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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소설 읽기] 진심 몰라주는 가족, 소셜포비아에 빠지는 오바 요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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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호 24면

만화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해 결국 스스로 은둔과 고립을 택한다. 아래는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 [사진 민음사]

최근 아들러 심리학이 각광받는 이유는 다른 어떤 심리학 이론보다 ‘구체적인 인간관계’의 측면에서 실질적 처방을 내려 주기 때문인 것 같다. 프로이트 심리학이 트라우마의 기원을 머나먼 과거에서 찾음으로써 지나치게 모든 문제를 어린 시절의 성적 경험으로 환원시키고, 융 심리학이 꿈이나 무의식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심층적인 문제를 분석함으로써 자기신비화의 위험에 빠질 수 있는 반면, 아들러 심리학은 놀랍도록 쉽고 단순하다. 어떤 상징도 은유도 없다. 프로이트와 융이 끊임없이 신화와 종교, 문학과 예술에서 사례를 가져오는 반면, 아들러는 실제적 인간관계에서 문제를 도출하고 해답을 유도해 낸다. 아들러 심리학에서 ‘아주 작은 용기를 낸다면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자기계발적 메시지를 발견하는 것은 빤한 결말이지만,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은 분명 실질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실용적인 해답을 내놓기 때문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나는 이들 세 명의 심리학자 중에서는 융을 가장 좋아하지만, 아들러 심리학의 꾸밈 없는 단순성에도 매력을 느낀다. 특히 너무 복잡한 심리적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는 아들러처럼 단도직입적으로 사태의 핵심을 뚫고 들어가는 해결 방식이 좋다. 최근에 ‘소셜포비아(socialphobia)’라는 심리학 용어가 유행을 타기 시작하자 나는 아들러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사회에 대한 공포, 집단생활에 대한 불안, 인간관계에 대한 혐오야말로 현대인이 처한 실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 관계에서 해법 찾는 아들러 심리학
소셜포비아, 즉 사회공포증은 흔히 자기혐오에 뿌리를 둘 때가 많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다른 사람과 어울리며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기가 두려운 것이다. 외모나 학벌 콤플렉스에 시달리거나, 사회적 지위와 체면에 대한 강박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주로 ‘남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이 싫어 사회생활을 기피하곤 한다.

반대로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사회생활을 기피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세상은 온통 마음에 안 드는 것들 투성이기에 그 끔찍한 세상의 일부로 스스로를 편입시키는 일이 죽도록 싫은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나 다자이 오사무(1909~1948)의 『인간실격』의 주인공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들은 ‘왕따’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상 전체를 교묘하게 따돌린다. 세상이 아름다워지기는 애초에 글렀으니 적극적으로 은둔과 고립을 택하는 것이다.

자기혐오가 강한 사람들의 소셜포비아에는 ‘이 사회를 그리워하고 동경하는 마음’이 남아 있어 언젠가는 사회로 복귀할 희망이 있지만, 세상을 증오하거나 사회 자체에 무관심한 경우는 ‘세상과 자신을 연결할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하기에 더 위험하다. 『인간실격』의 주인공 오바 요조가 바로 그렇다.

요조는 사회생활에서 기쁨을 누리는 감각의 회로가 끊긴 상태다. 그는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이 타인과 관계 맺음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불신한다. 자신처럼 세상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린 여인과 동반자살을 하려다가 자신만 살아남은 끔찍한 트라우마까지 안고 사는 이 청년은 도무지 세상에 관심이 없다. 요조의 사진을 보면 이상하게도 기이하고 섬뜩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증언처럼, 이 사람에게는 기쁠 때 환호하고 슬플 때 눈물 흘리는 감수성 자체가 아예 처음부터 결핍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요조에게는 묘하게 순진하고 귀여운 구석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만화를 그리고 싶어 한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것은 그가 아직 세상을 향한 희망을 느끼고 있다는 것, 세상과 섞이고픈 마음을 애써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자신 알아주는 친구와의 만남이 유일한 기쁨
사실 요조에게는 자신의 모습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학창 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다케이치다. 요조는 사람들에게 진짜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 만년 오락부장처럼 언제 어디서든 사람들을 일단 웃기고 보려는 유머 강박이 있었는데, 다케이치는 처음부터 그의 ‘웃음 가면’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요조는 자기 안의 섬뜩한 내면을 드러내는 자화상을 그리곤 했는데, 그 그림을 솔직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사람도 다케이치뿐이었다. 다케이치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그린’ 그림이 아니라 ‘무서운 것을 무섭게 그린’ 요조의 괴물 그림을 이해한다. 괴물 그림을 세 장이나 연달아 보여 주자 다케이치는 호기롭게 예언한다. “넌 훌륭한 화가가 될 거야.”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 진짜 재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난 순간은 요조가 경험한 유일한 기쁨의 시간이었다.

요조가 꿈에 그리던 미술학교에 진학하도록 아버지가 조금만 협조해 주었더라면, 완전히 사회생활을 포기하는 상태까지 추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온갖 ‘소셜’한 태도로 유능한 정치인의 면모를 보여 주는 아버지가 아들에게는 그만큼의 관심이나 열정을 보이지 않는다. 그의 가족들은 요조가 그저 ‘남을 웃기는 재주가 있는 아이’인 것만 알지, 진짜 재능이 그림 그리기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학창 시절 잠시 친하게 지낸 친구 다케이치보다도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가족들 때문에 요조의 사회공포증은 더욱 극대화된다.

다자이 오사무는 열한 명의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고리대금으로 큰돈을 번 뒤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공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그런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에 대한 죄의식으로 괴로워했다고 한다. 자전적 성격이 강한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가 겪는 고통도 바로 ‘가족’과 진실한 관계를 맺지 못한 자기 인생에 대한 회한에서 비롯된다.

요조에게는 “실패해도 괜찮아, 넌 지금 이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멋지고 소중한 존재야!”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다자이 오사무 역시 취직 시험에 떨어졌다는 이유로 자살을 시도했고, 연인과 동반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으며, 마약에 중독돼 감금되기도 했다.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 어디에도 완전히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었던 것 같다.

가면 속 상처 어루만지기가 치유의 시작
캐서린 제타 존스가 최고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셰프로 등장하는 영화 ‘사랑의 레시피’에는 짧은 퀴즈가 등장한다. “프랑스 요리에서 세 가지 핵심 비결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첫째는 버터, 둘째도 버터, 그리고 셋째도 버터”다. 프랑스 요리에서 버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풍자하는 넌센스 퀴즈였는데, 이것을 아들러 심리학에 적용해 보자.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첫째는 협력, 둘째도 협력, 그리고 셋째도 협력이다.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다. 이 당연한 원리를 어떤 위급한 순간에도 결코 잊지 않는 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이다.

당신 주변에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앓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바로 그 사람이 당신이 도와야 할 첫 번째 타인이다. 만약 그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주변에서 가장 따뜻한 눈빛을 가진 이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우리는 스펙과 통장과 주민번호로 이루어진 인공지능 로봇이 아니다. 서로를 돕고 배려하고 걱정하고 보듬어 안음으로써만 행복해질 수 있는 지극히 예민하고 섬세한 ‘사회 지향적’ 존재, 인간이다. 집단적 소셜포비아에 빠진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타인의 ‘가면’ 뒤에 숨겨진 진심을 알아보는 혜안이다. 웃음과 친절과 과잉 충성의 가면 뒤에 가려진 숨은 상처를 서로가 어루만질 때, 우리 안의 소셜포비아는 비로소 치유되기 시작할 것이다.

정여울 문학 평론가 suburb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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