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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 2035

땅콩 회항, 표절 파문에 내 안의 너를 느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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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혜미
JTBC 사회부 기자

조금 지난 일이다. 지난해 겨울,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이 ‘땅콩 회항’ 건으로 한창 조사를 받던 때였다. 당시 대한항공에서 그녀를 위해 “국토부 건물 화장실 청소를 해달라”고 요청했던 일을 기사로 썼다. 시대착오적인, 특급대우, 월권(越權) 등의 단어를 넣어 모질게 비판했다. 화장실이라는 원초적 소재 덕분이었는지 몰라도 예상보다 호응이 컸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전에 별생각 없이 하던 행동들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평소 컴퓨터 고장으로 AS센터에 자주 들른다. 주로 모니터 액정이 깨지거나 소프트웨어가 먹통이 되는 경우다. 꼼짝없이 반나절 또는 하루를 기다려야 하는 일이다. 나는 가끔 기자라고 밝히며 “몇 시까지 최대한 빨리 고쳐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갑질’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지하철이든 길바닥이든 편평한 곳만 보이면 노트북을 열고 앉아 뭔가를 찾고 적는 직업이니까. 내 딴엔 그저 절실하단 얘기를 한 거였다. 그게 누군가에겐 ‘화장실 청소 요청’과 다를 게 없는 일은 아니었을까. 그 후 나는 “기자인데요”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않는다.

 최근에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소설가 신경숙씨의 표절 논란도 그랬다. 기자 지망생 시절, 1년 가까이 기사 베껴 쓰기 연습을 했다. 그중에서도 소설가 김훈이 기자 시절 작성한 몇 편의 르포기사는 외울 정도였다. 처참한 비행기 추락사고 현장에서 그가 쓴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밥을 다 먹은 젊은 구조대원들은 다시 빗속을 헤치며 수색현장으로 올라갔다’였다. 여운을 남기는 마침으로 제격이었다. ‘울음을 멈춘 ○○○군은 다시 빗속을 헤치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이런 식으로 단어만 바꿔가며 외운 문장을 많이 써먹었다.

 한윤형씨의 데이트 폭력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폭력도 폭력이지만, 한씨는 글과 말의 이중적인 태도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내가 쓴 기사를 검색해 봤다. ‘얼마나 안 냈으면… 체납 자동차와의 전쟁’(2015년 6월). 나는 아파트 관리비 내는 걸 벌써 석 달째 잊고 있다. 어제 독촉장을 받았다. ‘홈쇼핑 기능성 식품 과장광고 주의보’(2014년 9월). 나는 홈쇼핑 매니어다. 블루베리, 오메가3 다 샀다.

 서로 비슷한 처지니 아무 말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만 나오라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들과 내 이야기가 같은 무게로 다룰 수 있는 일들은 아닐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럴 때마다 너도나도 ‘내 안의 너’를 예민하게 따지고 피하다 보면 언젠가 꽤 괜찮은 사람들, 꽤 좋은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김혜미 JTBC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