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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5000억 피해 내고 파산한 회사 … 2200억대 은닉 자금 행방 오리무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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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연 30% 수익률’을 내세웠던 삼부파이낸스가 파산하면서 3만여 명이 1조5000억원 피해를 봤다. 1999년 검찰 수사 소식에 투자자들이 돈을 찾으러 삼부파이낸스 지점에 몰린 모습. [중앙포토]

“회장님, 제발 내 돈 좀 돌려주세요.”

 지난 22일 오후 6시20분 부산시 연제구 거제동 부산지방검찰청 횡단보도 앞. A씨(71·여)가 검찰청에서 나오는 한 남성을 붙잡고 호소했다. “남편이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평생을 겨우 모은 돈”이라며 “제발 되돌려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방금 검찰청에 제출한 탄원서 사본”이라고 했다.

 A씨는 “회사 돈 수천억원을 가지고 잠적했던 회장님 회사의 임원이 며칠 전 검찰에 구속됐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15년 전 투자금을 돌려받으려고 탄원서를 제출했다”고 말했다. ‘회장’이라고 불린 남성은 묵묵히 이야기를 들은 후 “검찰에서 수사하고 있으니 기다려보자”며 자리를 피했다.

 이 남성은 한때 국내 최대 규모의 파이낸스사를 이끌었던 양재혁(61) 전 삼부파이낸스 회장이다. 1996년 그가 부산진구 범천동에 설립한 삼부파이낸스는 연이율 20~30%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워 투자자를 모았다. 회사는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힘든 중소기업에 급전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다. 고객 투자금을 바탕으로 건설·엔터테인먼트 등 5개 계열사를 설립할 정도로 번창하는 듯했지만 99년 부도나면서 3만여 명에게 1조5000억원대의 피해를 주고 사라졌다.

 ◆체육·영화계 큰손=80년대 말 사채업을 시작한 양 전 회장은 96년 삼부파이낸스 설립 후 도산 직전까지 약 3년간 화려한 삶을 살았다. 벤츠 승용차를 주로 탔고 양복과 구두는 대부분 이탈리아 브랜드였다. 고급 아파트를 소유하고 경호원을 거느렸다. 부산에서는 주로 해운대의 고급 호텔에 머물렀다. 체육·영화계에서도 이름을 알렸다. 97년에는 부산시체조협회장에 취임해 2년 뒤 ‘삼부파이낸스컵 국제체조대회’를 개최해 화제를 일으켰다.

 영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98년 개봉한 ‘엑스트라’를 시작으로 영화 제작에 투자를 늘려갔다. 심형래 감독이 제작한 ‘용가리’에도 22억원을 투자하는 등 2년 새 100억원이 넘는 돈을 영화·공연계에 쏟아부었다. 충무로의 ‘큰손’으로 불릴 정도였다. 당시 세계적인 영화배우 앤서니 퀸(1915~2001)을 한국으로 초청, 소년소녀가장 돕기 사인회를 열어 주목을 끌기도 했다.

 회사가 성장하면서 뭉칫돈을 만지게 된 그는 씀씀이가 컸다. 양 전 회장의 당시 측근 B씨(69)는 “양복 주머니에 억대 수표를 가지고 다녔다”며 “친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베풀었다”고 했다. 술과 사람을 좋아했던 양 전 회장은 기분에 따라 하루에 1000만원이 넘는 돈을 술값으로 쓰기도 했다고 이 측근은 설명했다.

 부산시체조협회장 때는 체조 코치 등 주변인의 결혼 축의금으로 200만~300만원씩을 냈고, 자신의 마음에 든 회사 직원들에게 수시로 보너스 3000만원을 주기도 했다고 양 전 회장의 당시 지인들은 전했다.

 ◆삼부파이낸스와 양재혁의 몰락=99년 9월 대검 중수부는 양 전 회장을 소환했다. 고객 투자금을 빼내 개인적 용도로 사용한 혐의를 잡고서다. 여기에 양 전 회장이 정치권에 자금을 댔다는 의혹이 일면서 삼부파이낸스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불안감을 느낀 고객들이 투자금 회수에 나선 것이다. 양 전 회장이 부산파이낸스협회장을 맡고 있던 상황이라 협회 소속 10개 파이낸스사에서도 같은 움직임이 일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 양 전 회장이 구속되면서 업계가 동요하자 부산파이낸스협회가 ‘중도환매 중단’을 선언했다. 투자자들이 직원들의 멱살을 붙잡거나 도망치는 직원을 잡으러 다니는 등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여기에 파이낸스사들이 영업장 문을 닫고 직원들이 잠적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29개 파이낸스사가 폐업해 고객 3만여 명이 1조5000억원을 날렸다. 양 전 회장은 징역 4년6월을 선고받고 수감돼 2004년 출소했다. 모든 재산은 압류당한 상태였다.

 ◆은닉자금 2200억원의 행방=삼부파이낸스가 부도나면서 피해자들이 속출하자 당시 수형자 신분이었던 양 전 회장은 2000년 6월 계열사 임원과 고문변호사 등을 통해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다. ‘캐피탈코리아엔젤투자’다. 투자자들의 피해 회복을 위해 삼부파이낸스의 계열사 자산을 모아 관리·보관한다는 목적으로 세웠다. 하지만 이 회사 직원 일부가 회사 돈을 빼돌린 혐의로 수사 대상에 오르는 등 피해 회복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2011년 이 회사 대표 하모(66)씨가 잠적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됐다. 회사 자금 횡령 의혹으로 검찰 수사 대상에 올라 있던 하씨였다. 양 전 회장은 “하씨가 삼부파이낸스 잔여 자금 2200억원을 빼돌리고 잠적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하씨의 잠적으로 수사는 중단됐다. 양 전 회장은 “하씨를 찾겠다”며 3개월간 잠적했다가 위계공무집행방해로 기소돼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사건은 잊히는 듯했지만 검찰이 최근 하씨를 체포해 구속하면서 다시 수면에 떠올랐다. 김동주 부산지검 형사3부장은 “하씨가 회사 자금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지만 실제 그 규모가 2200억원에 달할지는 조사를 진행해야 알 수 있다”며 “하씨 명의로 된 재산이 없어 다른 방법으로 자금을 숨겼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 중”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22일 양 전 회장과 하씨에 대해 대질신문을 진행했다. 양 전 회장은 “하씨가 돈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부산=차상은 기자 chazz@joongang.co.kr

[S BOX] “매달 받는 기초생활수급비 50만원이 수입의 전부”

‘회장’이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았다. 옷차림은 남루했다. 베이지색 양복 바지는 구김이 심했고, 푸른색 셔츠는 세탁한 지 오래된 것처럼 군데군데 얼룩이 남아 있었다. 거기에 떡진 머리카락까지….

 22일 부산지검에서 만난 양재혁(61·사진) 전 삼부파이낸스 회장은 “징역형을 살면서 전 재산을 압류당했다”며 “매달 동주민센터에서 받는 기초생활수급비 50만원이 수입의 전부”라고 말했다. 인천시에 주소를 둔 그는 최근 부산지검이 삼부파이낸스 잔여 자금에 대한 수사를 재개하자 부산의 한 모텔에서 머물고 있다. 검찰에서 부르면 바로 달려가기 위해서다. 이날도 검찰에서 진술하고 나왔다.

 양 전 회장은 채권자 29명과 함께 최근 검찰에 구속된 잔여 자금 관리회사(캐피탈코리아엔젤투자) 대표 하씨를 고소한 상태다. “회사 잔여 자금 2200억원을 되찾게 되면 그 돈을 채권자와 피해자들에게 돌려주겠다”며 “영세 상인 등 피해자 200명을 추려놓았다”고 했다. 나머지 피해자에 대해서는 “실제로는 원금 이상으로 큰 돈을 벌어갔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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