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18. 이광수의 두 얼굴-허동현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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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춘원 이광수가 세상을 떠난 지 반백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호평과 혹평의 십자포화를 맞고 있습니다. 그가 남긴 글들이 읽는 사람의 지향과 시공간에 따라 달리 읽힐 소지가 크기 때문이겠지요.

예를 들어 박노자 교수가 동성애를 탁월하게 묘사했다고 평가하신 '사랑인가'에 대해서도 "정치경제학적으로 읽으면 일본적 근대화 추구"라는 등 식민지 근대화를 내비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이도 있습니다.

"국가의 생명과 나의 생명과는 그 운명을 같이하는 줄을 깨달았노라. …나는 이름만일망정 극단의 크리스천으로, 대동주의자로, 허무주의자로, 본능 만족주의자로 드디어 애국주의에 정박하였노라." 이광수가 1910년에 쓴 '나[余]의 자각한 인생'에 나오는 말입니다.

힘을 앞세우는 사회진화론의 세례를 받았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우선 짐승[獸]이 되고 연후에 사람[人]이 되라'(1917)를 쓰기 훨씬 전부터 관념적 '민족'과 '국가'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글이지요.

그렇다면 이광수가 일관되게 추구한 가치는 국가주의 내지 민족주의였고, 기독교나 불교는 민족과 국가에 유익한지 아닌지에 따라 취사선택했던 종속적 가치에 지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그는 문인.사상가.교육자로서 자신이 펼친 모든 활동은 "조선과 조선민족을 위하는 봉사 의무의 이행"('여(余)의 작가적 태도'.1931)이었다고 자부했지요. 장편소설 '흙'(1932)에서도 주인공 허숭의 입을 빌려 "차라리 이태리의 파시스트를 배우고 싶다"고 할 만큼 '국가'를 하나의 절대적 귀의처로 삼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묘비에 "이광수는 조선 사람을 위하여 일하던 사람이다"('나의 묘지명'.1936)라고 쓰이기를 바랐습니다. 자신이 후세에 '민족주의자'로 기억되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이광수는 자신의 사상적 지주였던 '비폭력 민족운동'의 대부 안창호가 1938년에 병사한 이후 '민족을 위한 친일'의 대표적 논객이 되어 "자손의 행복이라는 '공공'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실력양성을 이야기하며 몸을 움츠리던 과거의 자세에서 벗어나, '내선일체'로 상징되는 제국 일본의 하늘 아래 '조선 민족과 일본 민족의 하나됨'이라는 대의를 깨닫지 못하는 일본인의 미욱함을 질타하기까지 했습니다.('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1940)

나아가 "징용에서는 생산 기술을 배우고 징병에서는 군사 훈련을 배울 것이다. …산업훈련과 군사훈련을 받은 동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민족의 실력은 커질 것"이라 하여 조선인이 제국 일본의 성장에 공헌한 만큼 보상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에는 "그대들이 피를 흘린 뒤에도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좋은 것을 아니 주거든, 내가 내 피를 흘려 싸우마"('나의 고백')라며, 조선 청년들에게 침략전쟁에 자발적으로 동참할 것을 호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해방 후 반민특위의 신문을 받으며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正經大路)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오"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은 확신범이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광수의 친일을 '훼절' 내지 '변절'의 문제로 파악하거나, '문학적 공(功).정치적 과(過)'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지적(김철)에 공감합니다.

또 "강자의 문명과 패권을 욕망하는 '친일 내셔널리즘'이 '민족주의적'인가, '친일적'인가, '친미적'인가 하는 문제는 상황 변수에 불과하다"고 보면서, 친일이라는 죄과를 기준으로 그들을 심판하는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파시즘의 망령을 경계하자는 지적(조관자)에 동의합니다.

남북분단 이후 진정 하나되는 민족을 가져보지 못한 우리들이 실재하지도 않은 민족의 이름으로 이광수와 같은 '친일 내셔널리스트'를 처단한다고 해서 우리의 '일그러진 근대'가 사라지지는 아닐 터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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