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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맛있는?늦여름 제주의 유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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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호 24면

8월 말의 제주는 ‘유유자적’ 늦은 휴가를 즐기기에 더없이 어울린다. 해수욕을 하기엔 늦었지만 ‘제주의 맛’을 여유 있게 즐기기엔 최적의 타이밍이다. 최근 몇 년 새 신선한 제철 식재료를 찾아 서울에서 제주로 보금자리를 옮긴 셰프들이 많이 눈에 띈다. 항구마다 새벽이면 수산물 경매가 벌어지니 펄펄 뛰는 고등어·갈치·한치가 눈앞에 있다. 섬의 동서남북으로 감자·버섯·양파·닭·흑돼지 산지가 포진해 있으니 차로 한 시간만 움직이면 말 그대로 ‘산지직송’이다. 이곳에서 프렌치, 이탈리안, 일식 등 각기 다른 조리법으로 ‘육지의 손맛’을 발휘하고 있는 이들을 찾아가 봤다.

달걀옷을 입혀 구운 안심스테이크. 까만 접시에 담고 치즈를 얹어 겨울 한라산을 표현했다. 문어 파스타를 장식한 감태는 바다 향을 가득 실어나른다. 르씨엘비

르씨엘비


접시를 캔버스 삼아 제주를 그리다, 제주 공항에서 차로 30분만 달리면 애월 해안도로다.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다양한 음식점과 카페가 들어선 곳이다. 두 개 면에 큰 통창을 낸 갤러리풍 식당 ‘르씨엘비’는 이곳에서도 가장 모던한 건물이라 금방 눈에 띈다. 오세득 셰프의 식당 줄라이에서 공력을 쌓은 김태효(34) 셰프는 ‘눈으로도 즐길 수 있는 음식’을 만드는 게 목표다. 전공은 프랑스 음식이지만 한식·이탈리안 조리법도 개의치 않는다. ‘추천 스테이크’도 한식의 육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적당한 두께로 자른 안심을 팬에 한 번 굽고, 저온요리법으로 공들여 익힌 다음, 달걀옷을 입혀 한 번 더 구워냈다. 검은 접시에 담고 하얀 치즈가루까지 얹으니 현무암 지대에 솟은 겨울 한라산을 보는 느낌이다. 감자나 구운 채소 대신 제주산 보리와 귀리를 바닥에 깔고 얇게 저민 토마토를 곁들인 모습도 독특하다. 문어를 살짝 익혀 잘게 자르고 간장 소스를 뿌린 파스타 역시 어린 시절 먹던 ‘계란밥’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흰 밥 대신 문어를, 계란 프라이 대신 삶은달걀 노른자·흰자 으깬 것을 얹었다. 김씨는 “익숙한 ‘틀’을 깨고 자유롭게 요리하고 싶다”고 했다. 줄라이 근무 시절 제주산 당근·보말 등을 접한 후 그 매력에 빠져 아예 제주로 내려온 게 3년 전. ‘내 식당을 낸다면 제주’라고 결심한 터라 식당을 열기까지 준비기간만 꼬박 1년을 보냈다. “속도위반 감시카메라 위치까지 기억할 만큼 섬 구석구석을 다닌 덕분에 베이컨 빼고는 루꼴라(시금치의 일종)까지도 제주산을 사용하고 있다”는 김씨. 최근엔 제주 KBS와 함께 제주 식재료를 탐구하는 방송도 진행중이다.

살짝 데친 딱새우와 채소를 곁들인 차가운 우동 샐러드, 돼지고기와 감자가 어우러진 니구자가, 고등어 살을 짓이겨 2시간 이상 볶아 만든 소보루 밥. 이꼬이&스테이

다양한 과일과 생고등어를 곁들인 카르파초. 바다 빛깔의 접시가 식재료의 싱싱함을 북돋운다. 올리브오일과 매콤한 향신료로 맛을 낸 딱새우 구이.

올 댓 제주

요리와 술 좋아하는 어른들의 공간, 서울에서 15년 간 요리사로 일한 김경근 셰프(40)와 레스토랑 매니저로 일했던 김태은(40) 부부가 ‘맛있는 안주에 가볍게 술 한 잔 마실 수 있는 뒷골목 비스트로’를 꿈꾸며 운영하는 곳이다. 관광객보다는 도민이 타깃이라 관광지가 아닌 제주 시내에 터를 잡았다. 인근에 동문시장과 제주항이 있어 수산물·채소 장보기가 쉬운 것도 이유다. 실내는 정말 좁다. 4인용 테이블이 2개, 바에 딸린 의자 8개가 전부다. 당연히 예약은 필수지만 일단 자리를 잡으면 눈치 보지 않고 늦게까지 ‘올 댓 제주(all that JEJU·제주의 모든 것)’를 즐길 수 있다. 출입문에는 ‘1인 고객을 존중합니다, 영·유아 출입을 금합니다’ 문구도 붙어 있다. 10여 개 안팎의 메뉴는 제철 식재료가 달라지면 조금씩 바뀐다. 요즘은 한치와 고등어를 이용한 안주가 인기다. 무화과, 황금향, 모짜렐라 치즈 등과 함께 생고등어 살을 두툼하게 잘라 섞은 카르파초는 비린내 하나 없는 별미를 선사한다. 제주에서 가장 풍부한 식재료 중 하나인 딱새우를 반으로 잘라 팬에 구운 올리브오일 딱새우 구이도 술 도둑이다.

살짝 데친 딱새우와 채소를 곁들인 차가운 우동 샐러드, 돼지고기와 감자가 어우러진 니구자가, 고등어 살을 짓이겨 2시간 이상 볶아 만든 소보루 밥. 이꼬이&스테이

이꼬이&스테이


서울 메뉴와 제주 식재료의 만남,


수년간의 케이터링 경력을 가진 요리연구가 정지원씨는 서울 동부이촌동에서 ‘이꼬이’라는 작은 선술집을 운영한다. 만화 ‘심야식당’에 등장한 안주들을 중심으로 차려낸 메뉴로 주당들 사이에선 유명한 집이다. 그런 정씨가 제주도 동문재래시장 끝에 4층짜리 건물을 사서 게스트하우스를 차린 게 1년 전. 1층은 식당 공간인데 아침에는 숙박 손님들을 위한 조식을 차려내고, 저녁엔 이꼬이 2호점 격의 술집으로 운영한다. 술안주 메뉴 역시 서울 이꼬이와 비슷한 일식. 다른 게 있다면 제주 식재료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차가운 우동 샐러드’를 만들 때 서울에서라면 칵테일 새우를 사용하겠지만 이곳에선 제주산 딱새우를 사용한다. 일본 가정집에서 즐겨먹는 소보루(일본어로 으깨다, 짓이긴다는 뜻)를 만들 때도 제주산 고등어와 닭고기를 이용한다. 쇠고기 대신 제주산 돼지고기를 얇게 저며 감자와 함께 간장에 조린 메뉴도 인기다. “제주산 감자는 찌거나 조렸을 때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고 단맛이 많이 나는 게 특징이죠.” 휴무일이면 제주 곳곳의 맛집을 찾아다닌다는 정씨. ‘맛있는 집은 널리 알려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니 이꼬이 다음으로 갈 만한 식당을 찾는다면 고민 말고 한번 물어볼 일이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게 익힌 돼지고기 오겹살 구이, 블루베리 잼을 이용한 디저트, 제철 식재료인 한치를 팬에 살짝 구워낸 샐러드. 이스트 엔드

이스트 엔드

낯설지만 따뜻한 영화 속 풍경,(East end). 말 그대로 제주도 동쪽 끝 마을에 있는 식당이다. 제주 토박이라도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식당을 찾기가 쉽지 않다. 평범한 마을 한 구석에 콕 박힌 데다 외관도 전혀 식당 같지 않다. 이발소 아닌가 싶다가도 미닫이 유리문을 열면 비로소 함박웃음이 터진다. ‘카모메 식당’‘해피해피 브레드’ 같은 일본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소박한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여행하며 맛있는 것 찾아먹기를 좋아하던 임정만(33)·이은주(31) 커플이 ‘제주에 식당을 내자’ 결심하고 요리와 디저트를 공부해 내려온 게 2년 전. 장사가 되려면 시내 또는 관광지 주변에 식당을 내는 게 맞지만 “조금만 걸어가면 예쁜 해안도로가 나온다”는 이유 때문에 덜컥 계약을 해버린 게 지금의 장소다. “맛있는 걸 먹고 예쁜 풍경까지 볼 수 있다면 손님들도 기꺼이 찾아와 주지 않을까 믿었죠.”


둘이서만 운영하느라 테이블은 달랑 4개. 메뉴도 전채, 메인, 디저트 순서로 제공되는 코스 한 가지뿐이다. 종류는 그때그때 바뀐다. 전채 요리로는 올리브 오일과 파프리카 파우더로 양념해 뜨거운 팬에 살짝 구워낸 스페인풍 한치 샐러드를 내고 있다. 메인은 여러 향신료로 양념한 후 천천히 익혀 만든 돼지고기 오겹살 구이. 인근 마을에서 나는 감자와 양파를 곁들였다. 디저트도 제철 과일인 블루베리를 이용했다. 제주 시내에서 차로 달려도 한 시간 거리, 과연 손님이 올까. 걱정은 기우였다. ●


제주 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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