤과수원으로 바뀌었다. 전분공장 역시 하나둘 문을 닫았다. 옹포리 공장은 건축 당시 모습이 유지된 몇 안 되는 폐건물 중 하나다.

 그런 역사를 지금 커피를 마시는 이들이 알 리 없다. 젊은 힙스터(유행을 좇지 않고 개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색다른 공간’일 뿐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머 유지인씨는 “오래된 건물을 새롭게 바꾼 게 의미 있는 데다 숨어 있는 곳을 찾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유씨와 함께 온 스위스 여행객 클레망스 드웨키는 “스위스 농가 같은 외관과 달리 내부는 뉴욕 느낌이 났다”면서 “화려한 것에 질린 젊은이들이 ‘브랜드 뉴(brand new·새로운 경향)’를 추구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개발 근대의 끝자락, 오래됨의 미학=오래된 것이 새롭다-. 소위 모던(Modern·근대)의 시각에선 낯선 감성이다. 100여 년 전 개항과 더불어 한반도에 본격적인 근대화가 시작됐을 때 모던은 새것을 뜻했다. ‘모던걸’ ‘모던보이’의 신식 스타일이 세상을 홀렸다. 바야흐로 빠르고 높고 강한 것이 ‘문명’의 이름으로 추앙받았다. 1920년 잡지 ‘서울’ 4월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서울>이여 <서울>이여, 네 부디 영국의 런던처럼 되어라. 너 <서울>로 말미암아 조선을 영국처럼 되게 하여라. (중략) 잘 꾸미고 잘 간수하여라. 번쩍하니 새롭게 하여라. 환하게 빛이 나게 하여라.” (김진송,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51쪽에서 재인용)

 한 세기가 흘러 2015년, 한국은 또 다른 의미에서 영국 런던을 모방하려 한다. 이번엔 옛것에 대한 동경이다.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는 ‘불도저 개발주의’가 아니라 오래된 건물을 보존하고 그 역사성을 활용하자는 움직임이다. 템스강변 화력발전소를 그대로 리모델링해 현대미술의 메카로 거듭난 테이트모던이 모범 사례다. 한때 정수장(선유도 생태공원)·담배공장(청주첨단문화산업단지)·인쇄공장(서울 금천예술공장)이었던 공간들이 속속 문화의 옷을 입고 거듭나고 있다. 이른바 ‘도시재생’ ‘근대유산 재활용’이다.

 요즘 입소문을 탄 동네가 서울 성수동이다. 원래 이곳은 문래동·가산동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제조업(준공업) 지역이었다. 숫자는 줄었어도 여전히 골목골목 수제화·인쇄·봉제공장들이 즐비하다. 군데군데 생겨난 공실(空室)에 카페·갤러리·공방이 입점하면서 ‘뜨는 동네’가 됐다. 시발점은 성수2가 대로변의 ‘대림창고’다. 60년대부터 정미소와 창고로 쓰였던 건물을 붉은 벽돌 외관 그대로 보존한 채 행사장으로 쓰고 있다. 미국 자동차업체 ‘포드’가 올 1월 스포츠카 발표회를 여기서 여는 등 패션쇼·모터쇼가 줄을 잇고 있다. 인근에서 공인중개업을 하는 이성권씨는 “화보 촬영으로 한나절 빌리는 데 900만원을 줬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공장·창고 임대 문의는 많지만 시장에 나온 물건이 없다고 한다.

 빈티지·레트로·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 등 이런 공간을 수식하는 말은 많다. 단지 낡았다는 이유로 각광받는 것은 아니다. 폐공장·창고는 도심 건물에선 드물게 넓고 높은 공간과 층고를 자랑한다. ‘이런 곳에 이런 장소가’ 하는 의외성도 트렌드에 민감한 이들을 자극한다. 무엇보다 20~30년 길게는 100년을 넘보는 역사성이 공간에 ‘스토리’를 덧입힌다. 합정동 ‘앤트러사이트’ 단골인 플로리스트 배선주씨는 “오래된 것이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게 아름답다”고 말했다. 콘크리트 도심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도시에서 ‘자연’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또 하나의 유행인가 가치의 전환인가=리모델링(재생)·리사이클링(재활용)의 유행은 ‘미학적 가치 변화’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특히 도심 속 폐창고·공장 재생은 실리적 측면이 크다. 임형남(가온건축) 건축가는 “밀어버리고 신축하려면 일조권·주차장·폐기물 관리 등 환경규제를 많이 받는데, 건물주들이 재개발수익을 보장받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고쳐 쓰는 쪽을 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바꿔 말해 재개발의 채산성이 확보되면 언제든지 밀어버리기로 돌아설 수 있다는 뜻이다.

 개조한 건물이 입소문을 타 ‘뜨는 장소’가 되면서 임대료 갈등이 벌어지기도 한다. 지역 상권이 활성화되자 임대료가 폭등하고, 그곳에 거주하던 원주민 세입자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떠나는 현상,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다. 서울에선 홍익대 입구를 비롯해 삼청동, 신사동 가로수길, 이태원 경리단길 등이 다 이런 갈등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수동 역시 임대료가 수년 새 두세 배씩 오른 곳들이 있다.

 공간 재생 자체가 유행이 되면서 재생에 들어가는 초기 자본도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돈 없는 창업자들의 대안공간이었던 것이 이젠 치열한 경쟁 상권이 됐다. “전국에 버려진 창고·공장 알아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즐비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김평래 대표의 경우 합정동점을 열 때 종잣돈 3000만원으로 시작했다. 제주 한림점은 두 배 이상 들었다. 김 대표는 “섬이라는 특성을 감안해도 적당한 공간을 물색하고 손질하는 비용이 예상을 초과했다”고 말했다.

 결국 오래된 것 자체가 아니라 ‘오래됨의 가치’를 어떻게 추구하느냐의 문제다. 제주도 감귤창고를 개조한 레스토랑 ‘샐러드앤미미’의 정희경 대표는 요즘 청수리 본점을 휴업 중이다. “숲 속에 숨은 보석 같은 곳을 만들고 싶어 시작했는데” 비슷비슷한 공간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딜레마에 빠졌다고 했다. 그의 결론은 “아무리 다르다 한들 가게의 본질이 상업적이란 걸 인정하자”는 것. 또 다른 차별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정 대표는 ‘새롭게’ 바꾼 가게를 곧 다시 열 거라고 했다.

 김평래 대표도 마찬가지다. 창고·공장 개조만으론 차별화되지 않는 ‘미투(Me too) 가게’들 속에서 그가 믿는 것은 ‘이야기’다. “이 공간이 힘이 있는 건 내면에 깃든 역사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이 가게들이 오래될수록 또 다른 역사가 이어지지 않을까요.”

글·사진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S BOX] 제주 감귤창고 품귀 현상 … “용도변경·단열·방수 등 만만찮아”

“문의는 많은데 매물이 없어요. 다 쓰러져 가는 것도 좋다고 하는데 내놓은 사람이 있어야….”

 제주 감귤창고 시가가 얼마나 되나 물어보자 공인중개사 우철(한국공인중개사협회 제주지부장)씨가 한 말이다. 최근 제주에선 수십 년 된 감귤창고를 개조해 레스토랑·갤러리·게스트하우스로 재탄생시키는 게 붐이다. “육지에서 이주해 온 이들이 농사지을 엄두가 안 나니까 이런 아이디어로 사업을 하려는 것 같다”고 우씨는 말했다. 입소문을 탄 집들은 외딴 곳인데도 여행객을 끌어들인다. 서울 청담동에서 옮겨 온 ‘샐러드앤미미’는 2호점까지 냈다. 서귀포시 안덕면에 자리한 ‘서광춘희’는 제주 특산물을 접목한 성게라면(오른쪽 작은 사진)으로 자리 잡았다.

 앞선 창업자들은 감귤창고 개조를 쉽게 봐선 안 된다고 조언한다. ‘샐러드앤미미’ 정희경 대표는 “귤창고는 무허가 건물이 태반이라 상업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선 용도 변경을 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행강제금을 물 수도 있다”며 사전에 꼼꼼히 알아볼 것을 권유했다. 창고 용도였기에 단열·방수도 문제다. 벌레도 신경 써서 잡아야 한다. 공간 본래의 느낌을 보존하기 위해 일일이 손으로 매만지는 과정에서 인건비가 불어날 수 있다. 정 대표는 “귤창고의 가치가 재인식되면서 소유주들이 값을 비싸게 부르는 추세”라고 말했다.

 인테리어 비용도 치솟고 있다. 서울 성수동 ‘사진창고’ 임종은 사장은 “공간이 후줄근할수록 곳곳에 앤티크 가구를 배치해야 진짜 ‘빈티지’해 보인다”면서 인테리어비만 1억원 이상 들었다고 털어놨다.

 공간 확보만큼 중요한 건 ‘콘텐트’다. ‘서광춘희’ 송상훈 사장은 “결국 식당은 음식을, 카페는 커피를 제대로 만들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폐창고라는 외양에만 현혹된다면 일시적 유행에 그칠 수 있다는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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