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주부도 어르신들도 줄줄 … 시조는 나의 친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8일 경북 문경새재 전국시조암송대회 결승전 장면. 1등을 차지한 김흥수(무대 오른쪽)씨가 시조를 암송하는 모습을 준우승자 권정숙(무대 가운데)씨가 지켜보고 있다. 청중 200여 명이 응원했다.

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총장을 지낸 시조시인 고두석(75)씨는 시조계에서 알아주는 낭송가다. 수백 편을 외운다고 자부한다. 낭송대회에서 여러 차례 상도 받았다. 하지만 이호우(1912∼70) 시인의 4수짜리 연시조 ‘달밤’을 외우라는 주문이 떨어지자 입도 떼지 못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고 했다. 16강전 탈락. 산전수전 겪은 베테랑이지만 역시 수백 명 청중의 눈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지난 8일 저녁 나래시조시인협회·한국문학예술인협동조합이 주최해 경북 문경새재 유스호스텔에서 열린 제3회 전국시조암송대회의 한 풍경이다.

 암송대회는 시조 대중화를 꿈꾸는 시조 시인들의 고심의 산물이다. 계간 시조 잡지 ‘나래시조’의 발행인 권갑하 시인이 SBS의 예능 프로그램 ‘도전 1000곡’에서 착안해 3년 전 만들었다. 가사를 보지 않고 노래를 불러야 하는 예능 프로처럼 『도전! 시조 암송 100편』 책자에 실린 시조 100편을 무작위로 암송하는 방식으로 치러진다. 두 편을 외우게 하는 예선을 통과해 본선에 오른 16명이 1대 1 토너먼트 방식으로 승부를 가린다. 시조 제목이 적힌 막대기를 뽑아 상대에게 외우도록 한 뒤(공격) 순서를 바꿔 상대방이 골라준 시조를 외우는 식이다(수비).

 대중 앞에서 암기력을 견줘 틀리면 바로 탈락하는 방식이다 보니 대회는 흥미진진했다. 외우다 막히면 청중석이 고요해졌고, 서너 수짜리 연시조를 척척 외우면 탄성이 쏟아졌다. 같은 시조가 반복해서 나오자 한 번 출제됐던 시조는 제외하자는 제안이 청중석에서 나오기도 했다. 보는 맛을 떨어뜨린다는 얘기였다.

4강 진출자들. 왼쪽부터 김응순·권정숙·김흥수·이순화씨. 막힘 없이 시조를 외워 감정표현 등을 따져 승부를 가렸다. [사진 한국시조시인협회]

 대전광역시에서 참가한 김응순(57)씨는 “치매인지 걱정돼 시조 외우기에 도전했다가 대회에까지 나오게 됐다”고 했다. 수돗물을 틀어 놓고 깜빡해 집안이 온통 흥건히 젖는 경우가 많아 과연 시조 100편을 외울 수 있는지 궁금했다는 얘기였다. 김씨의 암기력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4강까지 진출해 실수 없이 다섯 편을 외웠지만 감정표현·청중 반응 등에서 밀려 3등을 했다.

 김해의 시 낭송가 권정숙(68)씨는 나이보다 10년 이상 젊어 보이는 외모, 정확한 기억력을 뽐내며 2등을 했다. 상금 500만원이 걸린 1등은 ‘웰다잉(well-dying)’ 강사로 활동하는 서울 홍제동의 김흥수(61)씨가 차지했다. 김씨는 “하루에 한 편씩 100일 걸려 100편을 외웠다. 시조 구절이 연상시키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니까 잘 외워졌다”고 했다.

 암송대회는 시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키워 결국 시조 쓰는 인구를 늘리자는 취지다.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참가 인원이 해마다 조금씩 늘고 있다. 올해는 대구시조시인협회가 자체 암송대회를 열 계획이고, 전남시조시인협회도 대회 개최를 저울질 중이다. 문경 대회를 이끌어 온 권갑하 시인은 “장기적으로 충격요법도 쓸 생각이다. 우승 상금을 1000만원으로 올려서라도 대회 규모를 키우고 싶다”고 했다.

문경=글·사진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