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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문영의 호모디지쿠스] 샵쥐(시아버지), ㅂㄱㅍㄷ(보고프다) … 축약 심한 ‘엄지족’의 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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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미드(미국 드라마) ‘모던 패밀리’의 첫 장면. 엄마가 위층에 있는 아이들을 큰소리로 부르자 계단을 내려온 딸이 휴대전화를 쳐다보며 말한다. “문자를 보내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세요?” 미국이나 한국이나 엄마들이 애들과 대화하기 어려운 것은 똑같나 보다. 우리는 말하는 인간에서 문자 보내는 인간으로 바뀌고 있다. 그 이유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이 이제는 문자나 메신저가 없으면 대화가 어려울 지경이다.

 흔히 이렇게 문자로 말하는 새로운 종족을 ‘엄지족’이라고 한다. 그 작은 휴대전화 자판에 하필 가장 두꺼운 엄지손가락으로 글자를 쳐서 대화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이렇게 문자로 대화하는 것을 ‘문팅’이라고도 하는데 언론에서 주로 한글 파괴나 언어 오염 등의 단골 소재로 다뤄진다. 틀린 지적은 아니지만, 파괴만큼 새로운 창조도 많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어쨌든 이렇게 휴대전화에서 한글 문자를 단축시키려는 습관에 따라 새로운 축약단어들이 늘고 있다. 샵쥐(시아버지: 한글과 영어 자판을 바꿔야 하는 불편을 덜기 위해서 샵쥐는 #G로 쓰기도 한다)뿐만 아니라 애영유엄브(애 영어유치원 보내고 엄마는 브런치 먹는 중), 문센(문화센터) 같은 표현도 생겼다. 애인이 안 생긴다는 뜻의 ASKY, Case by case라는 뜻의 ‘케바케’는 글자 수를 줄이거나 한영 전환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으로 나온 것들이다. 한글과 영어가 섞인 브랜드는 아예 한글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 안녕마트, 콩다방, 별다방 같은 것들인데 이런 것들은 영어 원명보다 더 호감이 갈 때도 있다.

 이것도 귀찮아 아예 ㅇㅇ(응), ㅇㅋ (오케이) 등 자음만으로 된 언어도 생겨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그 해독 수준이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여성을 사랑하는 네티즌이 그 여성의 프로필 소개란에 ‘ㄴㄴㄱㅅㄷ ㄷㅇ ㅅㄹㅎㄴㄷ’라고 쓰여 있다며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고 해석을 의뢰했다. 글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댓글로 해석이 달렸는데 그 답은 “나는 가수다 더원 사랑합니다”라는 뜻이었다. 질문한 네티즌은 좋아하는 여성의 취향을 알게 되자 환호성을 질렀다.

 지나친 은어, 축약어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초성 놀이는 인터넷의 독특한 놀이문화가 됐다. 심지어 초성 해석기 앱도 있고, 자음 해석을 전문으로 하는 사이트도 있다. 이 사이트에 가면 ㅇㄱㄹㅇ(왜 그랬어), ㅂㄱㅍㄷ(보고프다), ㅎㄷㄱㄴㅁㄴㄷ(힘들고 눈물 난다)과 같은 초성/자음 검색 결과를 모아 놓은 자료들을 볼 수 있다. 글자 줄이기 원조는 아무래도 19세기 프랑스가 아닐까 싶다. 레미제라블로 잘 알려진 빅토르 위고가 책을 출판한 뒤 출판사에 ‘?’라는 단 한 글자의 전보를 보냈고 출판사는 ‘!’이라는 단 한 글자의 답신을 보내온 이야기는 유명하다.

 자음 여러 개 보내는 것도 귀찮아 이제는 아예 이미지만으로 대화하는 일도 많아졌다. 가장 많이 쓰인 것 중 하나가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아이들에게 주먹감자를 먹이는 장면이다. 흔히 ‘엿 먹어라’란 비난의 표현을 이 그림 한 장으로 대체한다. 게시판의 글이 아동청소년법에 걸릴 소지가 있거나 정부에 비판적인 경우 경찰관이 나오는 사진이나 경찰청 캐릭터인 포돌이를 짤(그림)로 쓰기도 한다. 만화나 드라마의 캡처 화면을 이용해 의성어·의태어를 표시하는 것도 흔하다.

 모바일 시대의 글은 생각과 감정만을 나타내지 않는 것 같다. 글을 보면 전달 속도와 기기 성능으로 미뤄 상대방의 빠른 타자 실력뿐만 아니라 어떤 휴대전화를 사용하는지, 와이파이(WiFi)가 접속되는 곳에 있는지, PC 앞에 있는지 아닌지 등을 미뤄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이런 마당에 국어를 사랑하자는 단순한 호소만으로는 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표현 욕구와 변화들을 막기엔 역부족인 것 같다. 변화가 필연적이라면 어떻게 아름답게 담아낼 것인가 고민하는 것이 더 의미 있을 듯하다.

임문영 인터넷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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