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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성스러운 큰 물, 온 세상을 씻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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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636㎞, 최대 폭 79㎞, 총 둘레 2100㎞, 면적 3만1500㎢(남한 면적의 3분의 1), 최고 수심 1637m, 수량 2만3000㎦(빙하를 제외한 지구 담수의 5분의 1). 이 어마어마한 수치는 오로지 한 곳을 설명하고 있다. ‘시베리아의 진주’ ‘지구 생명체 진화의 교과서’ 등 별명도 많은 그곳, 바이칼(Baikal) 호수다. 숫자만 보고는 도저히 감이 안 올 터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직접 본 사람만 안다. 이 웅장한 대자연은 맞닥뜨려야만, 그 존재를 믿을 수 있다.


바이칼 호수 알혼섬의 상징으로 불리는 부루한 바위. 이 바위에는 바이칼 원주민 부리아트족이 모시는 신 ‘텐그리’가 깃들어 있다. [사진 (주)태림투어]

바이칼 호수는 지구의 지각운동이 만든 호수다. 호수를 경계로 서쪽에는 유라시아 판이 있고 동쪽에는 아무르 판이 있는데, 유라시아 판은 점점 융기하고 아무르 판은 일본 쪽으로 서서히 밀려가면서 호수가 형성됐다. 바나나처럼 길쭉하게 생긴 모양도 이런 형성과정 때문이다. 판 운동은 현재진행형이다. 바이칼 호수는 매년 2㎝씩 길어지고 있다.

유네스코는 이 호수를 두고 ‘러시아의 갈라파고스’라고 소개한다. 바이칼 호수가 처음 생겨난 것이 2500만 년 전이다. 지구에 있는 호수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바이칼에 얼마나 많은 생물이 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해마다 새로운 종이 발견돼 자료마다 수치가 다르다. 1996년 바이칼 호수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을 당시 자료에 따르면 동물 1340종 식물 570종이 살고 있다. 이 가운데 895종이 바이칼에만 사는 고유종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더욱 각별하다. 바이칼 호수가 우리 민족의 발원지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민족은 북방계 몽골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몽골족이 바이칼 호수 주변을 근거지로 태동했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정신세계사)를 보면 ‘몽골 비사에 의하면 몽골족 여(女)시조 알랑고아가 아버지 쪽으로 코리족의 피를 받고 어머니 쪽으로 바락족의 피를 받아 태어났다’고 나와 있다. 이 두 부족이 바이칼 호수 원주민 부리아트족을 구성하는 13개 부족 중의 하나다. 코리족의 일부가 한반도로 내려와 우리 민족을 이뤘다는 주장이다.

부리아트족의 탄생 신화는 우리나라의 ‘선녀와 나무꾼’ 설화와 매우 닮았다. 백조들이 탈을 벗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해 바이칼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사냥꾼이 탈 하나를 훔쳤고 하늘로 돌아가지 못한 여인은 사냥꾼과 결혼해 아이 13명을 낳고 살았다. 훗날 사냥꾼이 아내에게 백조 탈을 보여줬더니, 아내는 탈을 쓰고 하늘로 날아가버렸고 아이 13명이 장성해 각각 부족을 꾸렸다는 줄거리다.

부리아트족은 신성한 장소에 ‘세르게’라는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곳에 기도처를 마련했다. 호수가 가까울수록 세르게가 흔하게 보였다. 나무 기둥에 소원을 적은 오색 천을 빽빽이 묶어둔 모습이 마치 우리의 성황당 풍경과 비슷했다. 무엇보다 부리아트족은 우리 민족과 정말 비슷하게 생겼다. 둥그런 얼굴에 쌍꺼풀 없이 얇고 긴 눈, 도드라진 광대와 작고 뭉툭한 코가 영락없는 우리네 얼굴이었다. 몸집이 우리보다 작고 피부가 그을렸을 뿐, 형제 자매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부루한 바위로 가는 길목에 서있는 나무기둥 ‘세르게‘.

바이칼 호수에서도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이라고 따로 불리는 곳이 있다. 알혼(Olkhon)섬이다. 면적이 730㎢에 이르니까, 제주도의 절반 크기다. 그러나 섬 인구는 2000명 정도다. 주민 대부분이 부리아트족이다.

알혼섬도 바이칼 호수처럼 길쭉한 모양이다. 섬 중심에 쥐마산(1274m)이 우뚝 솟아있고, 산줄기가 사방으로 뻗쳐있다. 섬에는 평지가 거의 없다. 산과 숲, 구릉이 대부분이다. 굴곡이 심해 언덕 너머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섬의 테두리는 온통 아찔한 절벽이다.

섬 북쪽으로 나가봤다. 섬 최북단 하보이곶, 사랑의 언덕, 부루한 바위 등 명소는 하나같이 예부터 영험한 기도처였다. 하보이곶은 하늘을 향해 삐쭉하게 솟은 모양이었다. 자동차에서 내려 30분을 걸어야 끝에 닿을 수 있었는데, 탁 트인 전망이 망망대해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부리아트족은 이곳이 하늘과 연결돼 있다고 믿었단다. 사랑의 언덕에는 여자가 드러누운 것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바다를 향해 놓여 있었다.

부루한 바위는 알혼섬의 상징이다. 섬에서 가장 신성시되는 곳으로, 부리아트족이 모시는 신 ‘텐그리’가 깃든 장소다. 부루한 바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릉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러 인종과 민족이 뒤섞여 부루한 바위와 그 뒤로 펼쳐진 바이칼 호수를 한동안 바라봤다. 넌지시 눈을 감고 소원을 비는 꼬마도, 서로 기대앉은 노부부도 하나같이 경건하고 온화한 표정이었다. 저마다 가슴에 사연을 안고 이곳을 찾아왔을 터였다.

그렇게 바이칼 호수는 수 천년 세월 동안 인간을 품어주고 있었다. 부루한 바위가 신성한 까닭은 비단 신 때문만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 먼 곳까지 찾아와 기도를 올린 수많은 사람의 염원이 쌓여 신령한 기운을 자아내는 건 아닐까. 우리의 기도만큼 간절한 것도 없으니 말이다.

글·사진=홍지연 기자 j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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