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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스승 김일의 불호령, 힘은 링 위에서만 쓰는 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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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프로레슬러 생활 마감한 이왕표

이왕표 대표는 40년 간 1600여 경기에 출전했다. 그의 뒤로 보이는 사진은 2000년 WWA 세계챔피언에 오른 당시의 모습이다. 그는 “담도암 때문에 링에서 내려오긴했지만 링 밖에서 프로레슬링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날으는 표범’,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프로레슬러 이왕표. 훌쩍 뛰어올라 두 발로 상대를 강타하는 ‘드롭킥’의 레슬러. 지난달 40년 현역 생활을 마감한 이왕표(61) 한국프로레슬링협회 대표를 서울 등촌동 자택에서 만났다.

살려 달라 곡소리 나던 연습생 시절

김일 추모 WWA 경기에서 이왕표가 자신의 장기인 드롭킥을 선보이고 있다. 2006년 경기 당시 그는 52세였다.

그가 프로레슬러가 되겠다고 생각한 건 어린 시절 흑백 TV 속 ‘박치기왕’ 김일 때문이었다. “호랑이와 삿갓, 곰방대가 그려진 가운을 입고 거구의 상대를 박치기로 쓰러뜨리는 김일 선생님을 보면서 나도 커서 레슬러가 돼야겠다 했어요.”

 그는 태어날 때부터 유난히 몸집이 큰 아기였다. “아버지가 이름에 임금 왕(王) 자를 넣어 지은 것도 큰 체구 때문이었어요. 2남 2녀 중 둘째인데 나만 빼고 나머지 형제들과 부모님의 체구도 보통이에요.” 중학교까지는 충남 천안에서 살았다. 큰 키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김일 같은 세계적인 프로레슬러가 되라’는 말을 듣곤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태권도·합기도·유도를 배웠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했다. 그가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975년 일간스포츠에 김일체육관 1기생 공개 모집 공고가 났다. 공개 모집 당일 100명이 넘는 지원자가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키 180cm 이상, 80kg 이상의 건장한 청년들이었다. 당시 이왕표의 키는 190cm, 몸무게는 79kg. 그는 “앉았다 일어나기 300회, 팔굽혀펴기 100회, 복근 운동 100회 등 다양한 동작을 1000번 넘게 해야 했다”며 “최종적으로 4명이 남았다”고 말했다.

 레슬러가 되기 위한 훈련은 고통스러웠다. 기술을 배우기 전에 체력운동을 먼저 하는데 앉았다 일어나기 1000회, 팔굽혀펴기 200회, 복근 운동 200회 등 체력에 한계가 올 때까지 쉬지 않고 훈련을 했다. 오전 체력운동을 마치고 나면 다리가 풀려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다. 오후엔 당시 정동에 있던 김일체육관에서 선배들과 대련을 했다. 15명의 선배와 각각 10분씩 총 150분간 쉬지 않고 스파링을 했다. 평소 힘 좀 쓴다 자부했는데 링 위에서 선배가 툭 치면 그대로 고꾸라졌다. 선배 밑에 깔려서 옴짝달싹 못 한 채 죽겠다고 소리 지르느라 목이 다 쉬었다. 눌리고, 꺾이고, 졸리고, 떨어지고,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는 “살려 달라고 소리 지르고 링 바닥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항복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 했다”며 “그런데 이렇게 상대를 압도할 수 있다는 게 또 매력적으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아침엔 허벅지에 이불이 붙어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맞아서 멍든 상처에서 진물이 나와 이불과 살갗이 붙은 것이었다. 상처를 보고 놀란 어머니는 펄쩍 뛰며 당장 운동을 그만두라 했지만 이를 악물고 체육관으로 향하는 아들을 말리지는 못했다.

 그렇게 2년간 연습생으로 지냈다. 70년대 프로레슬링은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 ‘국민 영웅’ 김일이 링 위에서 미국·일본 레슬러들을 통쾌하게 때려눕히는 모습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프로레슬러를 꿈꾸며 체육관을 찾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지독한 훈련을 못 견디고 포기했다. 그는 “훈련 하루 만에 짐 가지고 오겠다고 나가서 소식을 끊거나 대련을 하다 말고 뛰어나가 버리는 이도 있었다”고 전했다.

사람 만들어준 김일 선생님

이왕표의 챔피언 벨트. 왼쪽부터 ‘WWA 세계챔피언’ ‘NWA 오리엔탈챔피언’ ‘극동챔피언’ 벨트.

연습생 생활 2년 만인 77년 드디어 데뷔전을 치렀다. 종합실내체육관인 문화체육관에서 오니타 아쓰시라는 일본 선수와 대결했다. 경기 전엔 자신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훈련했는데 이길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처절한 패배. 경기 5분 만에 그는 바닥에 던져졌고, 눈을 뜨니 상대 선수가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그때부터 내리 스무 번을 졌다. 20연패,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둬야 하나, 역량이 이렇게 부족한가 매일 좌절하던 시기였죠. 게다가 선수들 몸무게 평균이 100~120kg인데 나는 90kg 초반이었으니 아무래도 힘이 달리는 거예요. 아무리 살을 찌우려고 해도 살은 안 찌고, 경기만 했다 하면 지니까 김일 선생님께 야단도 많이 맞았어요. 서러워서 눈물이 다 나더라고요. 2년 이상 준비했는데… . 그렇게 1년이 갔어요.”

 좌절의 시간이 길어지자 유혹의 손길이 찾아왔다. 슬럼프에 빠진 그에게 암흑가의 제안은 꽤 달콤했다고 한다. 그는 “맨날 땀 냄새 맡고 혼나고 좌절하다가, 명동에서 양복 입고 술 냄새 향수 냄새 맡으니 운동하기가 싫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방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떻게 아셨는지 김일 선생님께서 ‘가서 왕표 잡아와’ 그러신 거죠. 정말 원 없이 혼나고, 원 없이 맞았어요. ‘네가 깡패냐? 건달이냐? 하라는 운동은 안 하고 밤에 왜 돌아다녀. 네 꿈이 고작 그거냐’라고 하시는데 아차 싶은 거예요. ‘그렇지, 내 꿈은 건달이 아니지. 조폭이 아니라 레슬러라는 꿈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잘못했구나’ 반성했죠. 선생님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드렸어요.”

70년대 김일 제자 공개 모집 100명 중 4명에 뽑혀
20번 내리 지고 방황하다 건달과 어울린 적도
“네 꿈이 고작 깡패냐고 선생님께 많이 혼났죠”

 평소 김일은 후배나 제자들에게 ‘일반인들과는 절대 싸워서는 안 된다. 남들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으니 밤늦게는 돌아다니지 말라’고 당부했다. 무도(武道) 정신을 강조하며 주위를 보호하고 나를 위해 힘쓰는 건 링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선생님은 늘 ‘너희는 움직이는 병기다. 너희의 정신이 잘못되면 많은 사람이 다친다’고 하셨어요. 그런 분께 실망을 안겨 드린 게 죄송했어요.”

 그날부터 다시 운동에 전념했다. 정규 훈련이 끝나면 밤늦게 따로 훈련했다. 78년 일본 오사카에서 첫 승을 했다. 예상을 뒤집은 결과였다. 상대는 일본의 중견 선수로 원래는 그의 승리가 당연하다는 분위기였다. 그런 그가 한국의 신인 이왕표와의 경기에서 패배하자 경기장은 싸늘해졌다. 아무도 박수를 보내지 않았다. 그는 대기실 안에 들어와서야 스승 김일의 박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난생처음 선생님께 칭찬을 받은 날이었다”며 “마주치기만 하면 때리고 혼내던 선생님께서 활짝 웃으면서 잘했다고 하시는데 정말 기분 좋았다”고 말했다.

 “그날 선생님께 처음 칭찬받고 그때부터는 승승장구했죠. 이기는 법을 알겠더라고요.” 한 번 이기고 두 번 이겨보니 어느 순간 상대방의 호흡소리가 들려왔다.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순간, 상대도 자신 못지않게 죽을 힘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상대도 나만큼 괴롭고 두려운 순간을 맞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쓰면 이길 수 있겠구나 하는 투혼이 불타올랐다. “결국 그간의 20번 연속 패배는 기술력이 아니라 정신력에서 진 거였어요. 그때부터 정신력을 강화하고 나만의 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그의 트레이드 기술인 발차기와 드롭킥이 탄생했다.

‘박치기왕’의 후계자로 지목되다

2000년 WWA 세계 챔피언에 오른 이왕표. 그 옆은 WWA 회장이자 초대 챔피언인 철인 루 테즈.

이후는 ‘이왕표의 시대’였다. 간절한 1승의 꿈은 극동 챔피언, 아시아 챔피언, 세계 챔피언에 대한 꿈으로 이어졌다. 85년 김일의 막내아우인 김광식 선수와 함께 NWA(National Wrestling Alliance) 오리엔털 태그 챔피언이 됐다. 태그매치는 둘이 한 팀으로 경기한다. 그날 이후부턴 모든 대회의 챔피언 벨트는 그의 것이 됐다.

 2000년은 그에게 가장 의미 있는 해다. 3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스승 김일의 은퇴식이 있었다. 김일은 이날 그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김일은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와 더불어 세계적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제자다.

 은퇴 경기로 30여 년 만에 재출범한 WWA(World Westling Association) 타이틀 매치가 있었다. 이날 이왕표는 미국의 자이언트 커간이라는 키 217cm의 선수를 이기고 챔피언에 등극했다. 스승 김일이 67년 거머쥐었던 바로 그 WWA 세계 챔피언 벨트를 33년 만에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스승이 바라보는 가운데 스승에게 드린 은퇴식 선물이었다.

 “인생의 가장 뜨거웠던 순간이었어요. 가장 존경하는 분께 인정을 받은 거잖아요. 김일체육관에 처음 들어갔을 때 제 몸무게는 79kg이었어요. 기준 체중에서 1kg 미달이었죠. 워낙 많은 지원자가 모여들어서 기준에 조금이라도 못 미치면 뽑힐 가망이 없었는데 김일 선생님이 저를 뽑아주셨죠. 그때는 감히 여쭙지도 못했고, 선생님 은퇴식 날 여쭤봤어요. 그때 왜 저를 뽑아주셨는지요.”

 김일의 답은 “네 눈빛이 살아있었어. 말랐지만 강단도 있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널 뽑기를 잘했어. 잘 뽑은 거 같다”였다. 이날 그는 스승의 가운을 선물로 받았다. 그가 어릴 적 TV 속에서 봤던 국민 영웅 김일이 입던 바로 그 호랑이 가운이었다.

80년대 ‘왕표 시대’ 맞았지만 저물어간 프로레슬링
스승 은퇴식에 바친 WWA 챔프 벨트가 가장 뿌듯
“담도암 이겨내 희망 아이콘 되고 싶어”

 그는 프로레슬링 65년 ‘쇼 파동’에 대해서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가 전하는 사건의 자초지종은 이렇다. 65년 11월 27일 6개국 프로레슬링 대회 마지막 날 장영철 선수가 일본의 오키마 선수에게 새우꺾기(상대를 엎어놓은 상태에서 양다리를 잡고 들어 올려 허리를 꺾는 기술)를 당했다. 바닥을 손으로 두드려 항복 의사를 표현하면 되는데 승부욕 강한 장 선수는 항복을 안 한 채 버텼다.

 장 선수의 얼굴색이 점점 검게 변해가는 걸 보고 있던 링 아래 있던 후배들이 의자를 들고 오키마 선수를 때렸다. 선수 모두 검찰로 불려 갔고 레슬링의 쇼적인 요인인 반칙 규칙(치명적인 반칙을 제외하고 다섯을 셀 때까지는 반칙이 허용된다. 또 링 밖으로 떨어져도 열을 셀 때까지 링 안으로 올라오면 경기는 그대로 진행된다)에 대해 이야기하는 도중 담당 검사가 “쇼? 그러니까 짜고 한 거 아니냐?”고 말했고, 그 얘기를 뒤에 있던 기자가 듣고는 ‘레슬링은 쇼’라며 대서특필했다.

 그는 “그 사건이 여태까지도 레슬링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쇼적인 요소는 있지만 어떤 선수가 생지옥 같은 훈련을 해서 지려고 링 위에 올라서겠느냐”며 사실과 다르다고 강조했다. “나도 처음엔 레슬링이 쇼가 아닐까 의구심을 가지고 시작했어요. 그런데 아니에요.”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그냥 누워있는 것처럼 보여도 선수들은 링 위에서 상대가 숨도 못 쉬게 조르고 있는 거라고 했다. “레슬링은 규칙에 따라 진행되는 스포츠입니다. 레슬링에 대한 45년 편견이 빨리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링 아래, 아직 싸워야 할 숙제가 많다

90년대에 들어 프로레슬링에 대한 인기는 점점 사그라졌다. 이 대표는 프로레슬링을 대중화시키기 위해 격기도라는 무도를 만들었다. 프로레슬링의 기본 동작들을 손쉽게 배울 수 있도록 만든 무도다.

 레슬링의 부흥을 위해 활동하던 그는 2013년 생애 최고의 강적을 만났다. 담도암이었다. “그동안 추진해왔던 마이크 타이슨과의 격투기 경기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 세계 최고의 적수들을 만났지만 결국 최고 강적을 만나 무릎을 꿇고 말았던 거죠.” 잘 관리하고 있지만 완치 판정을 받을 때까지는 몇 년 남았다. “제 어린 시절 프로레슬러는 청소년과 어린이의 꿈이었죠. 이제는 그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습니다. 암과 싸우며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긍정적인 에너지를 쏟아낼 계획입니다.”

 그는 2013년부터 학교폭력 추방 운동 단체인 ‘울타리 클럽’를 운영하고 있다. 중고생들을 만나 꿈의 소중함에 관해 이야기해 준다. 며칠 전 항암 요리책을 낸 그는 그 수익금도 청소년들에게 모두 기부할 계획이다. 국민들에게 프로레슬링의 매력을 제대로 알리는 건 그가 생각하는 자신의 사명이다.

 “제 삶의 모토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입니다. 레슬러로서의 삶이 그랬고, 암도 그렇게 완치될 겁니다. 레슬링의 인기 회복, 학교폭력 근절 등 제가 해야 할 숙제들이 아직 많아요. 그 모든 일을 포기하지 않고 해야죠. 김일체육관에서 도망치지 않고 세계 챔피언이 됐듯 제게 주어진 사명을 마쳐야 김일 선생님 후계자로서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글=김소엽 기자 kimsoyub.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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