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다치면서 크는 아이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레몬트리]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극복하며, 정신적 발달과 신체적 성장을 이뤄낸다. 그 과정에서 멍이 들거나 살갗이 긁히는 사고는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1, 3 자연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건강하게 크는 아이들. 2 목공소에서 거칠게 다듬은 나무 토막을 가지고 집이나 탑을 지어 올라가 노는 것이 인기다. 4 맨들맨들한 통나무 위를 건너가는 아이들.

우리 유치원 정원에는 아름드리 통나무가 하나 쓰러져 있다. 아이들이 이 통나무를 어떻게 가지고 노는지 훔쳐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처음에는 말처럼 타고 놀더니 언제부터인가 딱딱한 껍질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요즘은 껍질이 홀랑 벗겨져 맨들맨들해진 나무 위를 조심조심 걸어가서 마지막에 뛰어내리는 놀이가 한창이다.

나무가 아이들의 키에 비해 굵어 그 위에서 굴러떨어지면 제법 아프다. 멍이 들거나 살갗이 벗겨지기도 한다.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날, 그날도 미끄러운 통나무 위를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루카스를 나는 가슴 졸이며 보고 있었다. 다섯 살 루카스는 거의 실명에 가까운 시각장애아다. 아이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나로서는 불안해서 그만 내려오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억지로 참고 바라보았다. 아이의 의지가 강하고 행동이 조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중하게 발걸음을 내딛던 루카스가 삐끗하더니 결국은 미끄러지며 굴러떨어졌다.

“와우, 안 다치고 잘 넘어졌네. 잘 건너가는 것보다 잘 넘어지는 게 더 어려운데.”

넘어져서 아프기도 하고 도중에 떨어진 것이 속상해서 울려고 하던 루카스의 얼굴이 나의 칭찬에 활짝 펴졌다. 그러고는 다시 통나무 위로 기어올라가더니 이번에는 일부러 굴러떨어지는 게 아닌가.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다른 아이들도 너도나도 통나무를 타고 올라가 아래로 구르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놀이가 건너가는 놀이보다 더 위험해 보여서 난 울상이 되었다. 에그, 혹 떼려다 혹 붙였네.

하지만 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선 아이들에게 일어나는 작은 사고를 용납해야 한다는 사실을 난 알고 있었다. 어린이 상해·배상 보험 기관의 보고만 봐도 유치원에서 일어나는 큰 사고의 대부분은 운동 신경 부족으로 인한 것이라 한다. 멀쩡히 걸어가다가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며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친다든지, 놀다가 친구와 부딪쳐 뒤로 넘어져 바닥에 머리를 찧는다든지.

이 또한 어른들의 과잉보호와 감시에 갇혀 밖에서 자유롭게 뛰어놀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 그래서 최소한 자신을 보호할 능력조차 습득하지 못한 것일 게다. 어린이의 사고를 줄이는 것이 관건인 어린이 보험 기관에서 어린이들에게 작은 사고를 허용하라고 유치원, 어린이집을 상대로 홍보하는 게 참 인상적이다. 이에 공감하는 나는 우리 유치원 아이들이 놀다가 상처를 입으면 그 옆에 스마일을 그려준다. 용감한 어린이의 상징으로.

1 자연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건강하게 크는 아이들. 2 교사의 친절한 설명을 들은 아이들은 자기가 적당하다고 느끼는 높이까지만 올라간다. 3 겨울이면 인디언 텐트 모양의 자연 호르트에서 불을 피우고 동화를 읽어줬다. 4,5,6 한동안 나의 일터였던 아우크스부르크 대성당 지붕 밑에서. 저 높은 사다리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오르내렸는지 모른다.

되짚어보면 아이들을 키울 때 나는 그런 면에선 대범한 엄마였던 것 같다. 아들과 딸이 대여섯 살 때 뒷집 꼬마들과 친해지더니, 두 집 사이에 있는 담장 위로 서로 걸어서 왕래했다. 그 담장의 높이가 2m, 두께가 30cm였으니, 담장 위를 걷는 아이들은 안정된 자세였지만 밑에서 쳐다보는 어른의 마음은 조마조마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나의 불안이 주관적이라는 걸 알기에 참견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어느 날 집주인이 와서 담장 위의 아이들을 보곤 경악을 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군요.” 이럴 때 아이들의 변호인이 되어야 하는 엄마로서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럼 보지 마세요. 저도 무서워서 그쪽은 아예 안 본답니다.” 그렇다고 내가 원래 용감하고 대범한 사람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난 겁이 많다. 본업인 문화재 실측 조사를 할 때도 높은 사다리를 타고 성당 지붕을 살펴보려면 늘 아찔하고 무서웠다. 여성의 자존심을 칼날처럼 세우고 고소공포증을 악착같이 극복했지만 희한하게도 그 프로젝트만 끝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그런 내가 내 몸보다 더 소중한 자식들에게 이렇게 대범할 수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미혼 시절에 만난 가족 중 어느 집 아이들은 날렵하게 뛰어노는데 다른 집 아이들은 겁이 많고 움직임이 굼뜬 걸 보고 이상하게 여긴 적이 있다. 살펴보니 행동이 굼뜬 아이들은 조바심 많은 할머니 손에서 자라면서 행여 다칠세라 과잉보호를 받은 아이들이었던 거다. 그때 나는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엄마의 불안감을 기준 삼아 아이들의 행동반경을 억압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스스로 얼마나 겁 많은 사람인지 잘 아니까. 그러나 직업으로 남의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하니, 또 다른 책임이 따라왔다.

평생 해오던 문화재 실측 조사 대신 유치원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염원을 가졌을 때 내 발목을 잡은 것 또한 “혹시 아이들에게 사고라도 나면 그 책임을 어떡하나?”하는 걱정이었다. 그게 너무 무서워 인생 이모작의 꿈을 포기할 뻔할 만큼. 그러니 유치원 교사 교육 과정에서 유심히 들은 과목 또한 보호감독의 의무에 관한 법 조항이었다. 특히 ‘교사에겐 보호감독의 의무가 있지만 아이들의 자유로운 탐구심 또한 인정해줘야 한다’는 문장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아이들의 놀이를 관찰해보면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연습의 연속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불행히도 그 과정에서 다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교사는 보호감독 의무와 아이의 탐구심을 지켜주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 그러한 일은 모두 교사의 순간적 판단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아이의 능력과 성격을 잘 아는 교사가 어떤 놀이를 허락했고, 미리 아이에게 주의할 점을 알려주었다면 아이가 혹여 놀이를 하다가 크게 다치더라도 교사에게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 물론 법적 책임이 없다고 해도 사고는 일어나선 안 된다.

이때 안전에 관한 판단의 기준이 모호해 교사로서 고민이 될 때가 많다. 똑같은 놀이일지라도 아이에 따라 안전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유치원에서 일하기 전 잠시 호르트(초등학생 방과 후 시설)에서 아이들을 돌보았는데, 그곳은 특히 야외에 인디언 텐트를 쳐놓은 자연 호르트였다. 아이들은 숙제만 끝나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야외에서 놀았다. 그렇게 오래 놀다 보니 자연과 친해져서 몇몇 아이들은 익숙한 몸짓으로 나무를 탔다. 나는 어른이 참견하지 않는 한 아이들이 알아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할 것이라 믿었다. 그럼에도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함께 어느 높이까지 허락해도 되는 것인지 의견을 맞추는 게 필요해, 이미 장성한 아들에게 물어봤다.

“너 어릴 때 나무 타고 얼마나 높이 올라가봤어?” “엄마가 알면 기절할 만큼.” “그렇게 높이 올라갔다가 떨어지면 크게 다치겠네? 나무에서 떨어져서 다친 친구도 있어?” “나무 기둥을 따라 가지에 퉁퉁 걸리면서 떨어지기 때문에 엄청 아프긴 하지만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아.” “너도 경험해본 거야?” 아들은 싱긋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 나 죽지 않았으니까 애들도 맘껏 나무 타게 해줘. 그거 얼마나 재미있는데. 나는 어렸을 때 나무에 올라간다고 뭐라 하는 어른들이 제일 원망스러웠어.” 아들 덕분에 호르트의 아이들에게 주의해야 할 점을 설명하고, 각자 스스로 판단하기에 안전한 높이만큼 올라가라고 허락할 수 있었다. 사람마다 안전한 높이가 다르므로 친구들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고도 일러줬다. 나는 까마득하게 높이 올라간 아이들 근처를 빙빙 돌며 가끔 감시를 했지만 아이들이 알아서 조신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것을 늘 확인할 수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놀이를 통해 정서와 지능이 발달하는 아이들에게 조금도 다치면 안 된다고 안전만 강조하는 것은 자라지 말라는 말과 같다. 그러다 보면 돌다리 하나 제대로 못 건너는 심약한 어린이, 새로운 환경을 접하면 겁부터 먹는 소극적인 청소년으로 크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적 불행이자 사회적 손실이 아닐까.

임혜지는… 독일의 오래된 건축물을 연구해온 문화재 전문가. 자연과학도인 독일인 남편, 두 아이와 함께 뮌헨에 거주 중이다. 환경에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또한 돈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소비를 최소화하며 살고 있으며, 저서로는 『내게 말을 거는 공간들』과 『고등어를 금하노라』가 있다.

기획 레몬트리 홍주희, 사진 임혜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