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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삶 느린 생각] 소박한 삶의 뜻 알면 ‘검소한 경제학’도 충분히 가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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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9호 28면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는 이론과 말을 보통 사람이 모두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를 위한 학문적 작업을 지나치게 간단하다고 여기는 발상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보통 사람의 삶에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 일들은 보통 사람에게도 알 만한 것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다.

알 수 없는 경제의 迷路

경제학 이론의 어떤 개념들은 보통사람에게도 알 수 있는 것이면서도, 아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어서 어려움이 생기게 된다. 가령, 성장이나 소비라는 말은 경제를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개념이다. 경제에 대한 발언에서는, 소비 위축은 우려의 대상이 되고 그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온다. 그 경우, 근검절약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전통적인 삶의 지침은 여기에 어떻게 맞아 들어가야 하는가? 근검절약의 경제학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두 개념 또는 요구의 모순은 일단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경제정책이나 이론에서 말하는 소비는 반드시 개인적 차원에서의 검소한 생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여러 사람의 소비 활동의 총계를 검소한 생활의 요구까지를 참조한 수요의 총계를 가리킨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소비가 지배적인 가치가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근검절약의 경제학 존재할 수 있나
모든 이론에는 가치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고 막스 베버는 말한바 있다. 그리고 가치의 차이에서 사실 해석의 차이가 일어난다. 그러나 개인적 필요와 사회적 또는 집단적 필요가 상충할 때,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가치가 상충할 때, 우선하는 것은 후자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정치의 영역에서 증오와 폭력은 개인적으로는 억제되어야 하는 것이면서 국제 관계에서는 오히려 권장되는 덕성이 되고, 이것이 행동의 규범으로서 전자에 우선한다. 경제에서도 이러한 모순관계가 있다. 거기에서도 집단적 인식론에 전제되어 있는 가치는 개인의 규범의 상충을 초월한다. 성장과 소비는 모든 것에 우선하는 이념이면서 다른 모든 개념을 부차적인 것이 되게 한다. 다만 그것은 정치에서와는 달리 다른 가치와 그에 따른 패러다임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는 최근에 국가 경제의 큰 문제에 부닥쳐 그것을 극복하는 데 큰 시련을 겪고 있다. 물론 그것은 엄청난 국가적 부채-수년 내로 그 부채 액수가 국내총생산(GDP)의 2배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하는 거대한 부채로 인한 것이다. 이 문제와 해결 방식에 대한 이론은 전제되어 있는 패러다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차이는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하여 여러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그리스가 빚을 진 것은 그리스를 비롯하여 유럽 여러 나라의 은행에 대한 것이었으나, 부채가 늘어남에 따라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중앙은행(ECB), 그리고 유럽연합 (EU)의 테두리 안에 들어 있는 여러 나라, 그 중에도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에서 출자한 기금을 받은 때문이라고 한다.

빚을 지면 갚아야 하는 것이겠지만, 채무자가 빚을 상환할 능력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채권자는 채무변제 기한을 연기해주거나 탕감해주는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2012년에 채권자들은 채무를 반으로 줄이는 데에 동의했다. 그리고 최근에 합의한 구제방안은 그 기한을 다시 한 번 연기하고 대부금을 추가로 배정하였다. 다른 곳에서 벌이는 경제 활동으로 차용금을 변제할 돈을 벌 수 있는 개인의 경우와는 달리 채무국가가 얻어내는 빚은, 국가 경제를 되살리는 데에 사용할 정도의, 채무액은 넘어가는 액수가 되어야 한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더 빌려주게 되는 돈에 대하여서 채권자는 그 조건들을 점점 더 까다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국가부채에서 가장 많은 부분은 EU국가들, 그 중에도 독일이 출자한 것이라고 한다. 갚아야 하는 것이라 하여도, 빚 갚으라는 독촉이 기쁘게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그리스인들에게 채권자의 중심에 있는 독일에 대하여 반감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하여 반독일 시위가 벌어지고 과거의 침략자로서의 독일이 거론되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히틀러에 비교하는 여론이 일어난다. 우여곡절 끝에 그리스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받아들인 채권국들의 구제금융안(案)에는 사실 굴욕적인 조건들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여러 제도적 개혁에 대한 지시가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관계 EU 기관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도 있어서 그리스의 주권을 제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독일의 전횡, 독일 제국주의에 대한 비난이 나오고, 2차대전 중 독일이 그리스에서 행한 범죄적인 일에 대한 변상을 요구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이러한 피압박 의식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어느 정도까지 참으로 독일의 메르켈 총리나 그보다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던 볼프강 쇼이블레 재무장관의 의도에 억압적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독일어에서, 그리스의 부채 위기라는 말은 슐덴크리제 (Schuldenkrise)인데, 거기에 들어 있는 말, ‘슐트(Schuld)’는 부채, 책임 또는 죄과를 의미하기도 한다. 독일어의 부채라는 말은 변제의 의무를 거의 도덕적 차원에서 생각하게 할 수 있다.

EU는 평화공동체라는 이상의 열매
심정적인 문제야 어떻든 구제책으로서의 구제금융이 그리스 경제를 되살릴 수 있을까? 구제금융은 경제를 활성화하기보다는 그리스를 보다 깊은 부채의 수렁에 빠지게 할 뿐이라는 의견들이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의 논평은 그러한 구제금융이 결코 그리스의 경제를 되살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채권자가 내건 조건들은 주로 긴축을 강조하는 것들로서, 행정체제의 투명화 이외에, 세수 기반의 확대, 복지지출의 축소, 국유시설의 사유화 등의 제안을 포함하는데, 그의 의견으로는, 이러한 긴축 정책은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는 정책이 되지 못한다. 크루그먼은 대체로 말하여 케인즈주의자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미국 경제와 관련하여서도 세수와 지출의 균형과 국가부채의 축소를 위한 정책이 아니라, 과감한 재정, 통화정책을 통해서 경제를 촉진하고 실직문제를 포함한 여러 사회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는 그리스의 경우에도 이러한 적극적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요구되는데, 그리스의 경우, 근본문제는 경제 통합 또는 통화의 통합을 이루었으면서도, 정치적 통합을 이루지 못한 EU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독으로 그러한 정책을 시행할 수가 없다. 크루그먼의 결론은 그리스가 채무부도를 무릅쓰거나 EU 탈퇴를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크루그먼의 제안이 옳은 것인가 아닌가? 7 월초 국민투표가 있기 전, 크루그먼 그리고 그와 의견을 같이하는 또 한 사람의 미국의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이러한 생각에 대하여, 264명의 그리스 경제학자가 반대 성명을 낸 바 있었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또 지정학적으로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또는 EU 탈퇴가 옳지 않다는 의견을 발표한 것이나, 경제 위기의 문제를 떠나서 EU의 의의를 더 넓게 볼 때, 그것은, 1950년의 ‘슈만 선언’에서 시작한 유럽 통합운동의 정신을 망각하는 일로 보인다. EU는 경제적 통합만이 아니라 전쟁 없는 평화 공동체의 이상에서 나온 열매이다. 다만 현실정치의 혼란 속에서, 보다 높은 윤리적 의미를 가진 평화의 이상이 있었다는 사실은 쉽게 잊혀지는 것으로 보인다.

태양 전기가 보여준 그리스 회생의 빛
크루그먼 그리고 스티글리츠에 있어서 경제 활성화는 중요한 관심사이지만, 그것은 고용문제 그리고 경제적 평등의 문제에 이어져 있는 관심사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보다 큰 인간적 의미가 자리해 있다. 그들의 반(反)긴축 정책 옹호는 인간적 고려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문제의 전체는 더욱 복잡한 것일 수 있다. 비교적 젊은 경제학자인 리처드 스미스의 저서 『녹색자본주의: 실패한 신(神)』이 올해 초에 출판되었다. 본 칼럼에서도 언급한 일이 있는 스미스는 일체의 성장 중심의 경제학을 비판적으로 본다. 그것은 결국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종말을 가져 오게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그의 공격 대상에는 밀튼 프리드먼과 같은 보수주의 경제학자로부터 크루그먼과 같은 진보주의 경제학자를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자본주의를 적절하게 억제하고 수정함으로써, 경제적 번영과 환경 보존을 조화할 수 있다는, ‘비성장의 경제’, ‘녹색자본주의’와 같은 수정주의의 아이디어을 비판한다. 스미스의 생각으로는, 자본주의는 아무리 수정해도 경쟁·신상품개발·이윤추구의 추동력을 벗어날 수 없고 성장 지향을 벗어날 수 없다. 문제 해결은 이것을 조정하는 정치 기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공산권 몰락 이전이었더라면 스미스는 사회주의 체제와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내세우는 것은, 민주적으로 계획된 환경 사회주의 경제이다. 그것이 어떤 체제인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이것이 오래 걸리고 실현하기 어려운 이상이라는 것은 스미스 자신도 인정한다.

그런데 새로운 기술 개발과 이상의 도움을 받는 녹색자본주의는 참으로 불가능한 것일까? 얼마 전 인터넷에는 그리스의 태양전기 운동에 대한, ‘그린피스’ 운동의 지도자 쿠미 나이두의 글이 실렸다. 그리스에 풍부한 것이 태양광인데, 2009년에서 2013년까지 있었던 태양전기 운동으로 그리스에서는 저소득층의 전기료가 현격하게 줄고, 수많은 새 직장이 만들어졌다. 그 수익은 최근에 있었던 연금 삭감액에 맞먹는다. 나이두의 글의 제목은 ‘그리스를 태양 전기화하는 것이 금융위기를 벗어나는 방법이다’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반드시 비현실적인 꿈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는지 모른다.

의로움은 이웃간 바른 관계의 바탕
또 하나의 뉴스를 보태면, 지금 유럽이 부딪치고 있는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오는 난민 문제이다. 이 문제에 자극되어 반(反)난민 정당이 생기고, 국경에 담을 쌓는 정책까지가 시도된다. 독일의 경우, 2014년의 통계에 의하면, 난민 신청자 수는 20만을 넘고, 그 중 약 2만 명이 입국허가를 획득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총리 토르슈텐 알비히(사회민주당)의 발언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가 “난민 문제 해결에 예산이 아니라 인도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 뉴스에 전해졌다. 독일에서 휴머니즘의 원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하는 정신적 기초가 될 수 있다.

환경의 수용능력에 비하여 사람의 욕심이 과도하다는 사실이 문제라고 한다면, 핵심적인 것은 이 욕심을 줄이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요구에 합당한 것이 검소한 삶의 이상이다. 그 이상은 얼핏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마지못한 필요의 기율이 아니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말에, “거친 밥을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어도 거기에 즐거움이 있고 의가 아닌 부귀는 나에게 뜬 구름과 같다(飯蔬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其在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는 것이 있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소박한 삶에 수반되는 즐거움과 의로움이다. 검소한 삶은 삶의 즐거움의 근거이다. 또 중요한 것은 의로움-이웃 간의 바른 관계이다. 여기의 소박한 삶의 이상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인생지침을 말한 것이다. 이에 따른, 검소의 경제학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