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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요약 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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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호 1 면


1919년 3월 2일 모스크바 크렘린궁에는 전 세계의 저명한 사회주의자들이 집결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약칭 코민테른)을 결성하기 위해서였다. 국제공산당(國際共産黨)이라고도 불렸던 코민테른은 각국에서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기 위해 결성된 국제조직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야 했던 한인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코민테른이 한국 혁명운동을 지원하려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동휘에게 전달된 이른바 레닌 자금은 이런 경향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한인 공산주의 운동사는 코민테른과의 관계를 상수(常數)로 두어야 할 정도로 그 규정력이 강했다. 한인 독립군부대가 러시아 적군에게 다수 살상당한 1921년의 자유시 사변으로 많은 민족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상해 프랑스조계라는 안전지대를 제공하는 프랑스와 함께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극소수 국가 중 하나였다.


국내에 사회주의 사상을 먼저 전파한 세력은 일본 유학생들이었다. 이때의 사회주의 사상은 아직 아나키즘(무정부주의)과 코뮤니즘(공산주의)이 분리되기 이전이었다. 1920년 1월 도쿄에서 재일 한인 유학생들이 결성한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이하 동우회)는 겉으로는 조선 출신 고학생들의 친목단체였지만 그 내용은 사상단체였다. 동우회 내부에선 결성 직후 사상·노선투쟁이 발생했다.


9월 7일에는 도쿄 간다(神田)의 ‘그리스도 교육청년회관’에서 ‘신농천(信濃川) 조선노동자 학살사건 조사회’가 주최하는 ‘신농천 학살사건 대연설회’가 열렸다. 일본공산당사 연구가인 이누마루 기이치(犬丸義一) 교수는 “진보적인 재일 조선인들이 이 운동 후에 북성회(北星會)를 결성해 일본의 공산주의자들과 공동으로 행동했다(日本共産黨の創立)’고 분석했다. 이 사건이 한·일 사회주의자들을 연대하게 했고 그 결과물로 북성회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일본공산당은 1922년 7월 15일 창당되었지만 1년도 채 안 되는 1923년 6월 5일 80여 명의 일본 공산당원이 대거 투옥되는 제1차 공산당 사건으로 붕괴한다. 일본 공산주의 운동사에는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 일부 일본인 연구자들은 이동휘가 일본공산당 창당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꺼려 ‘코민테른 밀사’라는 모호한 표현을 쓰지만 코민테른의 밀사가 아니라 한인사회당의 밀사였다. 군국(軍國) 일본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한국의 독립운동과 비슷한 수준의 탄압을 받았다. 이 때문에 진보적인 한인 유학생들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들의 연대가 자연스러웠다. 재일유학생들은 1922년 11월 오사카(大阪)와 도쿄에서 각각 조선인노동자동맹회를 결성했다. 그러자 일본공산당 계열의 총동맹(總同盟)은 1923년 메이데이(5월 1일) 때 ‘식민지 해방’을 주장한 데 이어 8월 중앙위원회에서 ‘식민지 인민의 무산계급 운동의 촉진을 위해 노력한다’고 지원했다.


훗날 조선 사회주의 삼총사라 불리는 김태연(金泰淵:김단야), 박헌영(朴憲永), 임원근(林元根)은 국제공산청년회의 지시로 국내에 공산주의 청년조직을 만들기 위해 입국하려 한 것인데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 당원이란 공통점도 갖고 있었다. 이동휘가 이끄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다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좋게 말하면 국제주의 성향이 강했다. 코민테른은 두 당을 통합시켜 당력을 극대화시켜야 했다. 코민테른이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를 열어 두 당의 통합을 시도한 것은 이런 목적을 달성시키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르쿠츠크파가 통합에 반대하고 대회장을 떠나면서 통합대회가 무산됐음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이 이르쿠츠크파의 손을 들어주면서 한국 공산주의 운동은 왜곡되기 시작했다.


1923년 7월 서울 낙원동에서 결성된 ‘신사상연구회’는 공개조직이었다. 홍명희(洪命憙)·홍증식·윤덕병(尹德炳)·김찬·박일병(朴一秉) 등이 “홍수처럼 몰려오는 신사상을 연구해서 조리 있게 갈피를 찾아보자”는 명분으로 조직한 신사상연구회는 1924년 11월 카를 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인 데서 착안해 ‘화요회’로 개칭하고 연구단체에서 행동단체로 전환했다. 화요회가 1925년 결성되는 조선공산당의 모체가 되는데 사실상 이르쿠츠크파와 북풍회의 연합조직체로서 역시 서울청년회는 소외되었다.


대일항쟁기 때 한인 사회주의자가 탄생하는 경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민족주의 운동으로 출발해 사회주의 운동가로 변화한다는 점이다. 국내 최대의 자생적 사회주의자 운동 세력이었던 서울청년회의 리더 김사국(金思國)도 이런 길을 걸었다. 김사국은 1919년 4월 23일 전개되었던 국민대회 주동자 중 한 명이었다. 국민대회는 3·1운동보다 조직적이었다. 서울 종로 서린동 봉춘관(奉春館)에 13도 대표가 모여서 ‘국민대회’라는 간판을 걸고, 동시에 민중이 운집해 독립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에 청년단체가 출범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警務局)에서 발간한 조선치안상황(朝鮮治安狀況)에 따르면 1920년에 전국 각 도의 청년회는 모두 251개였으나 1921년에는 446개로 급증했다. 이런 단체들은 겉으로는 합법적인 청년단체를 표방했고, 노선도 다양했지만 대부분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는 정치단체였다. 이런 청년단체를 하나로 묶으면 큰 힘이 될 것은 명약관화했다. 이때 먼저 선수를 치고 청년단체의 통합을 주창하고 나선 인물이 민족주의자였던 동아일보 주간 장덕수(張德秀)였다. 장덕수는 1920년 5월 26일자 동아일보에 “각지(各地) 청년회에 기(寄)하노라-연합을 요망(要望)”이라는 사설을 써서 각 청년단체의 연합을 주장했다. 이때만 해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이 적대적이 아니었으므로 민족주의 세력의 통합 주장에 대해 사회주의 세력이 반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해 6월 17일 서울 삼청동에서 청년회 연합기관 결성을 위한 모임이 열렸다. 그런데 이들이 결성하려던 연합청년회는 두 종류였다. 하나는 서울지역의 청년회를 묶는 서울청년회였고, 다른 하나는 전국 각지의 청년회를 묶는 조선청년회연합회였다. 조선청년회연합회가 결성된다고 해도 그 핵심은 서울청년회일 수밖에 없어 서울청년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세력이 전체 주도권을 잡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서울청년회를 조직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청년회연합회를 결성하는 움직임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서울청년회 결성의 한 축이었던 사회혁명당은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 국내 조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3·1운동 이후인 1920년 6월 신아동맹단의 한국 측 인사들은 서울 최린의 집에서 제5차 대회를 열고 사회혁명당으로 개칭했다. 사회혁명당 선언서는 “계급과 사유제도의 타파, 무산계급 전제정치” 등을 주장해 사회주의적 지향을 분명히 했지만 그 구성원 중에는 민족주의자들이 많았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민족주의 색채가 강했던 것처럼 사회혁명당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청년회연합회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동아일보와 사회혁명당의 민족주의 세력이었다. 이는 상해파 고려공산당 세력이 국내 청년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것을 뜻했다. 조선청년회연합회(이하 청년회연합회)는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과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세력의 연합전선이었다. 서울청년회는 1922년 4월 열린 청년회연합회 제3회 정기총회에서 ‘사기공산당 사건’을 제기함으로써 큰 파장을 일으켰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코민테른 자금, 이른바 레닌 자금을 국내 공산주의 운동과는 관계없는 국내 인사들에게 제공했다는 것이었다. 서울청년회는 그간 국내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민족개량주의 세력을 축출하고 한국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들이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진정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싸워야 할 또 다른 상대가 있었다. 바로 코민테른 파견원들이었다. 조선공산당(이하 조공)과 고려공산청년회(이하 고려공청)는 일경의 급습에 대거 붕괴되었다.


1926년 4월 26일 마지막 황제 순종이 세상을 떠났다. 조선 공산당은 순종 인산일인 6월 10일에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일제는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갔지만 비밀리에 후계진용을 갖춘 조공과 고려공청이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은 고려공청 책임비서 권오설이었다. 그는 ‘6·10운동투쟁지도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조공 학생부의 프랙션 조직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통해 시위를 준비했다. 권오설은 천도교 청년동맹 간부이자 조공 야체이카 책임자였던 박래원(朴來源)에게 원고 5종과 200원을 주면서 인쇄를 부탁했다. 박래원은 민창식(閔昌植)과 명치정(明治町:중구) 앵정(櫻井)상점에서 인쇄기 2대를 구매해 약 5만 장의 격문을 인쇄했는데, 서울은 물론 지방에도 배포해 3·1운동 때처럼 전국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상해의 김단야가 보내기로 한 거사자금이 도착하지 않으면서 차질이 생겼다. 그래서 격문을 일단 천도교 잡지사인 개벽사 구내에 있는 손재기(孫在基)의 집에 숨겨두었는데 뜻밖의 사건으로 시위 계획이 탄로 났다.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중국 화폐 위조사건이 발생한 뒤 오사카 경찰서에서 한국인 연루자 세 명의 체포를 종로경찰서에 요청한 것이 계기였다. 이들이 체포될 때 위조지폐와 격문 한 장도 압수되었다. 일경은 천도교 계통의 개벽사 수색 와중에 손재기 집안에 보관 중이던 격문 상자를 발견하고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이것이 6월 4일께였는데 조공의 많은 간부가 체포되거나 수배당했다. 6월 10일 인산일 하루 전 조선총독부는 용산 조선군사령부 소속의 보병·기병·포병 5000여 명에게 시내를 행진하게 하고 3·1운동 발생지였던 파고다공원에 주둔시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 이덕일,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제265호 2012년 4월 8일, 제266호 2012년 4월 15일, 제267호 2012년 4월 22일, 제268호 2012년 4월 29일, 제269호 2012년 5월 6일, 제273호 2012년 6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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