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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 “유관순 가혹한 고문 사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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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12일 오후 유관순 열사가 투옥됐던 서울 현저동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 앞에서 사죄의 묵념을 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전직 일본 총리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일본이 만든 ‘서대문형무소’에서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는 12일 서대문형무소를 찾아 과거 일본의 만행을 사과한 후 무릎을 꿇고 순국선열을 추모했다. 일본 전·현직 총리가 독립운동 관련 시설에서 무릎을 꿇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하토야마 총리가 처음부터 무릎을 꿇을 계획은 아니었다. 그는 유관순 열사가 투옥됐던 여옥사(女獄舍)에서 ‘민족의 혼 그릇’ 추모비로 이동하며 통역을 통해 “헌화 후 서서 추모를 해야 하느냐, 앉아서 추모를 해야 하느냐?”고 질문했다. 안내를 맡은 서대문형무소 관계자가 “(2001년) 고이즈미 (당시) 총리께서는 무릎을 굽히고 헌화하셨다”고 답했다.

 하토야마 총리는 제단에 흰 국화를 헌화한 후 추모비 앞에 섰다. 추모비를 잠깐 바라보던 그는 신발을 벗고 검은 천 위로 올라서 고개를 숙인 후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목례 후 그는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고 뒷걸음으로 물러나 신발을 신고 한 번 더 묵념했다.

 헌화 후 기자간담회에서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 통치하던 시대에 독립운동, 만세운동에 힘쓴 유관순을 비롯한 많은 분이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돼 고문을 당했고 가혹한 일이 벌어졌으며 목숨까지 잃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말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곧 발표할 ‘전후 70년’ 담화에 대해서는 “한국을 식민 통치하고 중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를 침략했다는 게 역사적 사실로 담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베 총리가 반성·사죄의 마음을 담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안내를 맡은 문석진 서대문 구청장은 “헌화를 준비하며 단 앞에 검은 천을 일부러 깔았다”며 “독일 빌리 브란트 총리의 경우처럼 사죄할지 지켜봤는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진심을 보여줘 감사하다”고 말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이날 유관순 열사에 대해서도 깊은 존경을 표했다. 서대문형무소에 들어선 직후 바로 유관순 열사가 투옥됐던 여옥사를 찾아 헌화하고 묵념했다. 2평 남짓한 옥사에서는 “7명이 함께 갇혀 있었다”는 설명을 듣고는 “부모님이 다 (만세운동) 현장에서 돌아가셨느냐”며 여러 차례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이곳에서 그는 매고 온 붉은 넥타이를 추모를 위해 검은 넥타이로 갈아 맸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서대문형무소 측에 “유관순 옥사를 꼭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먼저 타진해 왔다고 한다.

 이후 하토야마 전 총리는 과거 보안사 건물로 쓰였던 역사관을 찾아 “만세운동에 힘을 다한 모든 선령의 평안함을 바라며 독립, 평화, 인권, 우애를 위해”라고 방명록을 남겼다. 그는 “일본 분들도 형무소를 많이 찾는가”라며 역사 현장 방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서대문형무소에는 연간 60만 명이 방문하며 이 중 일본인 관광객은 약 5만 명이다.

  이날 행사에는 동아시아평화국제회의 조직위원회의 이부영 전 민주당 의원과 유관순기념사업회장인 이혜훈 전 새누리당 최고의원이 함께했다.

글=정원엽 기자 wannabe@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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