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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평화 오디세이 릴레이 기고

(17) 북한은 한민족 웅비를 기약할 뉴프런티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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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천영우
(사)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로 보이는 북한은 번영의 바다 한가운데 홀로 떠 있는 갈라파고스섬 같았다. 특히 압록강 하구에서 중국과 접한 황금평은 북한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고층건물로 뒤덮인 단둥(丹東)과는 대조적으로 황금평엔 경제특구 기공식을 거행한 지 4년이 넘도록 정적만 감돌고 있었다. 중국이 큰맘 먹고 건설해준 압록강대교도 북한 쪽에 연결도로가 없어 개통을 하지 못한 채 덩그러니 서 있었다.

(17)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북한이 각 도마다 경제특구를 만들어 외자유치에 매달리고 있지만 아프리카와 중동 전쟁터에도 과감하게 투자하는 중국조차 투자를 꺼리는 입지조건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그러나 단둥에서 팡촨(防川)까지 1400㎞의 북·중 국경을 답사하면서 북한 재개발이 앞으로 수십 년간 우리 경제에 성장동력을 공급할 것이란 희망에서 그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북한은 한민족의 웅비를 기약할 뉴프런티어다.

 이 비장의 배후지를 세계 최고의 인프라를 갖춘 산업관광 중심지로 개발하면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잇는 사통팔달의 요지가 된다. 최상의 경쟁력을 갖춘 동북아 경제권의 허브로 도약할 수 있는 것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전략적 안정자로서 동북아의 평화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통일만이 이 원대한 꿈을 현실로 만들 비결이다.

 5박6일의 오디세이 여정 동안 이어진 토론에선 통일보다 평화가 우선이고, 북한의 경제발전을 위해 대규모 투자와 경제협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다. 북한 경제발전이 통일비용을 줄이고 북한 주민의 의식 변화 촉진에 기여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대북 제재를 해제하고 경협을 재개하기 앞서 ‘북핵 불용’ 정책을 포기하고 북한의 핵·경제 병진정책을 지원하는 쪽으로 대북정책을 수정할 것인지 여부부터 결정해야 한다.

북한 신의주와 중국 단둥을 잇는 신압록강대교. ‘중조압록강대교’라고 써 있다. 북한 쪽 연결도로가 없어 개통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국제사회의 핵 포기 압력에 저항할 북한의 체력을 길러주고, 비핵화 협상이 재개될 경우 사용할 경제지원 카드를 버림으로써 핵을 포기할 인센티브를 박탈하는 것은 비핵화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경우 우리 안보에 미칠 해악은 어떻게 할 것인가. 또 우리가 앞장서서 국제사회의 대북 공조체제를 파괴하는 셈이 되는데, 그 부담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북한이 또다시 인공위성을 가장한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나 핵실험을 강행하면 대북제재가 대폭 강화될 것이다. 북한과의 거래 자체가 국제적으로 금지될 개연성도 있다. 그럴 경우 우리가 북한에 투자한 우리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제재를 막는 데 앞장설 수 있을까.

 북한에 현금이 유입될 우려를 최소화하면서 경제개발을 지원하는 방법으로 남북 간 결제에 ‘쌀 본위제’를 도입하는 궁여지책이 있다. 금 본위제 아래서 달러가 ‘금 보관증’으로 출범했듯 북한 근로자의 임금이나 북한에서 수입할 물자 대금을 우리 정부가 보증하는 쌀 교환권으로 지불함으로써 북한 측이 화폐 대용으로 쓸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럴 경우 쌀 교환권은 군사적 전용 우려를 해소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재정 여력을 키워줌으로써 대북 압박 정책의 실효성을 저해하는 문제점을 낳는다.

 한반도 평화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는 북한의 핵 능력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누리는 평화는 지속 가능성이 없다. 김정은의 자비에 의존하는 굴욕적이고 위태로운 평화이며 평화의 환상에 불과하다.

 북한의 핵포기 결단을 유도할 전략은 제쳐두고 지원과 포용으로 북한 지도부를 감동시켜 나쁜 북한을 착한 북한으로 변화시킬 가능성에 5000만 국민의 안위를 전적으로 맡길 수 있을까. 북한이 가공할 파괴능력을 보유하고 증강시켜 나가는 한 평화공존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현실이 대북정책과 통일전략을 제약하고 있다.

 이번 여정에서 북한체제에 가장 큰 위협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성공모델인 남한보다는 사회주의 형제국인 중국에서 올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남한에서 침투할 변화의 ‘바이러스’는 폭 4㎞의 두꺼운 비무장지대가 막아줄 수도 있을지 모르나, 1400㎞의 국경 너머로 빤히 보이는 중국의 눈부신 번영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북한과 중국의 운명을 이처럼 갈라놓은 근본 원인이 시대착오적 북한체제의 본질에 있다는 진실을 북한 주민 대다수가 알게 되더라도 북한체제가 무사할 수 있을까.

 북한 지도부가 핵무기에서 구원을 얻겠다는 망상에서만 깨어난다면 주민들이 중국이나 베트남 수준의 번영을 누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