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통일 논의의 불꽃, 작은 실수로 꺼트려선 안 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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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3일 중국 항일 전승 7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상당한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추가도발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끌어낸 것이나 한·중·일 정상회의 개최에 합의한 것 모두 동북아 안정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이다. 미국과 일본의 반대를 무릅쓰고 열병식에 참석해 어느 때보다 우호적인 한·중 관계를 조성한 것도 남북관계 개선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게 분명하다.

 이런 가운데 박 대통령은 지난 4일 귀국 길에 “통일은 주변국, 나아가 세계의 암묵적 동의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중 간 우호적 분위기에도 불구, 미국과 일본 등 주변 열강의 협조가 없으면 평화통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에서 올바른 인식이다.

 이 같은 박 대통령의 접근 방식에 대해 국민도 높게 평가하고 있다. 방중 일정이 끝난 지난 4일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지난해 세월호 이후 최고치인 54%를 기록했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박 대통령이 구상해 온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구체적으로 실행시킬 대내적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그럼에도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 논의의 불꽃을 되살리려면 놓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중국 외에 미국·일본·러시아 등 한반도 상황과 밀접한 이해관계를 가진 주변 열강들의 협조와 이해를 확보하는 일이다. 이번 방중으로 어느 때보다 한·중 간 분위기가 좋은 건 사실이다. 반면에 우리의 전통적 우방이던 미국과 일본은 한국이 중국에 경도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이를 불식시키려면 어느 때보다 균형 잡힌 외교를 보여줘야 한다. 다음달 16일에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과 10월 말 또는 11월 초로 예정된 한·중·일 정상회의 자리야말로 박 대통령의 외교역량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다.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남북관계 자체다. 아무리 대외적 분위기가 좋더라도 남북관계가 꽉 막혀 있으면 말짱 헛일이다. 한반도 안정, 나아가 평화통일을 향한 첫걸음은 상호 신뢰 구축이며 이는 말로써 한순간에 이뤄지는 게 아니다. 오랜 경험을 통해 상대를 믿을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어야 한다. 결국 평화통일의 주체는 외부 세력이 아닌 남북한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막 훈풍이 부는 듯하지만 남북한 정세는 여전히 살얼음판이다.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쏘거나 4차 핵실험이라도 하면 남북관계는 한순간에 얼어붙는다. 우리 쪽에서 예상치 못한 악재가 튀어나올 수도 있다. 진의가 어떻든 북한 지도자에 대한 ‘참수 작전’ 운운하는 것은 상식 이하다.

 이런 가운데 오늘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실무접촉이 시작된다. 물꼬가 트인 남북 교류의 첫 단추가 채워지는 셈이다. 이 중대사를 원만히 치러내려면 작은 부주의로 대사가 그르치지 않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