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해를 보내며 역사에 묻는다.|이만열 <숙명여대교수·한국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다시 격랑의 한해를 보내고 있다. 이런 때면 으례 지난 일을 되돌아보며 역사앞에 던져진 시간 속의 자신을 생각하게 된다. 올해는 과연 가치와 성실로써 메웠으며, 우리 생애에서 이해가 결코 부끄럽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생각을 조금 확대시켜 우리세대를 묶어 역사에 질문해본다. 우리가 같이 보낸 이 한해가 역사에 어떻게 남겨질 것이며, 나아가 역사는 우리세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게 되면, 우리 세대의 모든 구성원은 크든 작든 역사 앞에 책임적인 존재임을 회피할 수 없게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한 괄호 속에서 질문되어질 우리 세대가, 추한 몰골로 민족사에 남겨지기를 원치 않는다.
앙천부괴 부부작인, 그래서 식민지의 저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시인 윤동주는 자기시대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않을 수 있었는데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읊었던 것일까.
가끔, 몇 세대 후의 우리의 후손들이 민족사의 입장에서 오늘날의 세대를 평가할 가치기준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상상의 나래를 자주 펼쳐보지만 대답은 결국 하나에로 귀착된다.
그 평가의 기준은, 분단시대의 극복, 즉 민족통일 문제가 될 것이라고. 후손들은 민족통일이라는 민족사적 과제를 두고 우리세대가 얼마나 고민하고 노력하였으며 국민을 일깨우고 주변국가를 설득하였으며 인내와 성실로써 대화에 임했으며, 또 고통스럽기만한 이 민족적 과제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않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희생하려 했나하는 점을, 우 세대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로 삼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래서 통일문제는 국민적 합의와 민족적 지상과제의 차원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아무도 이 문제에 무관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전유물로 하거나 정략화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과거 우리 역사의 통일경험은 값진 것이다. 그 경험에 비추어 오늘의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기 위해서는 더욱 소중하다.
윤택한 경제에 번창한 인구를 가졌던 백제는 7세기에 들어서서 신라를 훨씬 압도하는 군사력과 전투능력을 가졌다.
그런 백제가 통일전쟁에서는 망국의 한을 남겼다. 그 실패의 원인은 경제·군사등 국력여하에 있었다기보다는 그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에 있었다. 낭만적인 듯한 낙화암의 전설에서 우리는 백제 지배층의 타락과 부패를 발견한다.
그런 가운데 대신 임자는 정권을 천단하게 되었고, 국가의 고위기밀을 신라의 김유신에게 흘렸다. 국가보다는 한몸과 가족의 안락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사치와 열락, 지배층의 도덕적 타락, 사회기강의 해이, 이런 망국적 풍조를 보다못해 성충과 흥수는 의자왕에게 극간했다. 요즘말로 심하게 비판하고 개혁을 건의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의자왕은 성충을 옥에 집어넣어 버렸고, 흥수를 멀리 귀양보냈다.
비판의 소리를 듣기 싫어해서다. 『삼국사기』는 이 대목에서 귀중한 한마디를 슬쩍 남겼다. 성충을 옥에 가두니, 『이로 인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어졌다 (유시무감언자).』충간·비판의 언로가 봉쇄되는 조정에 삼천궁녀의 풍악소리와 아첨배들의 비위맞추는 소리만 극성을 떨었다.
그와 더불어 남는 것은 불신뿐이다. 불신풍조가 국방정책에 스며들었을 때, 백제는 더 이상 지탱될 수 없었다.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대비, 충신 성충과 군사전문가 의직의 전략이 개진되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충신을 생각하는 법, 의자왕은 귀양보낸 흥수를 기억하고 그에게 사람을 보내 국난타개의 전략을 묻는다.
그의 대답은 성충·의직과 같았다.
탄현과 기벌포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첨배들은 『흥수는 오랫동안 귀양살이중이므로 왕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 말을 쓸 수없다』고 주장하였다. 불신풍조는 이최선의 방위전략마저 포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경제대국에 막강한 군사력을 가졌던 백제는 이렇게 하여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보는 우리는, 백제의 멸망이 불신풍조와 직접 관련이 있었고 그 불신풍조는 충간·비판세력을 투옥·탄압한 언로의 경색에 있었음을 알게된다.
통일을 민족적 과제로 안고있는 오늘의 우리 세대에게 백제는 이렇게 경고해주고 있는 셈이다.
한편 신라는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 지도층이 보여준 살신성인적 자세는 귀감이 된다. 황산전투에서 4전4패했을 때, 부사령관 김흠순과 김품일은 그의 아들을 각각 먼저 희생시켰다. 반굴과 관창의 희생이 신라군의 승리를 보강하였다. 석문전투에서 부하를 잃고 자신만 목숨을 건진 원술은 그의 아버지 김유신앞에 더 이상 나서지를 못했고, 그의 어머니 또한 아들의 면회신청을 거절하였다. 그런 가정교육이었기에 뒷날 당군 20만을 거의 섬멸하는 매초성전투에서 원술은 일급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통일전쟁에 임했던 신라인, 특히 지도급 인사들의 몸가짐이었다.
민족분단의 저린 한을 품은 채 1984년은 저문다. 이해를 넘기면 분단의 비극은 40년으로 들어선다. 후삼국시대의 분열시기와 맞먹어간다.
세모의 흥청거리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분단비극을 되씹고 있는 내 이웃의 한에 동참해보자. 그 한이 시공적으로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조국통일을 두손 모아 조용히 기원해보자. 그리고 내년 초부터 열리는 각종 남북회담에 냉철한 판단과 뜨거운 가슴으로 성원하자. 민족분단의 아픔을 치유하여 더 이상 민족사에 부끄러운 세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