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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지적재산을 훔치는 아슬아슬한 통로, 산업스파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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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호 20면

그림 1 조반니 벨리니, 『신들의 향연』, 1514년. 술에 취해 누워있는 여신을 한 사내가 더듬으려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 그림에서 눈길을 끄는게 청화백자다.

그림 1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의 작품이다. 나중에 도소 도시(Dosso Dossi)와 티치아노(Tiziano)가 배경을 중심으로 수정을 했다. 이 그림에는 위에 설명한 등장인물 외에 낯익은 신들도 등장한다. 프리아푸스 옆에 앉아 술잔을 들이키는 태양의 신 아폴론, 헬멧을 쓴 전쟁의 신 머큐리, 그 옆에 붉은 옷을 입고 있는 최고신 주피터가 있다. 왼편에서 술을 따르고 있는 어린 아이는 술의 신 바쿠스다. 신들에게 음식과 술을 접대하는 이들은 반인반수의 사티르와 님프들이다. 질문은 그림이 제작된 16세기의 인기 물품을 찾는 것이다. 답은 바로 그릇이다. 중국에서 제작돼 세계적 명품으로 인기를 끈 청화백자다. 화가에게 그림을 요청한 이가 알폰소 1세 데스테(Afonso I d’Este)라는 인물인데, 중국산 자기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그 취향에 맞춰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28> 산업 정보의 비밀스런 확산

이 그림은 중국산 자기를 그린 최초의 유럽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에서 중국 자기는 심심치 않게 정물화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화려한 사물들을 그려 역설적으로 인생무상을 설파하는 바니타스 정물에 중국 자기가 등장한다는 사실은, 중국 자기가 그만큼 유럽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중국 자기에 대한 유럽인들의 수요는 엄청났다.

16세기에 포르투갈 상선에 의해 처음 소개된 중국 자기는 곧 이웃 국가들에도 알려지게 됐다. 각국의 동인도회사들을 통해 중국 자기가 속속 수입되었고, 왕족과 부유층은 자신의 저택을 이 명품으로 꾸임으로써 부와 취향을 과시하고자 했다. 청나라의 강희제(재위 1661~1722)는 자기 산업을 중국의 대표 수출산업으로 부흥시켰다. 요업 중심지 징더전(景德鎭)은 수출용 자기를 생산해 해외로 공급하는 ‘세계의 공장’이 되었다. 1721년 한 해에 영국 선박 네 척이 운송한 자기만 해도 80만 점에 이르렀다.

왜 유럽 국가들은 이런 자기를 생산하지 않은 것일까? 생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했다. 색이 깨끗하고 맑은소리를 내는 경질자기(硬質磁器)를 생산할 기술을 유럽은 보유하지 못했다. 유럽으로부터 막대한 돈이 중국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 유럽 국가들이 택한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기술을 중국으로부터 빼내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예수회 신부였던 프랑수아 자비에 당트르콜(François Xavier d’Entrecolles)은 징더전이 위치한 장시성(江西省)에 파견되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가마터를 방문하고, 중국 서적을 뒤지고, 예수회로 개종한 중국인들에게 캐물어 경질자기 제조비법을 알아냈다. 고령토, 장석, 석영이 섞인 재료를 써서 고온에 가열하는 것이 핵심 열쇠였다. 1712년 그는 이 비법을 편지에 적어 프랑스의 예수회로 보냄으로써 수 세기 동안 비밀로 남아 있었던 중국식 자기 제조법을 유럽에 전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독일과 영국도 중국 자기의 비밀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독일의 마이센 자기와 영국의 웨지우드 자기가 탄생할 밑거름이 마련된 것이다.

그림 2 얀 판 데어 스트라트(조반니 스트라다노), 『누에』, 1590~1605년 무렵.

중국 비단 기술 빼돌린 수도사
정보가 중국으로부터 빠져나갔다는 사실은 중국이 기술적 우위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양상은 이미 6세기에도 나타난 바 있었다. 로마시대부터 중국은 비단이라는 신비로운 직물의 공급지로 이름이 높았다. 로마제국의 재정에 위협이 된다는 불만이 나올 정도였다.

동로마(비잔틴)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로부터 비단을 수입하였는데, 페르시아가 무역을 자주 중단하자 대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기독교 일파인 네스토리아교(경교) 수도사 두 명이 551년에 중국에 들어갔다.

이듬해 그들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뜻에 따라 누에고치를 몰래 빼내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이들이 중국의 기술누설 금지정책을 피할 수 있었던 데에는 대나무 지팡이 안에 누에고치를 몰래 숨겨 나온 꾀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국내에 들여온 것보다 800년 앞선 이야기다. 그림 2가 이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얀 판 데어 스트라트(Jan van der Straet, 일명 조반니 스트라다노)의 작품을 판화로 제작한 것이다. 수도사들이 지팡이에 든 누에고치를 황제에게 바치고 있고, 그 뒤로 누에를 키워 비단을 만드는 그림이 액자에 담겨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 가장 두드러진 산업스파이 활동으로는 산업혁명 시기에 영국의 기술을 유출하려는 시도를 들 수 있다. 18세기부터 프랑스는 영국의 기술을 빼오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산업 기술과 지식을 가진 제조업자와 상인을 꾀어 프랑스로 데려오기 위해 금전적 유인을 포함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이에 대응해 영국은 신기술이 해외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기술유출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산업스파이를 막기 위해 영국이 펼친 노력이 늘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세계 경제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산업스파이 활동으로 영국의 면공업 기술을 미국으로 가져간 사건을 들 수 있다. 주인공인 영국인 새무얼 슬레이터(Samuel Slater)는 어려서부터 면공장에서 일했다. 그는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발명가 리처드 아크라이트(Richard Arkwright)가 만든 수력방적기를 사용하는 공장주로부터 도제교육을 받았다.

21세가 되자 그는 면방적 기술을 완전히 익혔다고 자부하게 되었다. 당시 영국은 기술유출 금지법을 엄격히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공업화를 시작하지 못한 미국에서는 신기술을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에게 큰 보상을 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림 3 슬레이터의 면공장, 1800년대 초.

산업 스파이 색출 위한 노력도 치열
1789년 슬레이터는 마침내 방적기계 디자인을 꼼꼼히 외우고서 뉴욕 행 선박에 몸을 실었다. 로드아일랜드에서 투자자를 찾은 그는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총동원해서 미국 최초의 수력방적공장을 짓는데 성공했다. 그림 3은 이 공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급류가 몰아치는 계곡에 위치한 공장이 역동적으로 느껴진다. 미국 산업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비적 상징물이다.

1807년 영국이 미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대미 금수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이때부터 미국에서 수많은 면공장이 설립되었다. 슬레이터의 면공장이 본보기가 되었음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1812~1815년의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에는 140개의 면공장이 운영되면서 26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슬레이터는 미국 공업화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그를 ‘미국 산업혁명의 아버지’라고 칭송했다. 영국에서 ‘배반자 슬레이터(Slater the Traitor)’라고 부른 것과 대조적이었다. 미국인에게는 경제대통령으로 추앙받은 그였지만 영국인에게는 산업스파이였을 뿐이다.

산업스파이의 활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많은 국가들이 공업화의 길에 접어들면서 기술유출의 유인은 더욱 커졌다. 후발국은 선발국이 가진 핵심기술을 빼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기업가 개인만이 아니라 국가가 이런 행위를 묵인하거나 심지어 도와주었다.

20세기 중반 세계 질서가 냉전체제로 재편되자, 국가 차원의 산업스파이 활동은 더욱 중요해졌다. 체제경쟁이 붕괴한 오늘날에도 산업스파이 활동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산업스파이 활동은 제도화된 기술이전의 장벽을 비밀스런 방식으로 뚫는 독특한 종류의 교류다. 이를 통해 지구는 오늘날에도 지극히 은밀한 방식으로 세계화되고 있다.



송병건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세계경제사 들어서기』, 『경제사: 세계화와 세계경제의 역사』,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 『산업재해의 탄생』 등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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