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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 세컨드 레이디' 질 바이든, 한국의 경단녀를 말하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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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오후 1시10분 오산공군기지. VIP용으로 개조한 미 공군 군용기가 착륙했다. 조 바이든 미 부통령의 부인 질 바이든(64) 박사가 분홍색 가디건에 큰 꽃무늬가 프린트된 하얀 원피스를 입고 밝은 표정으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미국의 ‘세컨드 레이디’가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는 순간이었다.

그가 한국에 온 이유는 여성의 권익 신장에 대한 관심 고취를 위해서였다. 만 하루를 머문 뒤 19일 오전 베트남으로 출발, 라오스까지 방문하며 아시아 3국에서 관련 활동을 벌이는 것이 목표이다.

백악관 관계자는 그가 도착하기 직전 “주의해주셔야 할 사항이 있다. 기사를 쓰거나 세컨드레이디와 이야기할 때 ‘바이든 여사(Mrs. Biden)’가 아니라 ‘바이든 박사(Dr. Biden)’라고 해달라”고 요청했다. 세컨드 레이디이기 이전에 교육학 박사이자 균등한 기회 제공을 통한 양성평등 실현을 위해 애써온 활동가다운 요청이었다. 실제로 백악관도 보도자료 등을 낼 때 바이든 박사를 공식 호칭으로 쓴다. 퍼스트 레이디 미셸은 오바마 여사(Mrs. Obama)라고 한다.

바이든 박사가 한국에서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오후 여성가족부 주최로 동대문디지털플라자(DDP)에서 연 리셉션에서 더 명확해졌다. 에스프리 디올 전시관에서 진행된 리셉션에서 바이든 박사는 “글로벌 개발 분야에서의 우수한 성과, 훌륭한 거버넌스 등 한국의 발전은 한국 여성의 근면함과 기여가 없었다면 성취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사회든, 정부든, 기업이든 간에 (의사결정)테이블에 여성의 자리가 있을 때 우리는 훨씬 더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번 아시아 방문의 초점은 교육의 힘에 맞춰져 있고, 여성들의 리더십 발휘와 일터에서의 동등한 기회 확보가 핵심”이라며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교육 면에서는 충분한 성취를 이뤘지만, 일자리 문제에 있어서는 아직 많은 도전에 직면해있다”고 했다.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 문제를 비롯, 여성이 일터에서 남성과 동등한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더. 또 “한 나라의 잠재력이 최대한 발휘되려면 여성이 먼저 잠재력의 최대치에 도달해야 한다”며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보면서 이것이 진실임을 깨달았고, 전세계에서 교육이 미치는 영향을 직접 목격했다”고도 했다.

그는 방한 직전 보그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도 “한국 여성들은 지난 몇십년 간 놀라운 발전을 이뤘지만, 미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 여성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온전히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며 “자녀를 가진 일하는 여성들과 대화를 통해 이들의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지, 한국 정부는 어떤 계획을 실천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바이든 박사 역시 경단녀였다. 1977년 당시 바이든 상원의원과 결혼한 뒤에도 그는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동시에 교육학 석사 학위를 땄다. 하지만 81년 막내딸을 낳은 직후 세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일을 쉬면서도 소아병원의 청소년 센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석사 학위도 하나 더 땄다.

바이든 박사는 1993년 대학 강단에 서면서 온전히 ‘컴백’했다. 2007년에는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바이든 박사는 보그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저 역시 워킹 우먼으로서, 일하는 여성에게 요구되는 헌신과 희생을 경험했다.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 학교로 돌아갔을 때 상근직 교사로 일하는 동시에 세명의 아이들도 키워야 했다. 한시간 거리를 운전하며 학교를 오갔던 시간, 가족과 함께 보내지 못해 죄책감을 가졌던 시간이 생생히 기억난다. 석사학위 두개와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데 15년이 걸렸지만, 교육은 제가 열정적으로 하고 싶은 평생의 일이기에 버텨낼 수 있었다.”

바이든 박사는 지금도 미 노던버지니아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남편이 부통령이 된 뒤에도 일을 그만두지 않은 보기 드문 케이스다. 남편의 취임 1주일만에 그는 교실로 돌아갔다.

DDP에서 열린 리셉션에 앞서 비구니 스님들이 수도하는 서울 은평구의 진관사를 찾아서도 바이든 박사는 여성의 교육을 주제로 스님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1011년 지어진 진관사는 사찰음식으로도 이름난 산사이며, 템플스테이에 있어서는 외국인 전용사찰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지난해에는 백악관 부주방장 샘 카스가 방문해 콩국수 등을 만드는 법을 배워갔다.

진관사를 방문지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백악관 관계자는 “세컨드 레이디가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는 법과 이들의 삶이 다른 여성들에게 어떤 영감을 주는지 궁금해했다.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의미도 있다”며 “바이든 박사가 직접 이 곳에 오겠다고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주지 계호스님은 합장 인사를 하며 경내에 들어선 바이든 여사의 손을 꼭 잡고 절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총무 법해스님이 장독대를 보여주며 “3년간 발효한 된장이다. 500년 전에도 진관사 된장을 임금님께 진상했다”고 소개하자 바이든 박사가 감탄하기도 했다.
이들은 자리를 옮겨 우전(雨前·곡우 전후 따는 햇차) 녹차와 절편을 들며 1시간 정도 정담을 나눴다. 바이든 여사는 이후 기자들과 만나 스님들을 ‘자매들(sisters)’라고 부르며 “여성을 교육하고 그들의 권익을 신장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소개했다. 진관사 관계자는 “진관사는 바이든 박사를 미국 명예불자로 임명했다”고 전했다.

스님들은 바이든 박사에게 ‘부처님의 그릇’이라 불리는 발우 한 벌을 선물했다. 동행한 마크 리퍼트 주한 미대사에게는 아들 세준의 탄생을 축하하며 배냇저고리를 선물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사진=주한 미 대사관
영상=진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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