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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에서 여름 나는 법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41호 27면

“스님~ 시원하게 입으셨네요.” 베옷이 시원해 보였는지 낯선 분들도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가끔은 이렇게 묻는 분도 있다. “머리카락 없으니까 시원하시죠?” “네? 하하, 있는 것보다야 훨씬 낫겠죠.”

하지만 단언컨대 머리카락이 없어도 여름은 덥다. 겨울엔 일주일에 한 번씩 머리를 깎았는데, 요즘엔 머리카락이 조금만 길어도 어찌나 답답한지 한 주에 두 번은 깎는다. 얼마 전엔 머리카락이 길어 덥고 답답하다고 말했다가 한껏 주변의 웃음을 샀다. 나는 진심인데 옆에서 듣던 분들에겐 투정으로 들렸나 보다.

스님들의 여름나기는 이렇듯 머리카락을 자주 깎는 데서 시작한다. 녹음이 짙어지면 삼베옷을, 8월이 되면 모시옷을 꺼내 입는다. 모시옷을 입으면 나도 모르게 사뿐사뿐 걷고 몸가짐이 더 조신해지는 느낌이다. 한 벌 밖에 없는 모시옷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모시고 산다고 모시옷이라 했을까. 곱게 입고 한철에 한 번 빨아 손질하고 내년을 위해 넣어둔다.

자, 시원하게 머리도 깎고 모시옷도 입었으니 뭘 좀 먹어볼까? 우선 물 한잔 시원하게 마셔야겠다. 산사에선 물만으로 여름이 시원해지니까. 단아하게 홀로 앉아 냉녹차 한 잔 마셔도 좋겠다. ?부생육기(浮生六記)?에 나오는 아내 ‘운(芸)’처럼 찻물에 밥 말아 먹어도 좋으리라.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국수와 수박이다. 스님들이 국수 좋아하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니 말할 것도 없겠다. 국수가 없었다면 출가생활도 못했을지 모르니 말이다.

그럼 수박이 사찰의 복달임 과일이란 것도 아시려나? 수박을 엄청 좋아하던 한 도반스님이 있었다. 선원에서 수행정진 중 “오늘은 복날이니 방선(쉬는 시간)하면 수박 드세요”라는 공지를 받았다. 도반스님은 제일 먼저 다각실로 뛰어갔다. 먹음직스럽게 잘려 있는 수박을 보며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는데, 다들 어찌나 굼뜬지 영 대중이 모이질 않는거다. 드디어 한 어른스님께서 오시더니 “많이 기다렸나보네. 어서 드세요” 하셨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눈앞의 수박을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앗~”하고 짧은 비명과 함께 도반스님은 수박을 뱉었다. 벌이었다. 땡벌이 수박씨처럼 붙어 있던 걸 모르고 먹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입술 주위가 퉁퉁 부풀어 오르더니 얼굴이 수박만 해져서 대중스님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도반스님은 수박 대신 군내 나는 된장을 바르고 다시 정진에 들어가야만 했다. 저녁 방선 후, 도반스님이 안 보여서 찾아보았다. 웬걸, 어디 갔나 했더니 다각실에 앉아 남은 수박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도 좋을까. 도반스님은 이 일을 두고 “내 언젠가 식탐 때문에 일 낼 줄 알았지. 덕분에 음식 먹을 때마다 살피고 조심하는 버릇이 생겼어요”라며 웃었다. 반면 나는 이 일이 있은 뒤로 수박만 보면 땡벌에 쏘인 도반스님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벌에 쏘인 수박만한 얼굴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어쨌든 수박까지 먹고 나면 에어컨이 없어도 다시 공부할 힘, 기도할 힘, 일할 힘이 생긴다. 오늘도 민머리에 땀방울이 이슬처럼 맺히고 옷이 젖는다. 이렇게 또 여름은 간다.

원영 스님 metta4u@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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