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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전략] 백신처럼 작은 대가 지불하고 큰 혜택 얻는다면 전략적 성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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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에피루스의 왕 피로스가 스파르타를 공략하는 모습(장 밥티스트 토피노 레브룬의 18세기 그림). 피로스는 로마 등과의 많은 전투에 승리했지만 피해가 쌓여 스파르타와의 전투 직후 패망하고 말았다.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가 한국에 유입된 지 딱 두 달이다. 지난 5월 4일 중동에서 귀국한 1번 환자가 고열 등의 증상 후 5월 20일 환자로 처음 확진됐다. 지금까지 183명의 확진환자가 발생했고 이 가운데 33명이 사망했다. 환자와의 접촉 후 최장잠복기가 지날 때까지 새로운 감염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면 확산이 종료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다. 메르스 통제가 어려운 것은 무엇보다 치료제나 백신이 없기 때문이다.

1885년 7월 6일 파스퇴르가 인공적으로 만든 최초의 인간 백신을 접종하는 모습(파스퇴르뮤지엄홈페이지)

인위적으로 만들어 인간에게 주사한 첫 백신은 지금으로부터 꼭 130년 전에 등장했다. 1885년 7월 6일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는 광견에게 물린 조셉 마이스터에게 광견병 백신을 접종했다. 의사면허가 없던 파스퇴르 대신에 동료 의사가 주사했다. 파스퇴르는 유리관을 직접 입으로 물고 광견병에 걸린 불독의 침을 추출하는 진정성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치료를 받은 소년이 아무런 광견병 증상 없이 나았기 때문에 그는 인류를 구한 영웅이 됐다.

약한 항원으로 항체 만드는 것이 백신 원리

파스퇴르와 광견(19세기 후반 알퐁스 미샤의 그림)

파스퇴르와 그의 동료들은 토끼 몸속에서 광견병 바이러스를 키운 후 신경티슈를 건조함으로써 바이러스를 약화시켜 백신을 만들었다. 파스퇴르는 광견병 백신 이전에도 닭콜레라와 탄저병 등 여러 가축질환의 백신을 개발한 바 있다.

약하거나 죽은 세균·바이러스를 주입하여 가벼운 증상만 일으키게 하면서 항체를 생성하여 면역력을 갖도록 하는 백신 원리는 파스퇴르 이전에 이미 인도, 오스만 등 여러 지역에서 알려졌었다. 그러다가 1796년 영국의 에드워드 제너가 이런 원리에 주목하여 소젖 짜는 여인의 손바닥에 생긴 종기에서 고름을 채취하여 한 소년의 팔에 주입했다. 그 소년은 6주 후 진짜 천연두 고름을 주사해도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다. 우두를 천연두 예방에 이용한 제너를 기리기 위해 어린 암소를 의미하는 라틴어 와쿨라(vaccula)에서 따온 백신이라는 말을 1881년 파스퇴르가 사용하기 시작했다.

백신의 개발 여부는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되기도 한다. 파스퇴르 등이 개발한 가축전염병 백신은 당시 경제적인 이유에서도 개발이 필요했다. 백신 개발로 축산업은 엄청나게 성장했다. 한국에서 유행한 메르스의 백신이나 치료제가 만들어지지 않은 이유도 오늘날 과학기술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감염자가 별로 많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메르스 확산으로 백신이나 치료제의 개발 동기는 생겼고 현재 개발이 진행 중이다. 다만 동물실험, 임상시험, 미국식품의약국허가 등의 절차에 수년의 시간이 걸리는데 수년 후에도 시장에서 메르스 백신이 필요할지가 불확실하니 메이저 제약사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기도 한다.

산전수전 겪으면 내공 강해질 수도

백신은 그 자체가 전략이다. 전략은 보통 창조적으로 만들어진다. 백신도 발견이 아니고 발명으로 불린다. 치료보다 예방이 훨씬 간단한(An ounce of prevention is worth a pound of cure.) 상황에서 효과적이다. 약한 자극으로 먼저 내성을 키운 후에 나중의 강한 자극을 극복하는 방식이다. 만일 그 순서가 뒤바뀌면 면역력 형성 없이 질환에 걸려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평소 너무 청결한 사람은 면역력이 없어 건강하지 못하다는 연구도 있다. 인체질환뿐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평소 배신을 당하지 않았던 사람이 사업이나 정치에서 큰 배신을 당해 돈과 권력을 잃고 또 건강까지 잃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는 적지 않다. 그런 비극까지는 아니더라도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게 되는’ 트라우마를 사람들은 겪는다. 작은 아픔으로 먼저 내성을 키워 큰 아픔에도 견디거나 연착륙하는 것 또한 일종의 백신 과정이다. 대체로 높은 수준의 내공도 작은 수준의 산전수전(山戰水戰)에서 기인한다. 세상에서 늘 좋은 것만 향유할 수는 없기 때문에 작은 불행으로 큰 불행을 막는 것이 전략적 행위다.

백신 개발은 독성을 약화시킬 수 있어야 가능하다. 백신은 기존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자신의 구조를 바꿔버리면 효과적이지 못하다. 세포분열을 통해 생존하는 세균과 달리, 바이러스는 유전정보와 단백질로만 구성되어 있어 독립적으로 생존하기 어렵고 숙주의 세포에서만 번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이러스는 오히려 쉽게 변이할 수 있다.

바이러스에 대해 효과적인 백신이 적은 이유도 바이러스의 조합 다양성과 변이 가능성 때문이다. 변이는 백신이나 치료제에 대응한 바이러스의 생존 전략이다. 그런 다양성과 변이성 때문에 특정 바이러스 대신 여러 바이러스의 공통된 구조에 반응하는 범용 백신도 개발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세균과 바이러스 역시 이미 개발된 여러 백신에 대해 내성이 있는 구조로 변이하여 진화하고 있다.

낮은 지지율로 큰 영향력 행사할 수도

같은 물건이나 같은 행동도 그 가치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때와 장소가 맞아야 출세하기도 하고 활용되기도 한다. 야구에서 안타를 많이 치면 승리에 기여할 가능성이 크지만 늘 그렇지는 않다. 타율보다 타점이, 또 타점보다 결승타가 승리에 더 중요하다. 점수와 연결되지 않는 안타만 남발하는 선수보다, 필요할 때에만 적시타를 치는 선수가 팀 승리에 더 기여한다.

정치에서는 지지율보다 득표율이 더 중요하고, 득표율보다 의석비가 더 중요하며, 의석비보다 대권이 더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동일한 지지도를 갖고도 더 높은 득표율을, 또 더 높은 의석비를, 또 정권을 얻기 위해 선거제도 조정과 이합집산을 도모한다.

정치나 비즈니스에서 같은 지분이라고 해서 같은 영향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51%의 지분을 갖고 있을 때에는 내가 49%를 갖고 있어도 엄격한 과반수제에서의 내 영향력은 0이다. 이에 비해 다른 두 경쟁자가 각각 49%와 48%를 갖고 내가 3%만을 갖고 있더라도 내 영향력은 33%에 이른다. 왜냐하면 과반수승리연합은 49+48, 49+3, 48+3, 49+48+3 총 4가지인데 3%가 승리연합에 낄 가능성은 49나 48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3%는 자기보다 16배가 큰 49%와 동등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3%가 49%와 48%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향유하기도 한다. 만일 49%와 48%가 서로 앙숙이어서 도저히 연합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3%의 선택에 따라 승자가 결정되기 때문에 3%는 누구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국회의원들 개인의 영향력도 마찬가지다. 1989년 제13대 국회의 의석비는 민주정의당(민정) 43%, 평화민주당(평민) 24%, 통일민주당(민주) 20%, 신민주공화당(공화) 12%였다. 당시 국회 운영에 대한 의원들의 만족도 조사에서 민정당과 민주당 소속 의원들은 대체로 만족하지 못한다고 답변한 반면, 공화당 의원들은 모두가 만족한다고 응답한 바 있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당별 결정력(pivotal power)이 같았기 때문에 의원 1인당 영향력은 의원 수가 적은 공화당이 더 높았던 것이다.

당장 이겨도 결국 손해되는 소탐대실도

경우의 수를 감안한 결정력이나 영향력 계산은 전략적 효율성 추구에 도움된다. 만일 투입과 산출에 관한 방정식이 존재한다면 효율적 전략의 계산은 미분을 통해 가능하다. 하나의 추가 투입으로 기대되는 가치의 증대 계산을 시점별로 계산하여 적절한 타이밍과 투입량을 정할 수 있다. 이런 미분 계산이 산업혁명과 기술혁신을 가능하게 했다.

골든타임(사고수습이 가능한 초기) 그리고 마중물(펌프로 많은 물을 긷기 전에 부어야 하는 적은 물) 모두 작은 대가를 지불하고 큰 혜택을 얻는 백신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있다. 고대 그리스 에피루스 왕 피로스가 여러 전투에 이겼지만 전쟁부담을 견디지 못해 결국 패망한 ‘피로스의 승리’, 입찰에서 낙찰받았지만 고가의 입찰가로 위험에 빠지는 ‘승자의 저주’,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것’ 이 모두가 당장은 이겼지만 결국은 손실이 더 큰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사례다.

전염병 백신이 개발되지 못했을 때에는 격리 등 감염 차단이 예방에 필수적이다. 접촉여부, 감염률, 치사율 등을 입력하면 확산정도와 사망자수를 계산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최적의 차단 시간과 공간이 나온다. 질환뿐 아니라 감정도 전염된다. 따라서 사회심리적 요소도 고려해야 한다. 치사율 18%보다 완치율 82%에 덜 공포를 느끼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표현 또한 중요하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於異阿異)’는 방식도 동일한 투입으로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백신의 범주에 포함된다. 활성화된 교류로 전염에 훨씬 취약한 오늘날, 개인이나 사회든 백신적 기능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김재한 한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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